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시절과 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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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방·임영방·김수영·박인환·김소운·김광주·송지영·최영해·권영숙·신상주·원응수·정하룡·
박창해·김동욱·이가원·양주동·오화섭·이군철·이헌구·이해창·이석곤·방용구·이태극·이진구·
김진섭·박노식·박노춘·남광우·김민수·양재연·이동림·김기동·이근삼·박은수·김붕구·전광용·
정한모·정한숙·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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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어홀이 있기 전에 명동 사보이 호텔 가까운 곳에 ‘OB캐빈’이라는 비어홀이 있었다. 이 집은 임명방 교수의 단골이었다. 이곳에 가면 임영방 교수를 비롯해서 역시 구라파에서 돌아온 교수들을 만나곤 했다. 이 집엔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았다. 이 집 아가씨들이 몇몇 종로에 새로 생긴 비어홀로 옮겨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집이 바로 이 ‘종로의 낭만의 집’이었다.
그때부터 임 교수 일행들은 이 새로 생긴 도시의 보금자리를 먼저 점령했던 거다.
주인이 인텔리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도쿄에 있는 법정대학(法政大學)에서 독문학을 전공, 귀국하여 한때 독일어 교사를 지냈다는 K라는 분이었다. 교사 월급을 가지곤 도저히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가 없어서 친구가 맥주를 대주어서 이 비어홀을 시작했다는 거다. 아무 경험도 없어서 비어홀 간판을 ‘종로의 낭만의 집’이라고 했으니,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다. 나는 즉석에서 “김선생, 그냥 ‘낭만’이라고 하십시오.” 하곤 “김선생, 그럼 우리들의 낭만을 위해서.” 하곤 기품 넘치는 잔을 단숨에 쭉 마셨다.
다음날 가보았더니 양쪽 다 빼버리고 낭만이라는 두 글씨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비가 경영하는 이 비어홀은 이름이 ‘낭만’으로 굳어졌다.
이 집은 경영이 합리적이었다. 술값이나, 안주값이 정가제로 되어 있어서 손님이 자기가 마신 술값을 자기가 계산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다른 곳에서 흔히들 있었던 소위 바가지 술값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기 돈 자기가 알아서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그 대신 외상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나 외상은 통하지 않았다. 명동의 술집들은 얼굴로 얼마든지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외상술을, 그러나 이 집은 그 문인들의 스타일 가지곤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하긴 문인들의 외상 술로 망한 술집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명동에서 흔히 있었던 일, 이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일들이 있곤 했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갈 땐 반드시 술값 먼저 청산하고 떠나곤 했다. 만약에 내가 비행기 사고라도 나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하는 생각이 늘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청산하는 버릇, 나는 이것을 여행을 떠날 때마다 다지곤 했다.
이 집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게 된 것은 이러한 합리적인 경영에서 온 거다. 비싸게 안 받고, 청한 대로 술값은 계산되고, 청한 대로 안주값도 계산되고, 아가씨들에 대한 팁도 10퍼센트 정도 지불하면 불편이 없고, 해서 실로 술을 마신 뒤 깨끗이 일어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아가씨들에 대한 팁이 오히려 술값보다 많은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요즘도 그러한 곳이 많지만, 그런 곳엔 겁이 먼저 들어서 술을 마시러 들어가고 싶어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곤 했다.
이 집이 성공한 것은 이러한 점이었다. 아가씨들이 이쁘고, 깨끗하고, 손님 옆에 앉지 않고, 구질구질하지 않고, 유니폼들을 산뜻하게 입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장내가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화장실이 청결하고, 음악이 고급한 고전음악이었던 점, 그리고 조명이 밝고 넓은 홀이었다는 점이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