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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백제의 정복왕이라고 합니다. 정설이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광개토왕의 비문을 분석해 보면 , 이 정설에는 크나큰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근초고왕때는 백제 최전성기인대요^^ 백제 태자 인질은 왜곡된 사료를 그대로 받아 들인거 같습니다. 가야의 일부도 백제의 통제를 받고여, 부여인들이 열도로 들어가는 것도 뒤에서 모두 백제가 지원합니다.
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광개토왕 비문 신묘년조에 http://cafe.daum.net/alhc/51q2/6241
[百殘新羅 舊是 屬民 由來 朝貢 而 倭 以辛卯年來 渡海破]
(백잔신라 구시 속민 유래 조공 이 왜 이신묘년래 도해파)
위 문장을 현대어로 해석해보면
<백제와 신라는 엣날에 속민인 연유로 조공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신묘년부터 <부여>가 바다를 건너고 , 백제[임나.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습니다.>
그동안 약 100여년 동안 이 비문은 <도해:바다를 건너다>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로 번역이 되엇습니다.
그러나 비문에는 <바다를 건너:도해>만 있지 <바다를 건너와:래도해>는 없습니다 <이신묘년래 도해: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다>가 있을 뿐입니다.
이 문장은 오히려 의역하면 <신묘년부터 바다를 건너가>일본을 정별하고.. 가 됩니다.
비문을 첫문장부터 잘못해석하니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역사가 잘못전달되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일본서기는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369년부터 385년까지의 일본서기내용인데, 왕의 즉위와 사망에서 삼국사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고로 다소 참조할만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에 근초고왕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부여>에 조공을 받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는 근초고왕이 해석하기에 따라 부여의 속국이였다는 이야기도 되는듯 합니다.
아래의 일본서기는 사실 <부여서기>를 일본의 맛에 맞게 재 편집 된 것으로 보입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50044268204
49년(369) 봄 3월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沙白‧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木羅斤資와 沙沙奴跪에게[이 두 사람은 그 姓을 모르는데 다만 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精兵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父子와 荒田別‧木羅斤資 등이 意流村[지금은 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370) 봄 2월 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千熊長彦과 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久氐 등이 “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多沙城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驛으로 삼게 했다.
51년(371) 봄 3월 백제왕(근초고왕)이 또 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千熊長彦을 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372) 가을 9월 丁卯 초하루 丙子日 久氐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와서 七枝刀 1자루와 七子鏡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枕流王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375) 백제 肖古王(근초고왕)이 죽었다.
56년(376) 백제왕자 貴須(근구수왕)가 왕이 되었다.
62년(38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壬午年에 신라가 貴國(부여)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己本旱岐와 아들 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 등이 그 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가서 “천황이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加羅에 모여 그 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比跪가 몰래 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384) 백제국 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枕流王이 즉위하였다.
65년(385)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50044268204
첫댓글 왜국을 왜 부여라고 번역하는지요?
왜의 종류가 하도 많아 이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역사를공부하자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여로 하기로 했습니다. 더 좋은 안이 있으면 제안 바랍니다
제가 <왜>라고 쓴 것은 광개토왕릉비에 <왜>라고 쓰여있기 때문인데,
이로인하여 <왜>라는 용어자체가 이미 오염된지 오래이이고 <왜>라는 실체가 끊임없이 변하며 왜의 역사적 종주권이 일본이라 무의식적 세뇌를 불러오고 역사적 왜곡을 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왜>가 부여에서 왔기때문에 <왜>보다는 <부여>가 더 적합한 명칭으로 보입니다.
이후의 글에서는 <왜>의 명칭을 <부여왜>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비족의 칩입으로 부여가 남쪽인 대방으로 내려와 결국 온조백제가 멸망하고 부여백제 즉 구태백제가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 이후 부여는 남으로 더내려가 가야를 점령하고 백제는 신민으로 삼고 신라를 공격하여 결국 신민으로 삼는데. 이결과가 호태왕 비문의 신묘년조로 생각됩니다.
즉 여기서 부여는 비문에 나오는 왜가 되는 것이지요. 그후 부여는 400년 404년 407년 호태왕의 세번의공격으로 견디지 못하고 408년경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