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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정한 다니엘(단 1:1-9)
뜻을 정한 다니엘(단 1:1-9)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월 달력을 보면, 6일은 현충일이고, 25일은 6·25 전쟁일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 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마다, 나라를 사랑하고,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와 나라 간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인하여, 어려움 당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직접 전쟁을 경험해본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정말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다니엘이 태어났을 때, 남유다를 통치하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이미 남유다의 운명은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을 이어, 남유다의 왕이 된 사람은 여호아하스였는데, 왕위에 오른지 3개월만에, 애굽 왕에 의해 폐위되고, 애굽 왕이 그의 형제인 여호야김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애굽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허수아비 왕이었습니다.
조선 시대를 보면, 명나라가 힘을 잃고, 청나라가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로 등장할 때, 명나라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청나라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명나라 편에 서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였지만,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청나라를 막지 못하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고, 얼마 못가서, 왕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만 것이 우리네 역사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도 애굽 편에 서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바벨론 편에 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바벨론이 아닌 애굽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충성을 맹세하고,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정책을 폈습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된 지, 3년 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포위해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앗수르와 드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애굽까지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장악한 대제국 바벨론을 만든 인물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유다왕국을 점령함으로써 애굽을 정복하고, 유다 왕국을 세계 제국을 향한 자신의 야망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이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판도를 읽지 못하고, 나라의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이 태어난 시대의 혼란과 아픔은 마치 구한말 조선의 운명을 연상케 합니다.
청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 끼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린 다니엘은 바벨론의 말발굽에 잔인하게 짓밟히는 유다를 보았습니다. 아마도, 다니엘의 심정은 갈가리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지켜줄 애굽에 조공을 바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우상도 여호야김을 지켜주지 않았고, 애굽도 여호야김 왕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여호야김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회개하지 않는 왕과 백성을 이방인의 손을 들어서 징계하셨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바벨론 군대는 그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안에 있던 기물들을 자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둠으로써, 유다 백성과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의 승패가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의 승패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다의 하나님을 굴복시켰다고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치까지 감내하시면서, 패역한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환경 탓으로 돌리며,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인생을 보냅니다. 그러나, 보석은 어디에 있어도 보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역경 속에서, 오히려 더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다니엘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조국 남유다는 망했고, 자신은 어린 나이에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혹한 운명, 처참한 환경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고의 꽃을 피워내실 것입니다.
3-5절 말씀입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정복한 나라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 몇 명을 선출해,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바벨론의 그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정복당한 나라의 젊은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끌려온 젊은이들은 3년이라고 하는 짧은 기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그들은 왕이 먹는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점령지에서 끌려온 이들에게 바벨론이 얼마나 위대한 대제국이며, 이곳에 와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망해버린 옛 조국에 대한 미련을 지우고, 새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드디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하여, 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 다니엘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포로로 끌려간 젊은이들에게는 바벨론 식의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이름과 같은 인생을 살라고 기도하면서 지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나를 판단할 자이시다”란 뜻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의 이름들을 바벨론 에서는 순식간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유다의 이름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듯이, 바벨론의 이름들 또한 그들의 신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준 “벨드사살”이란 이름은 바벨론이 섬기는 신인 “벨”을 찬양하는 이름으로서, “벨이여,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란 뜻입니다. 나머지 세 친구들에게 주어진 이름들도 비슷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와서, 그들의 학문과 언어를 공부하고, 그들의 신들을 숭상하는 의미가 담긴 새 이름을 받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교회 안에서만 살 수 없습니다. 신앙교육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 가면, 세상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그 모든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성경 책만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면, 신앙적이지 않는 내용들도 많이 있습니다. 무조건 거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양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8-9절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여러분!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뜻을 정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단호하고 강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다니엘의 삶은 마치 세상의 모진 폭풍에 떠밀려온 것 같았습니다.
조국 유다는 망했고, 그와 친구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끌려와서는 바벨론 식의 이름으로 바뀌고, 그곳의 학문까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왕의 식탁에 올라가는 최상품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으라고 합니다.
사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엄청난 특권입니다. 비록 그의 나라는 망했지만, 다니엘에게는 출세의 길이 활짝 열린 셈이었습니다. 바벨론 식 이름도 받고, 왕이 먹는 최고의 음식을 먹고, 3년만 있으면 높은 관직에 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시각으로 인생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인 다니엘에게 이 문제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의 이름을 받는 것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생각하며 버틸 수는 있었지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피가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던 음식과 포도주는 단지 좋은 음식이 아니고, 모두 바벨론의 신에게 바친 뒤에 내려지는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그 우상을 섬기는 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벨론의 왕은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자기와 바벨론의 지도층들이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건강과 전쟁의 승리와 축복을 보장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게 되면, 자신의 인생을 바벨론 왕과 그 우상 신들이 결정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배가 항해 중일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바벨론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 식의 이름을 받는 것까지는, 배가 물 위에 있는 것이지만,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단호하게 유혹을 떨쳐버렸습니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안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영혼까지 팔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바벨론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가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니엘의 결심은 실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바벨론에, 감히 어떻게 거역한단 말입니까? 이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한 인생에게,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당장 내 눈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복잡하고, 캄캄해보여도, 영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길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황에 반응하면서, 자기의 뜻을 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말씀대로 살기로 뜻을 정하고,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도록 상황을 열어주십니다.
여러분!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의 디딤돌은 왕궁 살림을 총괄하던 환관장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구했다”라고 했다. 이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간절히 부탁했다”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용감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기도하며, 모색한 다음, 마침내, 환관장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타협하지 않는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는, 지혜로워야 하며, 겸손하고, 온유한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때를 봐서, 움직여야 합니다.
여러분!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이 생겼습니다. 쉽게 말해, 괜히 좋은 마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관장에게 그런 마음이 우러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환관장은 온갖 추악한 권력의 암투가 가득한 바벨론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셈이 빠르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잠언 16: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이 보호받고 축복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선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불신자인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니엘을 총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만나는 축복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다니엘도 행동을 잘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결심은 포로로 끌려간 노예로서, 절대 권력자인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절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뜻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세상 속에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때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을 지키기 위해, 뜻을 정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을 마주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오직 믿음을 위하여 살기로 새롭게 결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오니,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