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션 구경왔던 배인순·인숙
- 얼떨결에 합격해 흑인음악 선도
- 좌절 속에 월남행 결심 신중현
- 대충 만들어준 기념음반이 대박
- 60년대 트로트 아성 무너뜨려
1968년 12월께였다.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만난 드러머를 아내로 맞고 연대 입구에서 살림을 차렸다. 돌이 갓 지난 신대철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새벽,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킹레코드사 사장 박성배가 신중현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펄시스터즈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렸다고 흥분해 찾아온 것이었다. 자기가 계약금까지 변상해줄 테니 펄시스터즈 2집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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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께 상명여고를 다녔던 두 살 차이의 펄시스터즈. 김형찬 제공 |
1964년 애드포 결성 이후 여러 록밴드를 결성해 활동했지만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던 중 고민 끝에 신중현은 모든 것을 접고 월남으로 뜨기로 결정했다. 월남에 가서 활동하다 보면 해외 시장으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미8군 군납업체 '화양'과 계약한 후 출국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펄시스터즈의 음반이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가 신중현이 국내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갔다면 1969년부터 신중현이 펄시스터즈와 김추자를 통해 이룩한 한국 대중음악의 혁명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수많은 신중현 사단의 화려한 가수들과 음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니 배인순과 동생 배인숙으로 된 자매 보컬그룹 펄시스터즈는 어느 날 미8군 오디션을 구경하러 갔는데, 정식 지망생은 떨어지고 옆에서 구경하던 자매가 뜻밖에도 합격했다.
1967년 4월부터 펄시스터즈는 베거스버라이어티라는 미8군 쇼단에 픽업되어 일하기 시작했는데, 노래와 외모가 뛰어난 펄시스터즈는 금세 외국 병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기존의 정적인 무대를 탈피하고 동적이며 시각적인 무대를 지향하던 TBC TV의 '쇼쇼쇼'에 펄시스터즈가 1968년 1월에 선을 보인 이후 고정 출연자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펄시스터즈는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둔 음악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소울 혹은 모타운 사운드라고 불리던 흑인들의 팝 음악이었다. 당시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흑인 음악을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미8군 무대였고, 방송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주한미군방송인 AFKN TV였다. 펄시스터즈는 AFKN TV를 열심히 보면서 템테이션스, 슈프림스, 아레사 프랭클린 등의 가수 춤과 창법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펄시스터즈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기존 여성 보컬그룹들은 무대에서 움직임이 별로 없이 음악에만 집중했으며, 기성 가요의 전통에 새로운 스타일을 접목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펄시스터즈는 노래와 춤, 패션까지 새로운 이미지로 통합되는 음악을 추구했으며, 외국의 새로운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을 택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제대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펄시스터즈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편곡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가 신중현을 선택했다. 1967년 하반기에 신중현을 찾아가서 그때부터 집에서 신중현의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년 정도의 레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나려는 신중현에게 펄시스터즈는 기념 음반이라도 하나 내달라고 부탁했고, 신중현은 기념 음반이니 만큼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1968년 12월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 '님아, 커피 한잔'(사진)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작심하고 만들었던 신중현 밴드들의 앞의 음반들은 실패했지만, 별로 기대하지 않고 만들었던 펄시스터즈의 음반은 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1969년 가요계는 새롭고 참신한 바람을 몰고온 것이다. 소위 서방음악의 상륙이 바로 그것. 복고조의 가요만이 장사가 되고 뽕짝가요곡을 불러야만 가수로서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종전의 선입견에서 이상이 온 것이다. 펄시스터즈가 부른 소울곡 '님아'는 그런 선입견을 뒤엎고 크게 힛트를 하여 신인 보컬그룹을 하루아침에 인기대열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소울과 사이키에 뽕짝이 가던 한해' 명랑 70.2, 102쪽
위의 기록을 보면 드디어 이미자의 아성을 펄시스터즈가 무너뜨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한국 대중음악계는 미국식의 음악인 스탠더드팝과 기존의 양식인 트로트가 대결 구도를 이루고 있었지만, 음반 시장에서는 트로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정훈희, 차중락, 윤복희, 유주용, 정원 등은 미국의 최첨단 팝 음악을 내세우며 가요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련되고 동적인 무대 매너로 차별적인 이미지를 획득했지만 아직 가요계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펄시스터즈와 그 뒤를 잇는 김추자의 대박으로 '소울사이키'라는 새로운 음악이 음반 시장의 표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저술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