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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조재진 목사님이 설교베끼기를 해서 이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어서 지금은 없어진 우리용두동교회 코이노니아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첫번째 설교베끼기는 푸른초장에도 실려있기에 스켄하여 자료를 첨부하여 감리교단 게시판에도 올릴예정입니다. 설교동영상도 함께 있습니다.
두번째 설교베끼기는 이동원목사님의 설교를 통으로 베끼기를 하고도 이를 은폐하는 후한무치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재진 목사님께 보내는 공개편지
샬롬! 주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목사님께 지난11월14일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까지 답장이 없어서 무척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개편지를 씁니다.
아래 글은 지난2010년 송구영신 예배설교 때문에 조재진 목사님께 쓴 메일입니다.
제목 : 목사님 고광천 권사입니다
날짜 :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13시 57분 15초 +0900
보낸이 :고광천 <hwsystem@dreamwiz.com>
받는이 :조재진목사님 <jcsg1616@hanmail.net>
첨부파일 :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교회.hwp
조재진 목사님께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고광천 권사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을 듣고 새벽2시에 집에 와서 목사님이 잘 사용하시지 않던 ‘거룩한 강자’라는 말을 인터넷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새봄교회 김재호목사님의 2009년6월7일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교회/ 이사야 60: 19-22’ 의 말씀과 목사님께서 송구영신 예배때 ‘거룩한 강자’ 의 말씀이 많은 부분 일치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재호목사님의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교회’의 설교 문을 파일로 첨부하겠습니다.
목사님 저의 잘못된 판단이기를 기대해보면서 목사님께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송구영신예배의 말씀이 올라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 저의 글이 무뢰 하였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늘 주님의 은총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위와 같이 메일을 보내자 아래와 같이 메일 답장이 왔습니다.
보낸날짜 2011/01/10 18:50:45
보낸이 조재진 <jcsg1616@hanmail.net>
받는이 고광천 <hwsystem@dreamwiz.com>
제목 RE: 목사님 고광천 권사입니다
고광천권사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권사님께서 담임목사의 설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모너터링을 하고 계시니
감사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하네요
송구영신예배때에 한
'거룩한 강자가 되라'는 말씀은
송구영신예배때에 어떤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을까? 라고 기도하다가
2007년도에
제가 제천제일교회에서 설교했던 내용을 수정해서 설교한 것입니다.
권사님이 말씀하신 새봄교회 김재호 목사님이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고,
그 분의 설교를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앞부문에 행복한 교회가 좋으냐? 강하게 만들어 주는 교회가 좋으냐? 라는 주제는
고인이 되신 옥한흠목사님께서
어느 모임에서 제기한 문제를,
제가 인용한 것입니다.
아마 설교는 다양하게 네트워크가 되기 때문에
서로 공유하기도 하고, 인용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송구영신예배 설교문을 올리지 않은 이유는
일단 올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예배 설교문을 다 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권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재진목사 드림
그리고 5일정도 있다가 조재진 목사님이 저에게 다시 보낸 메일입니다.
보낸날짜 2011/01/14 17:56:29 [GMT+09:00]
보낸이 조재진 <jcsg1616@hanmail.net>
받는이 고광천 <hwsystem@dreamwiz.com>
제목 고광천 권사님 감사드립니다.
고광천권사님,
먼저 권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들에겐 너무 익숙해서 쉽게 잊어버리기 쉬운 설교자의 도덕성과 정직성에 대해서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권사님의 메일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고,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게는 분명히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정말 필요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송구영신예배때 한 “거룩한 강자가 되라”는 설교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2007년 제천제일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을 많이 수정해서 한 설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
그 설교가 이미 고인이 되신 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많은 부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설교의 앞부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 라는 말을 명확하게 밝혀서 정직하게 설교했었는데,
지난 송구영신예배를 앞두고 다시 이 설교를 수정하면서 그만 그 부분을 생략하고 말았던 겁니다.
어쨌든 저는
제 설교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목사님의 것을 인용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밝히지 못하고 설교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그냥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께서 그 부분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제 마음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죄송해서
많은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렸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이 부분에 대해 교인들 앞에서 저의 잘못을 시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부끄러움 없는 목사로 서도록 깨우쳐주신 권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재진목사 드림
위와 같이 메일을 주고받으면 목사님의 진정성을 믿었기에 외부로 공론화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고옥한흠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하셨다고 하시기에 더 이상 말씀은 드리지 않았지만 사실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새봄교회 김재호목사님의 2009년6월7일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교회/ 이사야 60: 19-22’ 의 말씀과 상당한부분이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는 올 초에 발행된 푸른 초장에 실려 있는 조재진 목사님의 말씀과 김재호 목사님의 말씀을 비교해보시면 알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송구영신예배 동영상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 졌다가 내려진 사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교회 홈페이지에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빠뜨리지 않고 보는 편인데 2011년11월11일 금요기도회 설교를 듣다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동원목사님의(지구촌교회원로목사),‘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라는 제목의 설교를 크리스천투데이 기사(입력 : 2004.10.18 11:56 10월 17일 주일예배 설교-고전9:19-23)에서 찾은 설교와 동일하기에 목사님께 메일을 보냈지만 아직 까지 아무런 답장이 없고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던 2011년11월11일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라는 제목의 말씀도 제가 메일을 보낸 다음날 삭제 되어있었습니다.
목사님 오늘 이렇게 공개편지를 쓰는 이유는 목사님께서 메일을 통하여 저에게
“목사들에겐 너무 익숙해서 쉽게 잊어버리기 쉬운 설교자의 도덕성과 정직성에 대해서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권사님의 메일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고,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게는 분명히 힘든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정말 필요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고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지는 일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목사님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어서 공개편지를 씁니다.
혹여 목사님께 무례함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용두동교회에 언제나 생명력 넘치는 복음이 선포되기를 소망하며 목사님이 언제나 성령 충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래 글은 이동원목사님의 설교 말씀입니다.
이동원목사(지구촌교회),<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입력 : 2004.10.18 11:56 10월 17일 주일예배 설교-고전9:19-23
공산통치 시대 러시아의 한 수용소에 보리스 콘펠드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의사가 배치되어 왔습니다. 그의 임무는 아무리 심한 병에 걸린 환자라도 “건강함. 일할 수 있음”이라는 도장을 찍어 노동장으로 보내야한다는 지령을 받고 있었고 만일 이 지령을 어기면 그는 사형 당할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한 죄수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 생명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총명해 보이는 젊은 죄수를 진단하다가 그가 장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됩니다. 초기 장암이라 치료의 희망이 있다고 판단한 이 의사는 수용소의 비밀수칙을 어기고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회복되기 시작하던 날 그는 의사에게 자신의 목숨의 위험을 알면서 왜 나를 살리는가라고 묻습니다. 이 의사는 조용히 왜냐하면 예수님이 당신은 너무 소중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저녁 그가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는 한 간수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접합니다. 방금전에 자기를 살린 의사가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처형당한 의사가 살린 청년이 바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시작하여 나흘간 이웃 사랑 축제가 열립니다.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들려주고 결신하게 하는 잔치입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 중 특별한 기간을 정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함은 온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들이 아무쪼록 몇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자 함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 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는 주후 50년대 소위 제 2차 선교여행중 1년 반의 시간을 머물며 영혼들을 친히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자신을 통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라도 하겠고 무엇이라도 되겠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구원받는 일보다 더 좋은 일 더 고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이 소중한 영혼들을 전도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1.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그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 제일 먼저 한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종으로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어떤 사람이 종이 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는 갈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의 본문에서는 스스로 이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왜 인가요?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아니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바울은 전도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혹은 전도의 더 좋은 기회를 위해 어떤 권리들을 포기해야 했습니까? 고전9:4에서는 (더 잘)먹고 마시는 권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9:5에서는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편히 다닐 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9:9-11에 보면 복음 전도자로서 당연히 봉급받을 수 있는 권리조차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12절에 보면 오직 한가지 이유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이웃들을 전도하기 위해 그는 다만 종처럼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번 달 추천 도성니 일곱집사 전도행전에 보면 옥경이, 칠갑산 작사 작곡가인 조운파 집사님은 예수 믿고 그가 캐딜락 타고다니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캐딜락을 처음 사서 시소 150, 180킬로로 달려도 차속의 물컵의 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찔림이 오면서 성령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 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렇게 고급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만나니?” 이때부터 캐딜락을 하나님께 반납하고 버스 카드와 전철표를 사서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희생 없이 섬김 없이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먼저 종으로 살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2. 상황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전도 대상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황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이해한다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을 선교학에서는 “토착화한다” 혹은 “상황화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 분당 비전센터 지하1층 복도에 가면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님의 일대기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이 한복을 입고 계십니다. 집이나 산천이 모두 한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런 것을 일컫어 토착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국식 문화의 옷을 입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 접목이상으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는 대상자의 사고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최근의 선교학자들은 토착화보다도 상황화라는 단어를 선호합니다.
한국 초기 선교시대에 이 땅에 들어와 최초로 기독교 개신교내의 침례교 신앙을 전한 선교사로 캐나다 출신의 말콤 펜위익(Malcolm Fenwick, 1865-1935) 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회사를 저술한 민경배 박사는 펜위익 선교사를 가르쳐 “토착화의 한 거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보다 몇해 먼저 도착한 감리교나 장로교 선교사들과 선교지를 둘러싼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원산 시골에 들어가 갓쓰고 한복 입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얼마나 농사를 잘 지었는지 동리 사람들에게 농학 박사님으로 불리웠고 동리 사람들에게 개량된 영농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문화는 서양문화보다 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1917년 “만민좋은 기별”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한글판 신약 성경번역을 완성 출간합니다. 이 성경에서 그는 세례를 원어의 의미 그대로 침례로, 그리고 성령을 “성숭님” 곧 “거룩한 숨님”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성령의 뜻이 숨(호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도 한국식으로 예수씨로 불렀다고 합니다. 1935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원산땅에서 70세를 일기로 동역자들과 동리 사람들의 애도와 존경속에 세상을 떠납니다.
제가 말콤 펜위크를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선교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선교 대상자의 삶가운데로 깊이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토착화요 상황화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바로 상황화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의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물론 상황화가 지나쳐 잘못된 불신의 문화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경계수위를 낮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신자라도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년 우리가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을 VIP로 부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렇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의 20-22절의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까? 내가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율법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대해서는 율법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약한자를 대해서는 약한자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을 성서교재사에서 발행한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이 성경은 직역이 아니라 본문을 의역한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유대인과 같이 있을 때에는 유대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의 관습과 의식을 따르는 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그들의 의식에 동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논쟁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있을 때도 될 수 있는 한 그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당한 일은 반드시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들의 신뢰를 얻게 되어 결국 그들을 돕는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자진해서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의 결론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이 모든 상황화의 노력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였습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상황화 되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3.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들의 상황에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이웃들의 상황이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그런 노력자체로 전도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상황화의 노력은 전도받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바울사도의 상황화의 모든 치열한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다시 2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현대어 역은 단순히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적인 때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미 고전 9:16에서 복음전도를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엄숙한 의무로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그가 그렇게 전하기를 열망했던 복음의 정의를 고린도 전서 15:1-4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고린도 성도들이 확실하게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2절에서는 이 복음이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3-4절에서 복음이란 한마디로 성경의 예언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쁨 소식이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 4:25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 지고 죄 사함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용서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새 인생을 의롭게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자 죽음에도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복음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순간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응답하는 그 순간이 영혼들이 살아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체적으로 입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설교 처음에 소개한 조운파 집사님이 캐딜락을 포기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렇게 작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버스나 전철에 타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재빨리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고 합니다. 그 다음 누군가가 앞에서면 다시 재빨리 일어난다고 합니다.그냥 일어나면 내리는 줄 알고 고마운 줄 모를 테니까 “피곤하신 것 같은데 앉으시지요”하면서 자리를 양보한다고 합니다. 상대가 고마운 마음으로 착석하자마자 주머니에서 4영리를 꺼내어 “선생님, 이 책은 내가 평생 읽은 것 가운데 가장 귀한 책인데 읽어보시겠습니까?”하면 예외없이 다 받는다고 합니다. 그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옆으로 다가가 설명을 해주면서 복음을 전하여 결신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증거는 성도들의 종의 태도가 동반할 때 능력으로 결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소개 드린 조운파 집사님이 이런 정신으로 전도하게 된 것도 그가 그런 종의 정신과 태도로 전도한 분을 만나게 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 안믿던 시절 80년대 초 개인 사정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하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집주인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언제나 조운파 집사님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셨는데 심지어 아침이면 자기 구두를 닦아놓았다고 합니다. 너무 황송해서 하루는 구두는 제가 닦을 터이니 그만 두시라고 만류하니까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고 합니다. “조 선생, 더러운 구두도 닦으니 반짝반짝 빛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몸도 옷도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조선생, 만일 우리의 영혼이 병들고 더러워지면,,”이 질문으로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 화장실을 가던중 조운파씨는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집주인의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자기를 위해 새벽에 기도하다니.. 이 새벽의 충격으로 그는 교회를 나가게 되고 마침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를 변화시킨 예수를 전도하기 위해서 헌신한 평신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 가을 이런 우리의 기도, 우리의 사랑이 기다리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첫댓글 조목사께서는 설교에 무게를 두지않으십니다.
프로그램과 이벤트로 많은 부분을 할애하시지요.
원래 2회 이상 베끼기하면 상습아닌가요?
사회에서는 절도를 연속해서하면 가중처벌을 받는데 교회는 역시 하나님사랑이 대단하군요.
도용도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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