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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지존파 사건
← 1994년 9월 20일 서초경찰서는 전국을 무대로 납치살해 소각 암매장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인멸해가며 5명을 살해한 살인 범죄단인 지존파 일당 6명을 검거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추석연휴 마지막날인 1994년 9월 19일 ‘살인공장’까지 차려놓고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른 이른바 ‘지존파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이 거처하며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일삼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아지트 지하실은 끔직한 ‘인간 도살장’ 이었다. 잔인한 고문과 살인행위가 벌어졌던 감금시설과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까지 모두 갖춘 지하실현장에는 유골 2구가 소각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체를 태울 때 뿜어나온 가스가 그대로 남은 듯 매캐한 냄새가 났다.
상상조차하기 힘든 온갖 범행 수법과 잔인함 그리고 완전범죄를 노린 치밀한 사전 준비. 7인조 ‘지존파’가 저지른 연쇄납치ㆍ 살해ㆍ 시체유기 사건은 지금까지 있었던 강력범죄의 수법을 총망라한 집합체라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이어서 세상을 소스라치게 했다. 더구나 이들은 ‘살인실습’을 통해 범행을 익히고 스스로 범죄자로서의 대담성을 키워왔던 것으로 드러나 그들은 차라리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불우한 가정출신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고교중퇴 이하의 학력이 고작인 이들은 공사판을 전전하다 1993년 7월 포커판에서 두목 김기환을 만나 ‘지존파’라는 범죄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가진 자를 응징하고 부유층의 재산을 빼앗아 10억원을 모은다는 목표 아래 범행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범죄 동기를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에 돌리고 자신들의 전도된 가치관을 정당화하려 했다.
살인ㆍ강도ㆍ사체유기죄 등을 적용, 사형을 선고받은 지존파 일당 김기환(27), 강동은(23),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24), 백병옥(21)은 1995년 11월 2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조선
[1968년] 복사기 발명한 체스터 칼슨 사망
← 세계최초의 건식 복사기를 발명한 체스터 칼슨
뉴욕의 맬로리사(社) 특허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체스터 칼슨은 특허 도안과 설명서의 사본(寫本)을 얻는데 늘 골머리를 앓았다. 칼슨은 복사기 개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4년후 1938년 10월22일, 체스터는 마침내 세계최초의 건식 복사기 실험에 성공한다. 처음 복사된 내용은 ‘10-22-38 Astoria’이었다. 1940년 11월에 ‘전자사진(electrophotography)’이란 제품명으로 특허를 획득한 칼슨은 GEㆍIBMㆍ코닥 등 20여개 회사를 찾아다니며 상품화를 위한 합작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어렵사리 특허권 사용료를 배분하는 조건으로 바텔기념연구소와 제휴하고, 다시 1947년에 제록스의 전신인 할로이드사(社)까지 공동연구에 끌어들이면서 연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1950년에 생산된 ‘제록스 A’가 첫 성과물이었다. 제록스는 라틴어 ‘제로그라픽(xerographic)’에서 따온 이름이다. 9년뒤인 1959년에는 ‘제록스 914’가 생산돼 20세기 사무자동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복사전문점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 칼슨이 1968년 9월19일 뉴욕에서 숨졌다./조선
[1955년]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망명
← 페론(1954)
1955년 9월 19일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이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페론은 1940년대 중반 이후 아르헨티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페론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지도자이다. 페론은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노동·사회복지 장관 등을 지내면서 영향력을 서서히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1945년 10월초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된 페론은 노동자들의 궐기에 힘입어 10월 17일 석방되었고, 1946년 2월 첫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첫번째 집권기간 중 페론 정부는 경제정책의 실패와 부패, 민중선동, 탄압 등으로 원성을 샀다. 그 결과 페론은 1951년의 선거에서 재선되고도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후 파라과이로 망명한 페론은 마드리드에 정착해 재집권을 하게 될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1973년 3월의 선거에서 페론당은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대통령직을 확보했으며, 그해 6월 귀국한 페론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10월의 특별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브리태니커
[1796년]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은퇴
1796년 9월 19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고별사 Farewell Address>를 발표하고 은퇴의 뜻을 밝혔다. 워싱턴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23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식민지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영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뒤 영국 본국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이 계속되자 주민들의 반감이 커져갔다. 이것이 집단적인 저항으로 이어져 마침내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제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워싱턴은 특유의 결단력과 지도력으로 혁명군을 이끌었으며, 1783년 11월 마침내 13개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또한 독립 후에는 '연방제도안'을 지지해 제헌회의 의장으로서 연방헌법을 제정하는 데 이바지했다. 1789년 4월 30일 미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워싱턴은 신중함과 정확성, 분별 있는 판단력을 기초로 미국의 진로를 정하고 정부 운영의 선례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792년 선거인단은 만장일치로 워싱턴의 대통령직 연임을 결정했지만, 그는 이후 4년간 의회와의 잦은 충돌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워싱턴은 또 다시 대통령을 맡아 주기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를 거부하고 애국 충정으로 가득 찬 <고별사>를 발표한 후 은퇴했다./브리태니커
[1911년] 영국의 소설가 골딩(Sir William (Gerald) Golding) 출생
1911년 9월 19일 태어남 / 1993년 6월 19일 죽음
"꿀벌이 꿀을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악을 만들어낸다." - 윌리엄 골딩
골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던 영국의 소설가이다. 맬버러 그래머 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 브레이즈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1935년 졸업 후 솔즈베리의 비숍 워즈워스 스쿨의 교사가 되었다. 1940년에는 영국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골딩은 1954년 발표한 첫 소설 <파리 대왕 Lord of the Flies>에서 산호섬에 고립된 학생들의 야만성을 우화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회관습의 허상을 드러냈다. 이후 발표된 <계승자들 The Inheritors>(1955)·<끝없는 추락 Free Fall>(1959)·<첨탑 The Spire>(1964)에서도 역시 근본적으로 난폭하고 타락한 인간성을 그렸다. <핀처 마틴 Pincher Martin>(1956)에서는 침몰 직전의 전함에서 고통스런 죽음을 맞게 된 해군장교의 회상을 그렸으며, <투명한 암흑 Darkness Visible>(1979)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끔찍한 화상을 입은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밖에 부커 매코넬상을 받은 <성인 의식 Rites of Passage>(1980)과 수필집 <움직이는 표적 A Moving Target>(1982)·<종이 인간 The Paper Man>(1983) 등을 발표했다. 1983년 <파리 대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2004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전격 퇴진, 후진타오가 승계
← ‘서울숲’ 찾은 후진타오 주석(2008.8.)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2004년 9월 19일 폐막한 제16기 제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4중전회)에서 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하고 후임 주석직을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승계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당권에 이어 군권까지 한손에 장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로써 중국은 제3세대 지도부에서 4세대 지도부로 권력 승계를 완료했다. 이는 중국이 1949년 공산 혁명에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반대파나 지도층에 대한 숙청 없이 이루어진 ‘무혈(無血) 권력승계’였다. 장 전 주석은 임기상 2007년까지 주석직이 보장돼 있었지만 내부의 퇴진 압력이 거세지는 데다 건강상의 이유가 겹쳐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중국 공산당 제16기 4중전회는 공산당의 집정능력 강화 방안과 중앙군사위원을 8명에서 11명으로 확대시키는 방안 등을 통과시키는 등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이날 폐막했다. /조선
[2000년] 윤미진-김남순-김수녕, 시드니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금-은-동
2000년 9월 19일은 '코리아 양궁'의 날이었다. 여자 양궁 개인전이 열린 시드니 올림픽파크 양궁장에는 팡파르와 함께 3개의 태극기가 높이 솟아 올랐다. 올림픽 여자 양궁 개인전 5연패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1위 윤미진, 2위 김남순, 3위 김수녕은 차례로 단상에 올라 손을 흔들며 2000여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했다.
이들은 올림픽 대표로 뽑히면서부터 '환상의 트리오' '사상 최강의 조'라는 소리를 들었다. 올림픽 3관왕에 세계신기록만 21번 갈아치웠던 베테랑 김수녕, 체격조건과 힘이 좋은 강궁(强弓) 김남순, '겁없는 신예' 윤미진은 여자 양궁서 올림픽 5연패를 노리던 한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북한의 최옥실은 김수녕에게 패해 4위에 머물렀으나 개인전 1~4위를 한국인이 휩쓸었다는 점에서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자양궁팀은 21일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추가, 올림픽 단체전 4연패의 신화를 이룩했다. 남자양궁팀도 22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 88서울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정상에 복귀했다. /조선
[1983년] 세인트키츠 네비스(Saint Kitts and Nevis) 독립
1627년에 프랑스인들이 세인트키츠섬에 정착한 이후 100년이 넘게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이 계속되다가, 1782년에 브림스톤힐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물리친 후 세인트키츠섬에 대한 영국 통치가 확립되었다. 1783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세인트키츠섬과 네비스섬은 영국령으로 확정된다. 앵귈라(Anguilla)를 비롯한 작은 섬들은 1882년에 통합되었다. 1958년에 서인도연방에 가입하여 1967년 해체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1967년 2월에 세인트키츠섬·네비스섬·앵귈라섬이 영국의 연방주가 되어, 내정자치권을 가지되 국방 및 외교 문제는 영국이 관할하게 되었다. 앵귈라는 1967년 7월에 독립을 선언했으나, 영국의 개입으로 1971년 7월에 앵귈라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의 직할통치를 받게 되었다. 앵귈라와 세인트키츠 및 네비스의 연합관계는 1980년에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 1982년에 영국 런던에서 제헌회의가 개최되었고, 1983년 9월 19일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 연방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1988년에 다시 국명이 세인트키츠네비스 연방으로 바뀌었다. /naver
[1932년] 한ㆍ중 연합군 쌍성보 공격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3월 괴뢰국인 만주국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만주 전역을 잠식해 들어가자 한ㆍ중(韓ㆍ中)간의 연합전선 움직임도 빨라졌다. 1931년 12월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지린(吉林)성 자위군과 연합군 결성을 합의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한국독립군은 1931년 11월에 결성돼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대일항쟁을 전개한 독립군부대였고, 지린성 자위군은 지린성을 중심으로 반만ㆍ항일(反滿ㆍ抗日)에 뛰어든 중국인 부대였다.
연합군의 공격목표는 쌍성보(雙城堡)였다. 쌍성보는 창춘∼하얼빈 사이에 위치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물산이 모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주군 3000명과 소수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어 수비도 견고했다.
1932년 9월19일, 한ㆍ중 연합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한국독립군은 자위군 산하의 고봉림부대와 함께 서문쪽을 맡았다. 2시간에 걸친 총공세로 만주군은 1000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2000명이 투항했다. 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사상자는 각각 30∼40명에 불과했으니 대승이었다. 이후 쌍성보는 피아간에 뺏고 뺏기는 혼전을 거듭하다 결국 항공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
[1919년] 아프가니스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인도 방위 측면에서 제정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도스트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1842), 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흐만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마져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1973년 7월 국왕의 외유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naver
[1898년]수산학자 정문기 (鄭文基) 출생
1898. 9. 19 전남 순천~1995. 9. 27 서울.
호는 유수(流水). 1929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수산과를 졸업했고, 1962년 부산대학교에서 명예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46년 평안북도·경기도·목포·부산 수산시험장장, 1947~48년 부산수산대학 학장 겸 농림부 수산국장, 1949년 제주도 개발단장, 1951~60년 수산검사소 소장, 1952년 한국수산학회 회장, 1957년 동국대학교 교수, 1965년 수산기술협회 회장, 1969~80년 문화재관리부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학회활동으로 1954년부터는 학술원 종신회원(어류학 부문)으로 활동했으며 1981년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학술원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수당(秀堂) 과학상을 받았다. 저서로 〈조선어명보 朝鮮魚名譜〉·〈어류박물지〉·〈한국어도본〉·〈어자고〉·〈한국동식물도감:어류〉·〈한국어류생태학〉·〈새로운 해양지식〉 등이, 역서로 〈자산어보 玆山魚譜〉가 있다./브리태니커
[1897년] 한국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출생
1897. 9. 19 전남 장성~1926. 8. 4 현해탄.(8월 4일 역사 참조)
그의 희곡작품은 1910년대 극의 주류였던 가정극의 문제의식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속에 담겨 있는 개혁의지를 사회현실적인 차원에서 확대하려는 두 갈래 양상을 보여주었다. 전통윤리와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두데기(누더기의 誤記) 시인의 환멸〉(학조, 1926. 6)과 〈난파〉(1926)가 가정극적인 양상을 좀더 강하게 나타냈다면, 〈정오〉(1924)와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이영녀〉(1925)는 사회적인 관심에 좀더 치중했으며, 나아가 갑오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표작〈산돼지〉(조선지광, 1926. 11)에서는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난파〉의 겉장에 독일어로 "3막의 표현주의극"이라 쓴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근대극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표현주의적 기법을 동원했다. 또 평론 〈창작을 권함네다〉에서는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전통적 인습타파를 주제로 삼은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는 창작방법이라고 내세웠다. 새로운 연극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 평론〈소위 근대극에 대하여〉(학지광, 1921. 6)·〈구미 현대 극작가〉(시대일보, 1926. 1~5)·〈우리 신극운동의 첫길〉(조선일보, 1926. 7~8) 등을 발표하고, 문학이 사회성과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는〈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시대일보, 1922. 4. 14)과〈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조선지광, 1926. 5) 등을 발표했다./브리태니커
[1885년] 한국 음악가 김인식(金仁湜)
1885. 9. 19 평양~1963 대구.
근대 서양음악의 개척자이다. 11세에 평양 숭덕학교에서 창가를 배우고, 16세에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선교사 부인 헌트와 스눅에게 성악을 배웠다. 이때 오르간 연습을 하면서 서양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실력이 뛰어나 3학년 때는 저학년들의 음악시간에 교사 노릇까지 했으며, 그람리에게 코넷을 배웠고 바이올린을 구입해 혼자 줄을 맞추어 찬송가를 켜기 시작했다. 그후 미국유학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음악교사가 없던 당시 상동청년학원 중학부를 시작으로 기호·진명·오성·경신·배재 학교 등을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가르쳤다. 1909년 최초의 음악전문 교육기관인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생기자 교사로서 활동했고, 이후 그곳에서 이상준·홍난파 등을 가르쳤다. 1911년 보통가곡집을 편찬·발행하기도 했고 경성합창대를 조직하여 합창운동을 벌였으며, 찬송가 번역일도 하였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 〈메시아〉,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등 많은 외국곡도 번역하였다. 또한 〈여민락〉·〈영산회상〉·〈가곡〉등 전통음악을 채보(採譜)하기도 했고 많은 창가를 작곡했다. 그가 1905년경 작사·작곡한 〈학도가 學徒歌〉는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효시로, 찬송가풍의 형식과 리듬양식에 전통음악적 5음음계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작곡한 창가는 〈학도가〉·〈점진가 漸進歌〉·〈애국가〉·〈국기가 國旗歌〉·〈표모가 漂母歌〉 등이며 1932년 조선음악가협회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1871년]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姜一淳, 증산) 출생
1871. 9. 19 전북 고부~1909. 8.
본관은 진주.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
출생과 배경
〈대순전경 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권씨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니 온천하가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했으며,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 또 출산 때는 그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두 선녀가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그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오르는 현상이 7일이나 계속되었다. 태어난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에는 불표(佛表)가, 왼손바닥에는 별 무(戊)자가, 아래 입술에는 붉은 점이 있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대단히 가난했다. 일찍이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 다른 지방으로 가서 머슴살이와 나무꾼 생활을 했다. 21세에 절름발이인 부인과 결혼하여 한동안 처남의 집에 서당을 차리고 훈장생활을 했다. 이당시 그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올라 한학은 물론 유·불·선의 여러 경전과 음향·풍수·복서·의술 등에 막힘이 없었다.
활동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따라다녔으나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 싸움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동학혁명이 끝난 후의 사회적 참상과 혼란을 목격한 그는 국가와 민족,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천지의 대도를 얻고자 결심했다. 이후 그는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의 실상을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이 기간에 충청남도 비인(庇人) 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주역(周易)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특히 김일부는 〈정역〉을 저술하여 조선 후기 신종교에 거의 예외없이 나타나는 후천개벽의 이론적 틀을 세운 사람인데, 그와의 만남은 강일순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산은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에 몰두하는 한편 이보(耳報)와 영안(靈眼) 등 초능력을 배우기도 하고, 선후천(先後天)의 천기변화를 가늠하며 국제정세와 동서의 문화형태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구도기간중 그는 전혀 직업을 갖지 않고 방랑하며 이따금 기이한 능력을 보여 광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종교적 삶
그는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1901) 때 전주 모악산 동편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 수개월 간 송주(頌呪)하며 기도와 이적을 행했다. 그러던 중 6월 선정(禪定)에 들어가 9일 만인 7월 5일 홀연 오룡광풍(五龍狂風)하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의 사종마(四種魔)를 물리치고 광명혜식(光明慧識)이 열리며 천지의 현법(現法)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1909년 화천(化天)할 때까지 7년간 모악산을 중심으로 포교하며 여러 차례 천지공사를 수행했다. 천지공사라는 것은 구천상제(九天上帝)인 강일순이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계와 신명계의 모든 원한들을 해원시키고 우주의 운행질서인 천지도수(天地度數)를 고쳐 후천선경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강일순이 화천할 때까지 그를 따르던 종도(宗徒)는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金亨烈)을 비롯하여 모두 64명이었다. 강일순은 1909년 자신의 화천을 미리 예언한 다음 미래에 다가올 괴병을 극복할 수 있는 비법인 의통(醫統)을 전한 후 8월에 화천했다. 이후 그는 교단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절대자 또는 상제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 후천세계를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이 있다.
그 밖에
2005년 마리아 샤라포바와 비너스 윌리엄스 '현대카드 슈퍼매치'(서울, 2-0 윌리엄스 승)
2005년 북핵 6자회담 전격 타결, 北 核계획 포기(베이징)
2004년 서태지 중국 베이징대 특좌교수 임명
2004년 남북정상회담 성사주역 북한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별세
2004년 퓰리처상 수상 미국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 사망
2000년 윤미진-김남순-김수녕, 시드니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에서 금-은-동
1998년 서울대, 모집정원의 11.3%인 557명을 선발하는 1999년도 고교장 추천 입학전형의 논술고사를 처음으로 실시
1998년 하타미 이란 대통령, 이란대통령으로는 12년 만에 미국 방문
1985년 멕시코시티에 대지진 발생(사망 1만여명, 부상 1만8000여명)
1985년 고대앞 시위관련 박찬종의원 등 7명 불구속기소
1981년 중앙의료보험조합연합회 발족
1981년 문화재관리국, 신안해저에서 청자 등 유물 2,500여점 인양 발표
1980년 한국-프랑스, 어업협정 체결
1978년 영해법 시행령 공포
1977년 브라질, 대(對)미군사협정 폐기
1974년 현대조선 울산공장종업원 2천500여명, 도급제 반대 시위
1962년 미국 상원외교군사위, 서반구 공침(共侵)이면 미군 동원안 가결
1958년 알제리아 민족해방전선, 이집트 카이로에 임시정부 수립선언
1955년 민주당 창당
1955년 이승만대통령 한글간소화안 철회
1955년 소련, 핀랜드기지 반환협정에 조인
1951년 공산측 판문점연락장교회의 개시 수락
1950년 한국, 국제전화통신조약에 가입
1945년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결성
1935년 조선일보, 국내 첫 음악 콩쿠르 ‘전조선음악콩쿠르’ 개최
1907년 프랑스-캐나다 조약 조인
1898년 영국-프랑스 식민지 정책,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충돌
1891년 칠레의 대통령(1889-91) 발마세다 사망
1870년 프러시아군, 파리 포위
96년 제12대 로마제국 황제 네르바 즉위
86년 제15대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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