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 비유
마태복음 25:1-13 15, 175, 180, 492
성경에 ‘그 때’ 또는 ‘그 날’이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그 때’와 ‘그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는 말씀은 ‘그 때’는 최후의 심판의 날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종말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처녀들에게는 심판과 무서운 저주를 받아 지옥 형벌을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신랑을 맞으려고 등불을 들고 나간 자를 ‘신부’라고 하지 않고 ‘열 처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은 한 분인데 신랑을 맞을 처녀는 열이라고 하신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교회론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신부는 하나이지 둘이나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우주적교회(비가시적)와 지역적교회(가시적)로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집단)를 우주적 교회라고 합니다. 창세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을 우주적 교회라고 합니다.
반면에 지역적(가시적) 교회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세워진 교회로서 마치 양과 염소가 함께 목자의 돌봄을 받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들과 구원받을 수 없는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교회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는 지역적(가시적) 교회입니다. 택함 받은 자와 불택자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지역적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역적 교회도 우주적 교회에 속한 하나의 교회입니다.
‘열 신부’라고 하지 않으시고 ‘열 처녀’라고 말씀하신 것은 지역적 교회에 성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주적 교회는 오로지 택함을 받은 자들만의 교회입니다. ‘신부’가 하나이듯이 ‘신부된 교회’는 우주적 교회 하나입니다. 그리고 ‘열 처녀’는 지역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인 나와 여러분들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지역교회에 속한 성도들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림은 믿고 기다린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자만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은 신부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 비유가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려 나간 자들을 ‘신부’라고 하지 않고 ‘열 처녀’라고 했습니다. 지역교회에 속한 성도들 중에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처녀가 있고, 예수님을 맞지 못할 처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부된 교회가 아직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않은 미완성된 신부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와서 혼인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온전한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데리려 오실 때까지 신부되는 교회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된 교회를 천국 혼인잔치에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오실 때를 ‘그 때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그 때’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는 예수님께서 데리려 오실 것을 믿고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맞을 준비와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이시고 처녀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비유한 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깊은 사랑을 나누는 때가 신랑과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에 속한 성도와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고 신비한 최고의 사랑을 나누는 관계이라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 사회의 결혼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밤에 결혼예식을 합니다. 신랑이 밤중에 신부를 데리려 오는 것입니다. 신랑이 밤에 오기 때문에 처녀들이 어둔 길을 밝힐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려고 나가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등에 불을 켜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라고 했습니다. ‘신부’라고 하지 않고 ‘열 처녀’라고 했습니다. 마치 합동결혼식을 하려는 것처럼 신랑을 맞을 처녀가 열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으로 신랑을 맞기 위해서 등을 들고 나간 사람은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신부의 친구 열 명이 신부를 위해서 들러리를 하는 것 입니다. 결혼식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들러 오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들러리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손에는 신랑 행렬의 길을 밝히는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데 보통 열 명 정도로 한답니다. 신랑이 도착하면 들러리들은 신랑을 신부 집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그리고 문은 닫혀 출입을 금지 했습니다.
신학적으로 ‘신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열 처녀’는 교회에 속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세대들의 신자들, 즉 지역교회의 교인들은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열 처녀’는 지역교회의 교인들인 나와 여러분 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교회에 속한 성도입니다.
‘신부’는 교회이며 ‘처녀’는 교회에 소속한 성도들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성도가 있고 맞이할 수 없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되는 교회를 데리려 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에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가 있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는 성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2)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졌다’(3,4)고 말씀하셨습니다.
처녀들이 들고 있는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상징하며, ‘기름’은 성도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성도가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신앙적인 겉모습은 있으나 참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등을 가졌고 기름도 준비한 슬기 있는 처녀들은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성도들 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 또는 ‘다섯’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준비한 상태를 둘로 양분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기름을 준비 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혼인 예식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신부되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언제 데리려 오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에’(1)란 정확한 날짜와 시간이 없이 대략적인 때를 의미합니다.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오시기는 오시지만 언제 오실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들은 졸며 잤습니다.(5) ‘졸며 잤다’는 말씀을 우주적 교회론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룻밤을 기다리다가 졸며 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룻밤으로 생각합니다만, 하룻밤에 졸며 잔 것이 아닙니다. 우주적 교회로서 수개 월,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기다렸다는 말씀입니다. ‘졸았다’는 말은 살아있는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말하고, ‘잤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다가 죽어 무덤에 묻혀 잠자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는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라는 말씀에서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맞으러 나오라’는 말씀은 자는 자들이 깨어 일어나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졸던 성도들도 깨어 일어서 함께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부활한 모든 성도들은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이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주의 재림이 더디게 되는 것은 알곡과 가라지를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시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졸며 잤다는 것에 책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녀들이 졸며 잔 것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랑을 기다리며 졸며 잘 정도로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가라지와 알곡을 갈라 낼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랑의 행렬이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다가 지쳐 잠에 골아 떨어질 정도로 늦어진 밤중에 온 것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6)는 신랑의 말을 듣고 졸며 자던 처녀들이 깨어 일어나 깨어보니 등에 불이 가물가물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준비한 기름을 다시 부어서 밝은 등불로 신랑의 길을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꺼져가는 등불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8)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평가로 볼 수 없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이 기름을 준비한 것은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오로지 자신을 위한 믿음일 뿐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고 천국에 갑시다’ 라고 전도를 했더니 ‘아내가 잘 믿기 때문에 날 데리고 갈 것이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날에 미련한 처녀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줍니다. 성령과의 긴밀한 교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의 무서운 심판을 암시해 줍니다. 그때에 미련한 처녀들은 닫힌 문을 두드리며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호소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습니다. 단 한 마디로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언제 오신다 할지라도 자신있게 맞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밤에 오셔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요12:36)고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믿음과 인내로 기다리니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마7:21)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시앙생활을 아무리 해도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더디 오시므로 지쳐서 졸지라도 기름 준비한 성도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다 죽어 잠들었을지라도 주님 오시는 날 깨어 일어나 주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등불 들고 나가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