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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1:1-3
▣ 믿음의 영웅들-히브리서 11장-
본 장은 히브리서 10장 32-39절에 대한 실례로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을 믿음으로 성취했던 사례를 보여 준다. 10장 38절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진술하며, 본 장은 믿음이 어떠한 형편이라도 이겨낼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 믿음의 정의(11:1-3)
참된 성경적 믿음은 “그러기를 바란다“는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확신이다(롬 10:17). “실상“이란 말은 “보증“을 의미하며 증거란 “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줄 때,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보증과 증거가 된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박사는 “믿음이란 믿는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믿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1, 3, 7, 13. 27절에 유의). 마음에 참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그 마음에 증거하신다(2, 4, 5, 33절에 유의).
믿음으로 노아는 장차 올 심판을 보았으며 아브라함은 장래의 한 도성을 보았다. 요셉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보았으며 모세는 하나님을 보았다. 반스 하브너(Vancr Havner)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멸망치 않을 것을 택하였고 불가능한 것을 성취했다.“
3절에서 창조로 예증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어떤 사실들을 성취시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가 하신 말씀을 우리가 믿을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생활에서 어떠한 일을 성취한다. 옛 창조시에 역사했던 그 말씀이 새 창조에서도 역사하는 것이다."
히 11:4-40
2. 증거된 믿음(11:4-40)
아벨(4절/ 창 4:3-)-하나님은 피 있는 제물을 요구하셨는데(9:22)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가인은 믿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증거하셨고, 이 증거로 말미암아 아벨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에녹(5-6절/창 5:21-24)-사악한 시대에 에녹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써 이같이 행하였다(유 24절). 그는 자신의 믿음이 보상받을 것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써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보상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10:35/11:26/12:11).
노아(7절/ 창 6장 이하)-아무도 비로 말미암는 심판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믿음은 행동을 이끌어 낸다. 노아의 태도와 행위는 그를 둘러싼 믿지 않는 사악한 세상을 정죄하였다.
아브라함(8-19절/ 창 12장 이하)-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을 보는데, 그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본을 보인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8-10절), 어떻게 해야 할지(11-12절), 언제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13-16절),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17-19절) 하나님을 믿었다.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했던 것, 순례자로 살게 했던 것, 하나님이 명하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와 사라가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 있었을 때에 믿음은 그들에게 잉태할 힘을 주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순례의 후손들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유혹을 받고 행한 것과는 달리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승리를 향해 전진해 나갔다(13-16절).
이삭(20절/ 창 27장)-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물려받은 말씀을 믿었으며, 야곱을 축복하였다.
야곱(21절/ 창 48장)-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죽기에 앞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
요셉(22절/ 창 50:24-/출 13:19/수 24:32)-요셉은 이스라엘이 어느 날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이기 때문이다(창 15:13-16). 요셉이 그처럼 많은 시련들을 통과하고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이방 애굽에서 살았지만 전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모세(23-29절/ 출 1-15장)-모세의 부모들이 모세를 숨길 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가 특별한 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행 7:20). 모세 자신의 믿음이 애굽에서의 그의 지위를 거절하고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잠시 누릴 죄악의 낙을 거절함으로써 믿음의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이다(26절). 말씀을 믿는 믿음이 유월절의 구원이 있게 했고(애굽사람들은 문에 바른 피를 보고 얼마나 조롱하였을까!) 또한 홍해를 건너게 하였다.
여호수아(30절/ 수 1-6장)-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은 7일동안 그 성을 두루 돌았는데 그 성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10) 라합(31절/ 수 2장/ 수 6:22-27)-그녀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수아 2장 11절에 나와 있다. 그녀의 믿음은 정탐군들을 구원하여 준 행동으로 옮겨졌다(약 2:25).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조상에까지 들게 되었다(마 1:5). 그녀가 또한 자기 가족도 구원하였던 것을 보면 그녀의 믿음은 전파하는 믿음이었다(수 6:23).
11) “다른 이들“(32-40절)-어떤 이들은 이름이 나와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의 거장에 속한다. 저자는 구약의 전 역사를 믿음의 승리에 관한 기록으로 본다. 어떤 승리들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공개적이며 기적적이었으나, 다른 어떤 것들은 “연약함에서 벗어나 강하여지고... 의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인적이며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구출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겨낼 은혜를 주셨다.
믿지 않는 세상은 이러한 신자들을 “찌꺼기, 병약한 사람들, 골치거리“로 보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비록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했어도,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칭찬하는 믿음의 증거를 받았다(39절). 그들은 모두 축복의 상급을 맛보았다.
비록 믿음이 이 사람들로 약속들(복수형)을 받게는 하였지만, 그 약속의 성취(39절)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13절/ 벧전 1:11-12 참조). 40절은 이러한 구약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에 참여하는 현재의 신약 그리스도인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히브리서에는 “더 좋은 것“이 더 좋은 제사장, 희생제물, 성소, 언약 등으로 나타나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6:17-18).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축복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롬 11:13-29). 물론 이러한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영적으로 성취되었지만(갈 3:1-) 그것들은 “장차 오는 세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다(히 2:5-9).
본 장이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이나 몇 가지만을 언급해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때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결국은 언제나 믿음이 이긴다.
불신앙은 언제나 심판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40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29-30절에 유의).
하나님의 시대는 변화한다. 그러나, 믿음의 원리에 있어서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다."
히 12:1-4
▣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히브리서 12장-
본 장의 핵심 단어는 인내이다(1-3, 7, 20절). 이 단어는 “시련 아래서 견디다, 진행이 곤란한 때에도 계속되다“는 뜻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고(10:32-39) 포기해 버리려는 유혹을 받았다(12:3). 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부름받은 자는 없었지만,(4절) 더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속 강건하도록 지원하려고 세 가지의 격려의 말을 상기시키고 있다(5절에 유의).
1. 하나님의 아들의 모범(12:1-4)
11장에서 그의 독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통하여 생의 경주에서 승리하였는지를 회고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그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며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굳게 하라고 훈계한다. 여기에는 경기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관중들은 이전 앞 장에서 열거한 믿음의 영웅들이며, 경주자들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는 신자들이다(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거나, 여기 이 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예화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경주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달리는 데에 힘들게 하는 무거운 것들과 죄를 제거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목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켜야만 한다(빌 3:12-16 참조). 그리스도는 이미 믿음의 경주를 마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이기셨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새 길을 닦는 개척자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나중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가 마치신다! 그는 우리로 승리하도록 내내 지켜보신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시련을 통과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목표였는데, 그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 그의 교회를 서게 할 기쁨이었다(유 24절/요 15:11/요 16:20-24/요 17:13).
죄에 대항한 그리스도의 전투는 그를 십자가로 이끌어 갔고 그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게 하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피흘리기까지 경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이것이 경주가 어려워질 때 격려와 힘을 주는 비결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서 눈을 돌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히 12:5-13
2.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12:5-13)
5장 12절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이미 잊었다. 5절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고난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조차 잊었다고 전해 준다. 그는 잠언 3장 11절 이하를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고난은 형벌이 아닌 징계임을 상기시킨다.
징계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아이들을 훈련시킴, 훈육“이란 뜻이다. 그들은 영적인 갓난아이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숙시키시는 한 방법은 시련을 과하게 하는 것이었다. 형벌은 재판관의 일이지만 징계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다. 형벌은 율법을 세우는 일이나, 징계는 자녀를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사랑의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징계의 손길에 순복하여 성장해야 할 때에 도리어 거스리는 일이 종종 있다. 사단은 우리가 시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선의 증거라고 말해 준다!
신자의 삶에 고난이 닥쳐 올 때에는 몇 가지의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환경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뜻과 맞설 때에는 환경이 더욱 어렵고 힘겹게 된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더이상 날 돌보지 않으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당할 일이 아니야!“ 이러한 태도는 영혼의 슬픔과 쓰라림만을 더해줄 뿐이다.
바울은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논술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사생자가 아니라는 최선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9절에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복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해 준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이다.
또는 그리스도인이 포기하고 중단하기도 찬다. 이것은 그릇된 태도이다(3, 12-13절).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지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매질이 아니다. 바른 태도는 믿음으로 견디며(7절)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한 계획을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데에 있다. 11절의 “후에“라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전진하게 된다. 징계는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히 12:14-29
▣ 3.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12:14-29)
이 부분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섯번째 권고이며, 그 중심 사상은 은혜이다(15, 128절), 여기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시내산과 시온산,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점이 나온다. 율법 하에서는 연기와 불로 뒤덮인 산으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가졌던 경험보다 더 위대한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의 제사장, 하늘의 집, 하늘의 교제, 그리고 은혜와 사랑의 멧세지를 전해 주는 하늘의 음성이 있기 때문이다.
22-24절의 묘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축복들에 관한 것이다. 시온산은 곧 멸망될 운명에 처했던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천성이다13:14/갈 4:26). 거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곧 성도를 섬기는 천군 천사와 장자들의 총회(1:6), 그리고 구약 성도들이다.
“온전케 된“이란 말은 영광 중에 있는 신자들이 지금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이제 온전케 된 구약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11:40/10:14). 구약의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늘나라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의 온전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이 있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부의 맨 위에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곧 파괴될 지상의 도성과, 역시 파괴될 지상의 성전, 지상적 제사장들과 제물들로 되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아벨의 피는 복수해달라고 땅에서 부르짖는다(창 4:10).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과 용서를 위해 하늘로써 말씀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사역자이시며,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는 일이 없다(15절).
바울은 신령한 일들을 업신여기다가 축복을 잃은 한 예로서 에서를 든다. “망령되다“는 말은 “성전 밖에 있다“ 또는 “세상적인, 일반적인“이라는 뜻이다. 에서는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실패하였다(6:6 에 유의). 신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할 수도 있다.
“진동케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본 장을 종결짓는 구절들의 주제이다. 우리들은 아무도 사물들이 진동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함과안전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의 경영을 혼돈케 하고 계셨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물질적인 것들은 신령한 실재들이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물러나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인 새성전을 짓고 계셨으므로 옛 성전은 물러나야만 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세상 자체를 진동케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끄실 것을 보이기 위해 학개 2장 6절을 인용한다.
여기에 실제적인 적용이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자!“ 어떻게 우리가 은혜를 받는가?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옛 율법이나 제도로써가 아니다. 우리는 진동치 않을, 또는 옮겨지지 않을 한 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신령한 실재 위에 우리의 생활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자.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듣기를 거절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의 말씀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25절의 경고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다른 경고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 생에서의 하나님의 징계를 다루는 것이지 내생에서의 심판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경건함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
히 13:1-4
▣ 종결과 실천을 위한 말-히브리서 13장-
여기서 우리는 이 서신의 마지막 호소를 대하게 된다. 그는 교리적인 진리를 설명했는데, 이제 신자들을 위한 실천적인 권면들로 종결짓고 있다. 그들의 원수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진실하게 거한다면 모든 것, 즉 친구들, 물질적인 유익들, 성전의 종교적 유산들, 제물들, 제사장직분 등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신자가 아무 것도 잃는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물리적, 종교적 제도“에 등을 돌린다(이 경우는 유대주의임). 그리고 그의 시선과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신령한 예배에 고정시킨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그가 소유하고 있는 신령한 축복들을 주목해 보라.
1. 신령한 사랑의 친교(13:1-4)
형제를 사랑함은 참된 신자의 표지이다(요 13:35/요일 3:16/살전 4:9 등).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며(요 15:17-27), 상호간에 형제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랑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3절/ 고전 12:26 참조)과 친절과 같은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구약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창 18장)과 기드온(삿 6:11-)과 마노아(삿 13장)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성적인 죄를 경고하고 있다. 혼인이 대단히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부도덕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히 13:5-6
2. 신령한 보화(13:5-6)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했을 때는 그 값을 치러야만 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산업을 빼앗기는 고난을 당했으나(10:34) 그들의 증거를 위해서 기쁨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욕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것들을 탐하게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딤전 6:6-/눅 12:15).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을 읽기는 쉬우나 그대로 살기는 어렵다! 참된 만족은 많은 것들을 소유함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온다.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신 31:6-8)와 여호수아(1:5)에게 주신 구약의 약속을 인용하여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물질적인 것을 탐낼 필요가 전혀 없으며(빌 4:19)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도 전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도움이시므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시 118:6).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으며 또한 결코 해를 당할수도 없다."
히 13:7-10
3. 말씀 안에서의 신령한 식물(13:7-10)
본 장에는 지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위치에 관한 세 가지 명령이 나온다.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7절)-아마도 이전에 그들을 인도하였으나 지금은 가고 없는 목회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인도하던“이란 말은 목회자가 교회의 신령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그는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는 양떼를 위한 신령한 식물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야 하나, 그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구절들은 “그들의 행실의 종말(목표)이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깊이 생각하라“고 읽을 수 있다. 목회자들은 오고 가지만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제사장 직분을 본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17절)-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이 가르치고 생활로 보여 준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해야 한다. 목회자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지켜본다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당신의 목회자가 당신에 대하여 자신의 일을 분명히 하는데도, 만일 당신이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로 인한 슬픔은 당신의 것이 될 뿐 그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목회자의 지도력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문안하라“(24절)-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말해야 하며 그들과 “말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목회자에게 화를 내게 되어 그와 말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만일 믿는 자가 말씀을 먹지 않으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을 먹게 되어(9절)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엡 4:14-/히 5:11-14). 우리의 마음은 율법이나 세상의 종교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진다. 그리스도인의 “제물“은 죄를 위하여 단번에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은 그를 먹는 것이 된다."
히 13:11-16
4. 신령한 제물들(13:11-16)
그리스도께로 향한 히브리인들은 성전과 그것의 제사장 직과 희생제사를 잃었으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잃은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성전을 거절하셨고 그것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은 성문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루살렘 성을 거절하셨다(요 19:20).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 속죄일의 제물을 불사르는 것에 비교한다(레 16:27). 왜냐하면 둘 다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아니다. 되돌아 가는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고 말한다. “휘장 안“(그리스도와의 친교)과 “영문“(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란 두 어귀는 히브리서의 이중적인 멧세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지상의 성읍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의 옛 영웅들이 했던 것처럼 앞에 놓인 천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4절/ 11:10/12:27).
제사장들의 왕국에서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벧전 2:5). 신령한 제사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여지거나 주어진 그 어떤 것이다. 15절에서 저자는 입술로 말미암는 찬미도 그러한 한 제사라고 주장한다(엡 5:18-19/시 27:6/시 69:30-31). 선행과 물질적인 축복을 서로 나누는 것 역시 신령한 제사이며(16절), 신자의 몸(롬 12:1-2), 제물(빌 4:18), 기도(시 141:2), 상한 심령(시 51:17),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은 영혼(롬 15:16) 등도 역시 신령한 제사이다."
히 13:17-24
5. 신령한 능력(13:17-24)
20-21절의 축복 기도는 이 사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을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늘로써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 주어진 목자로서의 칭호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있다.
-선한 목자-양을 위하여 죽는다(요 10:11/시 22).
-큰 목자-양을 온전케 한다(히 13:20-21/시 23).-목자장-양을 위하여 돌아오실 것이다(벧전 5:4/시 24 장).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그를 위하여 살며 그를 섬길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약 관계 때문에, 성숙과 능력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온전케 하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주재이다. 6장 2절은 “온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말한다. 성숙이란 바란다거나 희망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할 때 오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 12-16절, 에베소서 3장 20-21절과 평행을 이룬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그가 먼저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전까지는 우리를 통하여 행하실 수없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살전 2:13). 당신은 하늘의 목자로 하여금 당신을 먹이고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숙하는 가운데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끝맺는 인사는 초대 교회의 신자들을 함께 묶는 사랑을 보여 준다. 끝맺는 은혜의 축복 기도는 저자가 바울임을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다(살후 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