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충청도 관찰사 구원(九畹) 이공 춘원(李公春元) 묘갈명 병서.
공의 휘는 신원(信元)이고, 자는 입지(立之)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함평현인(咸平縣人)이다. 뒤에 기휘(忌諱)할 일이 있어 이름은 춘원으로 고치고, 자는 원길(元吉)로 고쳤으나, 친구들은 옛날 자로 부르기도 하고 구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구원은 공의 별호이다.
공이 강보(襁褓)에 있을 때 할머니 최씨 부인(崔氏夫人)이 감식안이 있었는데, 자손 10여 명 가운데 유독 공만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져 주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의 이름을 빛낼 것이다.” 하였다. 6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하루는 집에 모여 있던 차에 눈〔雪〕을 보고 글을 지었는데, 그 말이 너무나 기묘하고 뛰어나므로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큰 소리로 경탄하면서 뒷날에 문장으로 현달할 것임을 알았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나이가 되어서는 남양(南陽) 홍지성(洪至誠)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홍지성의 학문은 그의 아버지인 조총(蓧叢) 선생 홍유손(洪裕孫)에게서 나왔는바, 학도들이 그 당시에 아주 많았으나 공보다 더 뛰어난 자는 없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정승으로 있다가 파직되고서 물러나 영평(永平)에 거주할 때 공이 찾아가 질정을 받았는데, 사암 역시 공을 재주가 있다고 여기고 깊은 뜻을 모두 다 가르쳐 주어 문리가 더욱 진보하였다.
이에 상서(庠序)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시험을 보면 문득 높은 등급으로 선발되었으며, 지은 시구는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외우게 됨으로써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에 재능과 명예를 자부하면서 선배로 자처하던 자들이 모두 움츠리고 물러나면서 공에게 한 발짝 양보하였다.
20세 때 사마시에 제4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문경공(文敬公) 윤근수(尹根壽)가 공거(貢擧)를 맡았는데, 선조께서 “선발된 선비 중에 누가 시를 잘하는가?” 하고 묻자, 문경공이 공의 이름을 들어 답하였다. 26세 때 정시(庭試)에서 발탁되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발되어 보임되었다가 규례에 따라 박사(博士)로 옮겨졌다.
다시 병조 좌랑에 제수되어 지제교(知製敎)를 띠었다. 당시에 용사(用事)하고 있던 자들이 각자 사사로이 후원해 주는 사람을 길렀으므로 사람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문하에 나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가 좌천을 당해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나갔다.
권력을 잡고 있던 자가 쫓겨난 뒤에 공의가 억울하게 쫓겨났다고 하면서 옥당선(玉堂選)에 기록함에 따라 다시 들어와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이후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시강원 사서, 사간원 정언을 거쳤다. 진청관(陳請官)으로서 밀운(密雲)에 갔는데, 통역관이 대답을 잘못하자 공이 붓으로 써서 대답을 하여 훌륭한 사신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다시 시강원에 들어가 문학(文學)이 되고, 직강(直講)을 거쳐 병조 정랑으로 옮겨졌다. 어사가 되어 호서(湖西)에 가서 무사들의 기예를 사열하고 돌아와 사예(司藝)로 있다가 또다시 외직으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607, 선조 40)에 천거하는 자가 있어 직급이 승진되고서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뒤에 좋지 못한 일이 있어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다음 해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탐관오리들을 제거하고 유랑민들에게 생업을 마련해 주었으며, 번거로운 비용을 감하고 자문하는 길을 넓혀 주자 백성들이 흡족해하였다.
모친의 병환으로 해임시켜 주기를 요청하여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경술년(庚戌年, 1610, 광해군 2)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 5)에 무고(誣告)의 옥사가 일어나 대비(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그때 유생 조직(趙溭)이 윤기(倫紀)를 들어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자, 동석한 자들은 배척해 버리려고 하였는데 공이 강력하게 다투었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음 해에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참의로 옮겨졌다.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에 승지로 돌아왔다가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이때 간신들이 함정을 설치해 놓고 자신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을 몰아넣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마다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얼굴빛을 꾸미고 겉으로나마 그들의 뜻에 영합하였다. 그러나 공은 본심대로 행동하면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간신들은 마음속으로 공을 미워하면서도 독기를 부리지는 못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17, 광해 9)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간신들이 또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고 동조(東朝)에 대한 의례를 완전히 바꾸어 놓자 내외의 관원들 가운데 감히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공과 한두 도신(道臣)만이 지난날과 같이 그대로 예우하였다.
간신들이 이에 더욱 분개하여 멀리 귀양 보내려고 하다가 관직을 삭탈하기만 하는 데 그쳤다. 3년이 지난 뒤에 동지돈녕부사에 서용되었다. 다음 해에 북경(北京)으로 조회를 가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21, 광해군 13)에 조사(詔使)가 나오게 되어 안주(安州)에서 맞아 영접하다가 갑자기 중풍(中風)이 들어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금상(今上)께서 등극한 처음에 옛 신하들을 거두어 썼는데, 조정의 의논이 공을 애석하게 여겨 편안한 자리를 주어 병을 요양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큰소리로 말하기를, “남자로서 행세함에 있어서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부축을 받아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가서 엎드려서 남을 대하면 남들은 무어라고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공은 본디 서책에만 심취하고 생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생활이 더욱 곤궁해졌으므로 처자식들이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팔아 그날그날 지낼 뿐 저축해 놓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손님이 찾아오면 있고 없음을 불문하고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흡족히 취하도록 마시면서 종일토록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몸조리를 위해 술을 줄일 것을 권하면 문득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목숨을 아끼는 것은 안락하게 지낼 수 있어서이다. 설령 내가 즐기던 것을 끊고 친구들을 사절한 채 침에 시달리고 뜸을 겁내면서 근심과 걱정 속에 세월을 보낸다면, 몇 해는 더 수명을 늘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것과 바꾼다는 생각을 나는 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융경(隆慶) 신미년(辛未年, 1571, 선조 4) 7월 15일에 태어나 숭정(崇禎) 갑술년(甲戌年, 1634, 인조 12) 7월 26일에 졸하였으니, 춘추는 64세였다. 그해 9월 17일에 광주군(廣州郡) 서쪽의 감천리(甘泉里)에 있는 병향(丙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공의 선조는 고려조에 현달하였는데, 휘 언(彦)이란 분이 있어 지위가 신무대장군(神武大將軍)에 올랐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종생(從生)이란 분이 있어 혜장대왕(惠莊大王)을 섬기면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참여해 공신에 책록되어 함성군(咸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대로 더욱 번창했는데, 공이 귀하게 되어서는 증조인 세달(世達)에게 좌통례(左通禮)를 추증하고, 조부인 윤우(允宇)에게 좌승지를 추증하고, 아버지인 역(㻛)에게 아무 관직을 추증하였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중종공희대왕(中宗恭僖大王)의 외손이며, 부마(駙馬) 구한(具澣)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여러 동생들이 제멋대로여서 기르기가 어려웠는데도 공은 어루만지면서 가르침에 있어서 법도가 있게 하였다. 형이 북방으로 귀양 갔을 적에는 벼슬을 버렸으며, 추운 겨울에 멀리 중로까지 가서 전송하였다.
또 경대 등을 꾸며 만들어서 시집 못 간 조카딸을 시집보냈으며, 남편이 살아 있지만 과부나 다름이 없었던 이모를 보살펴 주면서 봉양하기를 종신토록 변함이 없이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조용하고 화락하여 누구나 좋아했고, 식견과 도량이 맑고 넓었다. 키는 7척이 안 되었지만 풍채가 맑고 빛나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훤히 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림에 있어서는 솔직하여 딴마음을 두지 않았고, 말투와 웃음소리가 따스하였다. 그러나 큰 절개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그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공은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고 청정하며 평이하고 정직하게 해 가는 곳마다 은혜와 사랑을 끼치는 치적을 남겼다.
장흥(長興)에 있을 적에는 그 고을 자제들 가운데 총명하고 학문에 뜻을 둔 자들을 불러내어 친히 강의를 함으로써 문교(文敎)가 크게 진작되었으며, 떠나온 뒤에는 공이 지은 시가(詩歌)를 다투어 낭송하면서 회주곡(懷州曲)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공의 시는 자연 그대로의 빼어난 색깔이 있어 문채를 내고 수식을 빌리지 않았는데도 뛰어난 부분은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았고, 보통의 부분도 오히려 미치기 어려운 정도만이 아니었다. 문장 또한 고아하고 법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하지 않아 모두 내버린 탓에 모아 둔 것이 적다.
아, 공의 재능은 아름다웠는데, 병에 시달려 그 포부를 다 펼치지 못했으니, 하늘이 이를 장차 후손에게 남겨 돌려주려는 것이다. 공에게는 종형(從兄) 영원(榮元)이 있었는데, 자가 자선(子善)이다. 시를 잘해 젊어서부터 공과 더불어 우열을 다퉜다.
늘그막에 몸을 숨기고 수양함으로써 동류들 사이에 인정을 받아 행의(行誼)로 조정에 천거하자, 조정에서 불러 쓰려고 하였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아버지 윤진(尹鎭)은 벼슬하지 않았다.
사리에 통달하였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어 여러 부인들이 추앙하면서 아녀자의 모범으로 삼았다. 공이 모친을 받들고 선조를 제향하며, 일가들을 흡족하게 하고 손님들을 잘 대접하는 등의 모든 일을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안에서 내조를 잘한 덕분이었다. 일찍이 병란을 피하다가 잘못 공이 적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칼을 뽑아 자결하였으나, 마침 천행으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죽지 않았다. 공이 백발이 되어서도 서로 정중하게 대하였다.
공은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일찍 요절하였다. 차남은 초재(楚材)이고, 삼남은 초로(楚老)인데, 이들은 모두 현감이다. 사남 초망(楚望)은 도사(都事)이고, 오남 초기(楚奇)는 글공부를 하고 있다. 딸은 승지 최혜길(崔惠吉), 진사 윤순거(尹舜擧), 성초보(成楚寶)에게 시집갔다.
초재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지규(之奎)이다. 초로는 1남 4녀를 두었고, 초망은 1남 2녀를 두었고, 초기는 1남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지규는 2남 1녀를 두었다. 최혜길과 윤순거와 성초보는 모두 2남을 두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함평 이씨 집안들의 조상을 보면 / 咸李之宗
대를 이어 무예로써 드러났거니 / 世由武顯
용맹하여 나라 지킬 간성 되었네 / 矯矯干城
반란군의 날카로운 칼날에 맞서 / 遻賊嘬鋒
만령에서 요사스러운 기운 몰아내 / 蔓嶺豁氛
대려 맹서 참여하는 공신 되었네 / 帶礪之盟
공이 세상 태어날 때 이르러서는 / 及公之生
하늘에서 문장 재주 부여해 주어 / 天與文章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이 났다네 / 韡韡其英
바른 학문 가르침을 잘 계승하여 / 經承指畫
그 학문은 깊은 연원 있었거니와 / 厥有淵源
더욱 힘써 공부하며 쉬지 않았네 / 進益無寧
과거 시험 급제하여 조정 나가선 / 策名登朝
어둔 데서 따르는 걸 수치로 여겨 / 恥循幽暗
밝은 데서 스스로의 뜻을 폈다네 / 自申于明
간당들이 곤궁 속에 빠뜨렸건만 / 擠之困之
진흙 속에 내던져진 구슬 같으니 / 如玉投泥
어느 누가 그 광채를 엄폐하리오 / 孰揜其光
봉황새가 가시나무 숲을 나오매 / 鳳棲出棘
난초 자란 길이 이에 열리었거니 / 蘭塗載闢
모든 사람 마음 깊이 기뻐하였네 / 式悅輿情
지닌 재능 두루두루 시험해 보매 / 才猷歷試
내직 외직 어디에고 마땅했거니 / 外內俱宜
모절 이에 찬란하게 빛이 났다네 / 旄節斯煌
어려운 때 만나 뜻을 바로 했거니 / 遇難正志
명이 시절 날개깃을 떨구고서는 / 垂翼明夷
힘든 때에 곧음 지켜 이롭게 했네 / 利于艱貞
공의 몸엔 비록 병이 있었건마는 / 公體在痾
공 마음은 병이 들지 아니했거니 / 公心不疚
사론 이에 갈수록 더 쏠리었다네 / 士論愈傾
초연하게 한가로이 지내다가는 / 超然燕處
속됨 떠나 고상한 데 돌아갔거니 / 高蹈之歸
이를 일러 달관했다 하는 것이네 / 是謂達生
아름다운 시문 모두 흩어졌건만 / 菁華散軼
사람들이 서로 간에 외워 전해서 / 人誦以傳
아름다운 구슬 되고 옥이 되었네 / 爲玖爲瓊
맑은 자태 이에 길이 감추어지고 / 淸姿長閟
맑은 풍채 날로 더욱 멀어져가서 / 素風日遠
단청으로 그려내기 어렵게 됐네 / 難寫丹靑
누가 옳은 역사 쓰는 사관이려나 / 誰歟良史
공의 행적 문원전에 기록하여서 / 請列文苑
그 명성을 길이길이 전하시게나 / 以永厥聲
-------------------------------------------------------------------------------------------------------------------------------------------------------
[각주]
[주01] 상서(庠序) :
향교(鄕校)를 가리키는 말이다. 학교를 주(周)나라에서는 상(庠)이라 하고, 은(殷)나라에서는 서(序)라고 하였으므로 이렇게 칭하
는 것이다.
[주02] 문경공(文敬公) :
윤근수(尹根壽)는 뒤에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으로 고쳐졌다.
[주03] 옥당선(玉堂選) :
홍문록(弘文錄)으로, 홍문관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들이 각각 뽑힐 사람의 이름 아래에 권점(圈點)
을 찍어 그 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뽑은 다음, 그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놓은 책이다. 홍문관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는 이조에서
이 책에 기록된 자들 가운데 세 사람을 추천하면 임금이 낙점을 하여 뽑는다.
[주04] 밀운(密雲) :
중국의 하북성(河北省) 밀운현(密雲縣)으로, 예전에 이곳에 중국의 군문(軍門)이 있었다.
[주05] 동조(東朝) :
태후(太后)나 대비(大妃)의 궁전을 말한다. 한(漢)나라 때 황태후가 평상시 거처하던 장락궁(長樂宮)이 황제의 거처인 미앙궁(未
央宮)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주06] 회주곡(懷州曲) :
회주는 장흥(長興)의 옛 지명으로, 이춘원(李春元)의 시부(詩賦)를 그 고장의 가곡으로 부른 것이라고 한다.
[주07] 만령(蔓嶺)에서……되었네 :
대려(帶礪) 맹서는 공신들이 모여서 하는 맹세로,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작아질 때까지 영원
히 나라 와 함께 복을 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춘원의 선조인 이종생(李從生 : 1423~1495)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할
때에 북청(北靑)의 만령(蔓嶺)에서 적을 대파하는 데 선봉이 되었던 공으로, 개선 후에 적개 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성
군(咸城君)에 봉해진 것을 가리킨다.
[주08] 봉황새가……나오매 :
가시나무처럼 좋지 않은 나무는 봉황새와 같은 영조(靈鳥)가 깃들지 않는 것처럼, 뛰어난 사람이 낮고 천한 지위에 있지 않고 벗어
나 나온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구남(仇覽)이 덕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소문이 있자, 현령(縣令) 왕환(王渙)이 불러서 주
부(主簿)로 삼고는 말하기를, “그대는 매나 새매가 될 뜻은 없는가?” 하니, 구남이 “매나 새매가 되는 것은 봉새나 난새가 되는 것
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환이 사죄하면서 말하기를, “탱자나무나 가시나무는 봉새나 난새가 깃들일 곳이 아니며, 백리 내외의 고을이 어찌 큰 현자
의 사로(仕路)이겠는가.” 하였다.《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仇覽》
[주09] 모절(旄節) :
한쪽 방면을 다스리는 수령이 잡는 부절로, 흔히 고을 수령으로 나가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주10] 명이(明夷)……떨구고서는 :
명이는《주역(周易)》64괘 중의 하나로서 밝음을 상징하는 이(離)가 땅을 상징하는 곤(坤) 아래에 위치하여, 현자가 뜻을 얻지 못
한 채 참언을 당하며 고달픈 처지에 놓인 것을 보여 주는 괘인데, 여기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혼란한 시기를 말한다.
날개깃을 떨구었다는 것은 어진 자가 좌절을 당하여 멈추어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명이괘 초구(初九)의 본
의(本義)에 이르기를, “날 적에 날개를 늘어뜨림은 상(傷)함을 당한 상(象)이다.〔飛而垂翼 見傷之象〕”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7
--------------------------------------------------------------------------------------------------------------------------------------------------------
[原文]
李春元 墓碣銘[金尙憲]
公諱信元, 字立之, 姓李氏, 咸平縣人。 後有所避, 改名春元, 字元吉。 朋友以舊字稱, 亦互稱九畹, 九畹其別號也。 公在襁褓, 祖母崔夫人有鑑識, 子姓十數人, 獨擧公而慈育之曰: “此兒必名其家者也。” 六歲能屬文。 一日家集賦雪, 語甚奇逸, 座中嘖嘖驚賞, 知其他日以文顯也。 旣就外傅, 從南陽洪至誠學, 洪之學出於其父篠叢先生裕孫。 學徒傾一時, 無能出公右者。 朴思菴罷相, 退居永平, 公就正焉。 思菴亦才公, 爲指授蘊奧甚悉, 文義益進。 於是出游庠序, 試輒高選。 所作詩, 人相傳誦, 聲名藉藉, 諸負才譽自以先輩居者, 皆斂退讓公一頭地。 二十, 中司馬第四名。 尹文敬公根壽司貢擧, 宣祖問擧子孰爲能詩, 文敬擧公名以對。 二十六, 擢庭試, 選補承文院權知副正字, 例遷博士, 拜兵曹佐郞, 帶三字銜。 時用事者各有所援, 爭欲出其門下, 公不一染跡, 絀爲海美縣監。 用事者敗, 公議理屈, 錄玉堂選, 入拜禮曹佐郞。 還兵曹, 改侍講院司書、司諫院正言。 以陳請官往還密雲, 譯人失對, 公用筆代舌, 得使乎稱。 復入講院爲文學, 改直講, 還兵
曹正郞。 以御史演武湖西, 還改司藝。 又出爲長興府使。
丁未, 用薦者陞秩, 授東萊府使。 亡何, 有所不樂, 自免歸。 明年, 拜江原道觀察使, 鐫汚吏業流民, 省煩費廣咨度, 人情洽然。 母病乞解, 拜同副承旨。 庚戌, 遭內艱, 廬墓。 服闋, 拜左承旨。 癸丑, 誣告獄起, 錮閉西宮, 儒生趙溭抗倫紀疏, 同席者欲斥去, 公爭之强, 坐是論罷。 明年, 復拜承旨, 改兵曹參議。 乙卯, 還承旨, 進階嘉善。 時奸臣設機穽以待異己者, 人人惴惴, 飾貌外合, 公信心而行, 無少變屈, 奸黨心嫉之, 未有以螫也。 丁巳, 拜忠淸道觀察使。 奸臣請去大妃尊號, 盡易東朝儀, 內外不敢不從, 惟公及一二道臣獨如故。 奸黨愈恚, 將加竄殛, 止奪職。 越三年, 敍拜同知敦寧府事。 明年, 朝京賀聖節。 辛酉, 詔使至, 迎慰安州, 忽中風, 舁還家。
今上初, 收用舊臣, 朝議咸惜公, 欲與便地養疴。 公唶謂: “男兒行世不可苟。 扶而起, 植而行, 匍匐向人, 人謂斯何?” 遂不復仕。 公故淫於書, 不事産業, 家食益窘。 妻子鬻賣卬市, 日闋亡儲, 而客至不問有無, 命酒酣暢, 終日不示倦。 或勸其調護節嗇, 輒笑曰: “人所以蘄生者, 以其能安樂也。 使我絶嗜好謝朋游, 苦砭畏焫, 戚戚度日, 縱更延數年, 以此易彼, 吾知其定不及也。” 公生于隆慶辛未七月十五日, 卒于崇禎甲戌七月二十六日, 春秋六十有四。 以是年九月十七日, 從葬廣州治西甘泉里向丙之原。
公之先顯于高麗。 有諱彦, 位神武大將軍。 入本朝有諱從生, 事惠莊大王, 與平李施愛, 策功封咸城君。 世益蕃昌, 逮公貴, 追贈曾大父世達左通禮, 大父允宇左承旨, 考㻛某官。 母曰貞夫人綾城具氏, 恭僖大王之外孫, 駙馬澣之女也。
公蚤孤, 事母至孝。 諸弟循己難蓄, 公撫而敎之有道。 兄累徙北邊, 公釋位, 隆寒送至中路, 飾奩嫁其女之未嫁者。 姨母有夫在而若孀居者, 省視給養終不衰。
公天質恬暢可悅, 識度淸遠。 長不滿七尺, 而丰彩朗潤, 映帶數人。 與人處, 不設城府, 言笑溫溫, 至於大節則介介不可易。 居官廉靖易直, 所至著惠愛聲。 其在長興, 進邑子弟聰明向學者, 親爲講說, 文事大振。 去後爭誦公歌詩, 傳爲《懷州曲》云。 公之詩天然秀色, 不假雕飾, 而高處迥出人上, 平處猶不翅難及。 文亦古雅有法度。 然不喜以此自名, 放軼尟收。 嗚呼! 以公之才之美, 而厄於病, 未究厥用, 天將以贏歸之後歟! 公有從兄榮元, 字子善, 詩名少與公弟長。 晩自韜養, 爲儕流所許。 以行誼薦於朝, 徵用之, 未就而沒, 世俱惜之。
夫人海平尹氏, 父鎭, 不仕。 通達順正, 列婦推爲壼範。 公之奉親享先, 洽宗族款賓客, 皆如其意者, 以夫人爲之內也。 嘗避兵, 誤聞公陷賊, 引刀自決, 適天幸不殊, 得毋死。 公至白首相莊, 凡擧五男三女: 一男, 蚤夭: 次楚材、楚老, 俱縣監: 楚望, 都事: 楚奇, 業文。 女適承旨崔惠吉、進士尹舜擧、成楚寶。 楚材一男之奎, 楚老一男四女, 楚望一男二女, 楚奇一男, 幷幼。 之奎二男一女, 崔惠吉、尹舜擧、成楚寶俱二子。 銘曰:
咸李之宗, 世由武顯, 矯矯干城。 遌賊嘬鋒, 蔓嶺豁氛, 帶礪之盟。 及公之生, 天與文章, 韡韡其英。 徑承指畫, 厥有淵源, 進益無寧。 策名登朝, 恥循幽暗, 自申于明。 擠之困之, 如玉投泥, 孰揜其光? 鳳棲出棘, 蘭塗載闢, 式悅輿情。 才猷歷試, 外內俱宜, 旄節斯煌。 遇難正志, 垂翼明夷, 利于艱貞。 公體在痾, 公心不疚, 士論愈傾。 超然燕處, 高蹈之歸, 是謂達生。 菁華散軼, 人誦以傳, 爲玖爲瓊。 淸姿長閟, 素風日遠, 難寫丹靑。 誰歟良史? 請刻文苑, 以永厥聲。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