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 간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 부천공동체
이 순 성 베드로 신부
사제로 더 잘 살기 위해 교구 떠나
수도회 선택한 순교 성인의 후예
지난 7월 4일 아침, 글라렛 선교 수도회 부천공동체 이순성 베드로 신부를 만나기 위해 인천교구 김포 사우동 성당을 찾았다. 사우동 본당 주임 장준 필립보 신부가 마침 열흘 동안 미국 출장 중이어서 대신 평일과 주일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1월 설립된 본당이라 아직 본당을 짓지 못한 채 가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지만 그날 아침 10시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은 마음과 몸을 오롯이 주님께 바치는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신부 또한 온 정성을 다해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와 소통을 주제로 한 강론을 열정적으로 했다.
미사 후 사제관에서 마주 앉은 이 신부는 세속 나이 50살 되던 1999년 2월 말, 사제로 더 잘 살기 위해 전주교구를 떠나 글라렛 선교 수도회에 입회했다는 설명부터 시작한다.
“사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초등학교 때입니다. 교구장 주교님을 위한 어린이 복사를 하던 때이지요. 1965년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적극적인 사제 지망을 했습니다. 1977년 7월 5일 사제품을 받은 지 22년이 지나 세속 나이 50살이 되었을 때, 이후의 인생살이를 50년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후 그 때까지의 사제의 삶의 외형적 방식과는 달리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여타 수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모두 말할 만큼의 기회는 아닌 것 같기에 양해를 구합니다.”
교구 사제에서 수도 사제를 택한 이유와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답을 극도로 아낀다.
이 신부는 1949년 11월 25일(음력) 전주시 풍남동 88번지에서 아버지 이재식 마르코(1958년 62세로 선종) 님과 어머니 장순용 마르타(1997년 88세로 선종) 님 사이의 1녀 5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5대 현조부 때 박해를 피해 충남 임천에서 전북 고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그 신앙의 맥이 이어지고 있고, 외가도 오랜 구교우 집안이다. 이명서 베드로 성인이 증조부 형제다. 이 신부 형제 중에 셋째 형인 전주교구 원로사제 이수현 보나벤뚜라 신부가 있고, 조카들 중에 이해숙 피데스, 이은화 에디따, 안영숙 렐리아 수녀와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가 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은 가문이다 보니 집안 분위기 또한 늘 하느님 중심이다. 전주중앙초등학교와 전주남중학교를 거친 뒤 서울 혜화동의 소신학교 진학은 너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하겠다. 1968년 광주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1977년 6월 대학원을 졸업하고 신품을 받은 후 진안과 전동 본당 보좌와 수류동 본당 주임을 거쳐 광주가톨릭대 교수 생활을 하던 중 1984년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87년 종교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서학동 주임으로 사목하던 중 1989년 다시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임명돼 10년 동안 종교학과 교의신학을 가르쳤다.
수도 사제와 교구 사제의 차이 크지 않아
이 신부는 일본 글라렛 선교 수도회 동아시아 관구에서 수련을 마치고 2001년 콜롬비아에서 원주민들과 살며 선교 체험을 한 뒤 2002년 스페인 마드리드 근처에 있는 꼴메나르 비에호(Colmenar Viejo)로 가 다시 6개월 동안 영성 수련을 하고 돌아왔다. 이어 전남 남평 공동체와 부천 공동체를 거친 뒤 2010년부터 2년 동안 서울수도원장직을 맡아 서울 성북동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후배에게 물려주고 다시 부천 공동체로 돌아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수도원장직을 맡기 전 9개월 동안 다시 중미 파나마에 있는 다리엔 교황청대리구 산타페(Santa Fe. : 거룩한 신앙) 본당 주임으로 원주민 및 인디오들과 함께 생활하며 선교사로 살았다. 교황이 교구장이며 총대리 주교가 현지 사목을 책임지고 있는 다리엔 대리구 산타페 본당에는 19개 공소가 있어 밀림을 헤치고 각 공소들을 순방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을 보살폈다. 젊었을 때와 달리 더위에 시달리고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다. 귀국 후 3주만에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등 후유증으로 1년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는 모든 수도회가 그렇듯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수도회’입니다. ‘위한 수도회’이기에 누구이든, 언제이든, 어느 곳이든 ‘필요하기에 부르는 이’가 있으면 그 부름에 응하여 유익이 되신 예수님의 체험과 삶에 일치했던 창설자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St. Antonio Maria Claret, 1807. 12. 23~1870. 10. 24)의 영성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영성은 바로 ”무슨 소용이 있느냐? Quid Prodest?", “내 아버지의 (집) Patris Mei ; (루카 2, 49)”, “그리스도의 사랑 Caritas Christi ; (2 코린 5, 14)”, “주님의 영 Spiritus Domini ; (루카 4, 18)”을 현재이자 실상으로 사는 것이지요. 계속 그렇게 해야 하겠지요.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갈 지침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로 했었습니다. 사목지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침대로 살지 못한 시간들, 경우들이 꽤 많았습니다. 만났던 교형자매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지면을 통해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제 생활 36년 가운데 대신학교 교수 12년, 수도 사제 14년, 일선 본당 사목 10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지구 반대편도 마다하지 않고 스승 예수처럼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이 신부지만 마음에 남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서인가. 이 신부를 만나면 언제나 먼저 고개를 숙이고 상대편에 앞서 나서는 법이 없다. 행동도 말씨도 너무 조용하다. 그 험한 라틴아메리카 밀림을 헤치고 다니며 원주민과 인디오 신자들을 찾아 나선 선교사의 씩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사제 만나기가 힘든 그들이 언제 찾아가도 반겨 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수도 사제나 교구 사제의 차이는 크게 없다고 봅니다. 다 함께 교회의 사제이기 때문이지요. 교회는 공동체이고, 그 삶의 방식이 공동체 생활이라는 점에서 매 한가지인 것이지요. 물론 작은 차이는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요. ‘청빈 서약’ 여부와 ‘기도와 전례 중심의 규칙적인 일과의 생활’ 여부가 그것이 아닐까요? 작은 차이는 내부적인 것이겠지만 교구 사제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청빈과 기도전례 중심의 규칙적인 일과의 생활’을 너무 멋지게 잘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후배 사제들에게는 ‘사제의 삶을 위한 지침은 불변하는 평생의 지침’이라는 말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Caritas Christi)’을 주제로 사는 ‘신앙의 해’
글라렛 선교 수도회는 창설자 성인의 영성을 공유하며 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성인의 영성인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내 아버지의 (집)”, “그리스도의 사랑”, “주님의 영”은 모두 예수께서 체험하시고 사셨던 삶의 내용이다. ‘신앙의 해’인 올해는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Caritas Christi)'을 주제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수도회에서는 2011년부터 연 이어 앞에서 소개한 주제를 중심으로 창설자 성인의 영성을 공유하는데 ‘신앙의 해’인 올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모두를 밀어붙이는 신앙의 삶,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하고 흠숭하며 영광 드리는 대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온 몸으로 선포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지요. 글라렛 수도회만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 전체 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자 크게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교구 별로, 수도회 별로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행하는 모습들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교구 사제와 수도 사제를 두루 경험한 이 신부의 영성은 깊이가 있고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에 따라 전국 각 교구 사제 피정 때나 수도회 및 본당 신심 단체들의 피정과 영적 지도 요청이 끊이지 않아 항상 바쁘다. 그런 빠듯한 일정들 속에서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각별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아픔이요 과제인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한다.
“결국 돈, 재물의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회의 문제이지요. 재물은 공유하고 분배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그 문제를 안고 있는데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삽니다. 그러나 부유한 이들은 의지하려는 이가 곁에 있으면 귀찮은 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간에도, 단체 간에도, 공동체 간에도 그러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요청하는 대로, 시대가 요청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애쓴다면 문제 해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난’, 한국 교회의 현재와 실상이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이 지난 7월 5일 반포된 데 대해서도 이 신부는 큰 의미를 두며 반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심혈을 기울인 작업 끝에 초안을 작성한 뒤 지난 2월 사임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를 이어 받아 완성했다. 가톨릭교회의 특성인 ‘사도 계승’을 다시 확인한 점에서 우선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두 교황의 ‘네 개의 손’으로 함께 만들었다는 새 회칙은 사랑과 희망에 관한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2007)에 이은 ‘향주삼덕’ 시리즈의 완결 편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앙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새 회칙은 “신앙이야말로 위기에 빠져 있는 현대 문명과 인류에게 참된 빛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참된 신앙은 세상의 정의와 평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보살핌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새 회칙 발표회장에서 ‘새 회칙을 통해 문체, 감수성과 강조점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분 교황님의 가르침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연속성이 있다.’는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게르하르트 뮐러 대주교님의 말씀과 ‘회칙의 근본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 선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신앙을 충실히 삶으로써, 세상을 참된 형제애로 가득하고 약한 이들을 돌보아주는 곳으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신 교황청 새복음화평의회 의장 리노 피시첼라 대주교님, 그리고 주교성 장관 마크 우엘레 추기경님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새 회칙에는 특히 교황명을 ‘프란치스코’로 하신 새 교황님의 신앙정신과 사목방향, 또 교회의 현재와 실상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난’, 이 말의 현재와 실상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가톨릭교회를 향하여 큰 목소리로 요청하는 바라고 믿습니다. 항상 교황님과 일치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현재여야 하고 실싱이어야 할 것 역시 바로 그 ‘가난’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오 05ernst@gmail.com
첫댓글 모처럼 왔다가 선배님들의 향기를 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