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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마님.
평안하옵신지요.
님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는 말씀을 대하시면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님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까닭은,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죽도록 충성하지못하는 모습에서
성도들이 뭔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음을
늘 보게 되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감은 님에게서도 예외가 아닌데,
님이 표현한 바에 의하면,
님 자신에게서도 자유함 (게으름 일지도..) 속 에서 살다가
가끔 이 말씀을 접하게 되면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에
자책할때가 있기도 하고요.
그러한 님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의 말씀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가 주어지게 된 것이
그 시대에 어떤 배경이나
그 말씀이 필요한 상황이 있었던 가운데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알고자 하십니다.
해서, 다음과 같이 답글을 드립니다.
님이 알고자 한 ‘죽도록 충성하라’는 요한계시록 2장 10절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말씀을 사도 요한에게 주신 것 중에서 일곱 교회에 주신 계시의 말씀으로 서머나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그래서 서머나교회에 주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부터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어떤 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앞서 있는 신약성경의 명칭과는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신약성경은 대체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기록한 저자의 이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저자의 이름을 따르되 ‘계시록’이란 말이 붙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1)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쓴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란 말과 같은 단어가 ‘묵시’(黙示)입니다. 이 말은 “말 없는 가운데 은연중에 자기의 의사를 나타내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묵시’를 이르는 말이 계시입니다.
이러한 용어인 ‘계시’가 그리스도의 교회, 곧 기독교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에서는 이 책의 시작하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라고 하고 있어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에서 사용된 ‘계시’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곳에 단 한번 나옵니다. 이 용어는 ‘계시’, ‘폭로’인데, 이는 요한계시록의 성격이 ‘예언’(1:3), ‘예언의 책’(22:7, 10, 18-19)인데 따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1:1)에서도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던 내용들인데, 이것이 요한이 받은 계시와 관련해서는 요한이 기록한 또 다른 신약성경인 요한복음과 늘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요한복음에 담고 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메시지들, 이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데, 이 계시는 ‘반드시 속히 되어져야 할 일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받은 계시의 복음에서 반드시 속히 되어져야 할 일들까지가 하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서 장차 되어질 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맡기셨는데, 이제 선지자가 말해 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자신의 계시를 열어 반드시 속히 되어져야 할 일들을 알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계시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기의 뜻을 알려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반드시 속히 될 일’의 관점에서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반드시 속히 될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을 요한에게 보이시고 이를 기록하게 하여서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자기의 종들에게 알리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자기의 종 요한에게 보내 그 뜻을 설명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곧 자기가 듣고 본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은 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의 세 가지의 병행적이며 점진적의 진행 구조를 통해서 요한에게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큰 흐름에 의해서 볼 때 첫째는, ‘이미 본 것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일입니다(1장).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쓸 때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구약에서 계시해 주신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분은 처음과 나중이요 죽었으나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 있는 자로서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교회에 되어지고 있는 일’입니다(2-3장). 교회는 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생명이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셋째는,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인 하늘 세계의 광경입니다(4-22장). 하늘 세계에서의 예배를 보여주시며, 일곱 재앙의 심판과 하늘로부터 오는 새하늘과 새땅을 통해서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에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장에 있는 서머나교회에 주신 말씀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교회에 되어지고 있는 일’에 해당하고 계시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서머나교회에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서머나교회에 주신 계시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두 번째 편지에 해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4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큰 항구 도시로 헬무스 강이 흘러 들어가는 걸프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인구는 약 1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러한 서머나는 좋은 길이 나 있어서 내륙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천혜의 항구로 인해 수출업이 번창한 곳으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 중 하나였는데 주전 193년에 소아시아에서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진 최초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의 신전을 포함하는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머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가라는 정확한 시기는 알지를 못합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는 성령의 역사를 다루는 사도행전에도, 그리고 신약의 어느 서신서에도 언급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서머나교회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다만 구전(口傳)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초대 교회의 구전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 초기에 에베소로 가는 도중에 그 도시를 방문했다고 하고 있으므로 이 시기에 세워졌지 않은가라고 추론할 따름입니다. 서머나교회는 신약성경에 단 두 번 언급되지만(1:11, 2:8), 주후 2세기에 서머나는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머나교회는 이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의 순교로도 유명합니다.
이 서머나교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2:8). 서머나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처음이요 나중’이란 어구는 요한계시록에 모두 세 번 나오는데(1:17, 2:8, 22:13)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며, 이사야 41;4, 44:6, 48:12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이것은 1:8의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표현의 묘사로 서머나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영원한 현재성을 말하여 주는 것에서 실상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면서 주님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생명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란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로 영원성을 표현하였습니다(출 3:14).
주님이 이처럼 ‘처음과 나중’이요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그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서머나교회가 주께 가져온 믿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과 함께 이어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2:9)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온 세상에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항상 함께 따라다녔던 적대적인 이방인들의 배척으로 인해서 많은 고난[환난]을 당하며 이로 인해서 따르는 궁핍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반대와 중상을 받는 등의 훼방을 겪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처지에서도 그들이 주께 가진 믿음에 서 있었습니다. 서머나교회가 이처럼 믿음에 있었던 것은 이 교회를 붙들고 있었던 주님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머나교회는 그들이 주께 견고히 믿음에 있었던 대로 그들의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나중 또한 주님의 생명에 있음을 확증하시는 것으로 주님은 서머나교회가 주께 있는 믿음에 맞는 모습으로 자신의 나타내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서머나교회를 위로하시며 서머나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하실 일’, 그래서 서머나교회에 ‘이제 곧 되어질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서머나교회가 주를 위하여 참으로 많은 환난을 당하며 이로 인해서 재산을 몰수 또는 탈취를 당함으로 인하여 궁핍을 겪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늘의 기업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소유가 이미 하늘에 있는 자이므로 이 땅에서의 환난과 궁핍이 그들을 결코 가난한 자가 되게 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환난과 궁핍으로 하늘의 부요를 알며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서머나교회는 사람의 생명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풍성함에 이지 않고 하나님으로 풍부함에 있다는 것을 배운 사람들입니다(눅 12:15, 21).
이 부요함에 대한 증거는 신약성경 곳곳에서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것은 주님께서 가난해지심으로 풍성한 영적인 복을 받고 영원의 보화로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8:9).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을 받게 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약 2:5).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26)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산업을 빼앗겨도 기뻐했습니다(히 10:34).
주께서는 이 위로의 말씀과 함께 서머나교회를 위하여 장차 하실 일을, 그래서 이제 되어질 일을 알게 해주십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머나교회는 유대인의 훼방도 받았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말입니다. ‘사단의 회(會)’, 곧 ‘사단의 집단’이 되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사단의 회’로 다루어지는 것은 이들의 훼방이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일인 반대와 대적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머나교회 성도들에 대해 악감을 품고 중상(中傷)하고 또는 고발하여 어려움을 겪게 하였습니다. 당시는 황제 숭배 사상이 있었으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종교가 갖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으로 로마 정부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훼방하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은 황제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고발함으로 어려움을 겪게 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서머나교회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요. 그들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참된 유대인이 아니고 ‘사단의 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활동을 하게 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 것을 훼방하여 감옥에 집어넣는 등의 박해가 있도록 하겠지만, 사단의 활동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한분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는 믿음을 드러내주는 시험의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박해를 당함으로 감옥에 갇히는 환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그 속에 오래 두지 않고 건져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에서 환난은 십일 동안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십일 동안’은 문자적으로의 단 열흘로서의 기간이 아닌 환난의 기간이 그리 길지 않고 비교적 짧을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님이여,
여기에서 님이 궁금해 하며 질문하게 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을 드린 것에서 보게 되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지요 이 ‘죽도록 충성하라’는 권면은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 의해서,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믿음의 주로 섬기며 따르는 일로 인하여’ 그들이 이방인들에게서 당하는 환난과 궁핍과 그리고 또한 자칭 유대인에게서 당하는 훼방을 인하여 해주시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까?
현대어성경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권면이 있는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가 앞으로 당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악마가 믿음을 시험하려고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내게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쉬운성경도 “그러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더라도 끝까지 충성하여라”,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죽기까지 신실하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라고 번역하였으며, 우리말성경, 현대인의 성경, 바른성경, 표준새번역성경은 ”너는 죽도록 충성하여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성경도 같은 이해에 의해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당할 고난과 관련해서, 곧 마귀가 그들이 지닌 믿음을 인해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있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에서 그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버림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주님께 가진 믿음에 신실(진실)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에게 그들의 믿음이 있는 것인지를 말해 주시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리스도께 가진 그 믿음으로 인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게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에서의 그 죽도록 하는 충성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생명의 위협을 받는 해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주님이 되심에 대한 신뢰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을 향한 믿음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우리에게서 어떤 것이겠는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그 어떤 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놓으려고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우리의 믿음이시오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누가 하시고 있는가 하면, 우리의 강한 결심과 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계 2:8)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죽음의 고난으로부터도 지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결코 둘째 사망의 해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 나가는 것은, 그래서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그 믿음이 신실히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의 믿음에다가 두시고 결코 자신에게 있는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는, 결코 자신에게서 끊어져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해 나가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나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의 안전한 보호와 그 보장을 확증해주시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기는 자는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왜곡하여서 어떤 일을 맡아서 그야말로 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초죽음의 상태가 되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목숨을 충성의 담보로 내놓고 죽음을 각오하여서 하라는 것이겠으며, 이렇게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며 불의한 것이니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며 하늘의 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압박용의 권면이겠는지요.
님은 질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이 말씀으로 인하여, 죽도록 충성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성도들이 뭔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음을 늘 보게 되는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것은 자신에게서도 예외가 아님을 말하기를 “(나) 자신에게서도 자유함(게으름 일지도..) 속에서 살다가 가끔 이 말씀을 접하게 되면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에 자책할 때가 있기도 하다” 라고 했습니다만, 어떤지요? 주님께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권면을 하시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여 알고서도 그러한 것인지요. 오히려 주님의 이 권면이 주어짐으로 해서 우리의 믿음이 주께 부요하며, 생명의 보호와 그 안전을 갖지 않는지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겪고 있는 모든 현실 속에서 그 너머에 있는 하늘의 영원한 것에 우리의 눈을 두고서 우리의 시야가 그곳을 향하지 않는지요.
님이여,
님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처지에 있는지요. 지금 님이 겪고 있는 현실과 그 실정이 어떤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방인들로부터 겪는 환난과 궁핍과 사단의 회<사단의 무리>로 불려지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에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무리들에게서 반대와 중상모략과 비난을 받는 것 속에서도 님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이 견고히 있는지요. 오직 하나님이 주신 복음에 진실함으로 있는 일로 인해서 그 믿음이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배척을 당하는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외면당하여 있는 그 속에서 님은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즉 그 속에서 님은 자신의 생명을 다하더라도, 님이 붙들고 있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 ‘이기는 자’로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 외의 것에서도 얼마든지 있게 되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살려고 하는 님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서 보게 하고 의지하게 하려고 하는 것으로부터도 끝까지 지켜 ‘이기는 자’로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진의(眞意)는 우리가 하고, 또한 해 나갈 어떤 일에 대한 것이 아니며, 또한 죽음을 내놓는 충성을 담보로 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도록 충성하지 않으면 저주의 화가 임할 것임을,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지 못하고 죽음의 화를 당할 것임을 엄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고함을 가지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님이여,
우리는 말입니다. 일이나 그에 따른 어떤 행위에 대한 것은 맡은 자가 그 맡은 바의 소임에 따라서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도 주어졌잖습니까? 열심히 하시고 죽도록 충성도 하십시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면서 교회 생활을 해나가는데서 필요를 여기며, 그래서 필요하여 해 나가고자 하는 것을 가져나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 성경의 읽음과 배움, 기도, 봉사, 성도의 교제 등 등 그 모든 것에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며, 성도의 믿음을 세우는데 함께 하며 도움이 되고자 하십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 아니겠는지요. 허니, 그 마음이 있으시면 굳게 마음먹은 것을 실행하시고 열심을 품고 충성스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분의 마음과 열심, 충성을 그 누구도 제어하고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분에게 온 교회의 주가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서머나교회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은 주님 자신과 생명의 몸의 관계에 있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10절에서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라고 생명으로 이루어진 면류관을 약속으로 주셨는데, 11절에서는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여서 지옥 형벌로 악한 자들에게 임하는 둘째 사망의 해가 주님의 따르는 믿음에 있는 의로운 백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었고 따라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의로운 백성들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님이며, 또한 우리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마치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님이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함으로
긴 글이 되었습니다만,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이
님에게 많은,
큰 유익으로 돌아가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답글로 인해
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 안에서 참된 자유에 있으면서
그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강건하실 것과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잘 알았습니다~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