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가 되어 강연장에 도착한다.
플래스틱 행사용 의자에는 나이 든 할머니들과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다 차지했다.
여기저기서 온듯한 승려들도 많다.
빈 자리를 찾으니 가방을 두어 미리 차지해 버렸다.
초의선사의 동다송 탑비 아래 앉아 작은 공책에 쓰며 듣는다.
"할아버지가 해남 사람이다.
할머니 외가가 해남 윤씨다.
난 전라도 사람이고, 해남 윤씨 외손에서 대학자가 둘 배출되었는데
한사람은 다산 정약용이고 또 한 사람은 나 도올이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외가의 많은 서적들을 참고할 수 있어
그런 대저작이 나올 수 있었다.
녹우당이 있어 다산이 있었던 거다.
당대의 석학 초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당시 초의가 서울에 나타나면 한양의 명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초의를 자리에 모시려고 힘을 썼다.
다산의 소개가 있었다.
대흥사 주지 월호 스님과는 30년 전부터 교유해 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도력이 대단한 분이다.
두륜산의 륜자를 바퀴 륜자를 쓰는데 그게 아니라 중국 곤륜산의 륜자를 써야 한다.
곤륜산의 기운이 백두산을 거쳐 두륜산에 머문 거다.
백두와 곤륜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두륜이 된 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기운이 뭉친 곳이 땅끝 해남이고 두륜산이다.
그 아래 정치인 박지원 대표도 태어났다.
(이낙연 도지사 옆에 나란히 몇 정치인과 해남윤씨 종손 등이 앉아있다.)
그의 말은 정확하며 예술성이 있다.
오늘 강의를 위해 초의를 죽어라 공부했다.
평생 초의를 사랑할 것만 같다.
무안군 삼향면 신기리 출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가 후 40대 때 집을 찾았는데
흔적을 못 찾았댄다.
5살 때 개천에 빠졌는데 지나가던 승려가 구해줬는데, 그 스님이 나주 운흥사의
벽봉 스님이었다.
15살인 1800년(정조 승하)에 벽봉 스님께 출가했다.
운흥사 주변에 차나무가 많았다.
임란 이후 차문화가 사라지고 술문화가 흥했지만 차를 마셔야 한다.
술은 기운을 위로 뿜어올리지만
차는 기운을 아래로 끌어 하체를 든든히 한다.
우리는 산천의 물이 맑아 그냥 마셔도 좋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아 차문화가 발달했다.
19살 청년 때 영험한 월출산에 밤에 올라 달 뜨는 모습을 보고 오도송을 읊었다.
득도하고 나면 품격이 달라진다.
1807년 22살 때 운흥사에서 대흥사로 왔다.
호랑이를 갖고 놀았다는 완호스님께 구족계를 받고 풀옷으로 안빈낙도하라는
초의를 법명으로 받았다. 완호 스님 제자 중에는 흴 호의 호의, 연꽃 하의 하의가 있어
초의도 그 돌림자를 받았다.
대흥사에서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하며 20대에 가장 한시를 잘 쓴 시인이 됐다.
젊은 나이에 그의 시를 보면 죽여준다.
승려의 불교 내음이 없이 깊고 높은 불교의 경지에 다다른 시다.
어디서든 시서화가 있으면 초의를 불러라고 했다.
시로써 조선 지성계를 제압했다.
1800년대 초에 대흥사에 대화재가 있어 복언할 때 초의가
단청하고 그림을 그렸다.
문인화의 경지가 다르다.
현재 문인화를 그릴 수있는 이는 나 도올 밖에 없다.
문인이 된 다음에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환쟁이드이 공부도 안하고 그림을 그린다.
다선일여다. 차를 마시는 것이 선정에 드는 거다.
초의의 공부는 족보를 찾기가 어렵다.
추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대 추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문데.
24살 때 48살의 다산을 만난다.
그 해에 진도의 소치가 태어난다.
나중에 소치가 일지암에 와 시자를 하며 배운다.
남종화의 시작이 초의에서 시작됐다.
정조 때 학문 직작이 크게 일었다.
다산만 알지만 그보다 경화세족 대표로서 풍홍달서라느느 말이 있었다.
풍산홍씨와 달성서씨가 뛰어났다.
다산 큰 형의 사위인 황서영의 벽서사건으로 장기에서 강진으로 유배당한 다산이
만덕산 백련사의 혜장을 찾아 간다.
술 마시며 호방하게 살던 승려 혜장은 다산과 주역의 건괘초륙을 밤새 논하며 눈물을 흘리며 제자가 된다.
다산의 술버릇이 차마시는 것으로 바뀌고, 혜장의 술버릇이 강해진 건 아이러니다.
혜장은 연파, 아암 등의 호를 썼는데 아자가 어린이다.
노장사상의 지향점이 어린아이다.
그 아암이 초의를 다산에게 소개한다.
다산은 서울의 자녀들에게 초의를 소개한다.
그런 자리에서 추사도 만난다. 추사가 귀양길에 초의를 만난 것이 아니라
한양에서부터 친교가 있었다.
초의는 다산에게서 엄청난 학문세계를 접한다.
39살에 일지암을 짓는다.
당나라 한산 스님이 새는 한 가지에 살아도 편안하다는 일지에서 당호를 따 왔다.
추사는 충남 예산 사람이다. 충청인을 무시하는 이도 있지만 기골이 쎈 충청인들이다.
김좌진 이범석 윤봉길 등을 보라.
추사는 경주 김씨지만 난 광산인이다.추사와 초의는 동갑인데
추사는 억울한 귀양살이를 제주에서 위리안치를 당하며 견딘다.
둘 사이의 서간이 70여편 남아있다.
위장이 안 좋아 소화가 안되었던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본달라고 여러 번 편지한다.
나도 위장이 안좋다. 고3때의 57kg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초의와 추사의 굉장한 사랑 멋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9년 제주 귀양 동안 한번 찾아가 6개월을 같이 지내고 온다.
봉은사 판전이란 글씨를 보면 노년에 추사가 마음을 많이 비운 것이 보인다.
전라도 광주의 민주정신으로 정권교체에 앞장 서 달라."
4시 반에 강연을 끝낸다.
옥천의 절에서 템플스테이 홍보물을 준다.
유선관을 들러 산책로를 따라 차로 돌아오니 배가 더 고프다.
밥 먹을 곳이 없다. 아니 혼자 이시각에 먹기가 어중간하다.
새로운 취업기관에 지원서를 준비하는 바보에게 전화하니 늦을 거란다.
영암 청풍휴게소에 들러 밥을 먹으랬더니 식당이 잠겼다.
토스트 하나와 맥반석 오징어를 사고 있는데, 기훈이가 전화했다.
동생 현숙이 부부가 와 풍암저수지에서 노래공연 보고 있으니 와서 술 한잔하게 얼른 오란다.
족발집에서 술을 마신다. 기훈이와 매제도 술이 취해간다.
어제 마신 술은 오늘 두륜산에서 깬 탓인지 나도 잘 들어간다.
퇴근하는 바보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