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요약> 허허로운 행복/ 누가복음 9:46-48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다툰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모이면 서열다툼을 하는 것도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예수께 직접 배운 제자들도 자리다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크리스천이라는 것과 무조건 높아지려는 것과 서로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본문은 좀 새겨 보아야 합니다.
마태와 마가에 비하여 누가의 내용이 짧은 것은, 누가만 다른 이야기를 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툼이 일어나게 된 정황에 대해서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리다툼은 특별한 몇몇 만의 잘못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그런 자리를 탐하는 것과 탐하지 않았음에도 높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이 문제를 단칼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2000년 전의 교훈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2년 전에 방영했던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왕을 독살하고 권력을 쥐려는 고관과 그 하수인으로 몰래 독초를 왕에게 사용한 어의, 그리고 그 틈에서 시중들다 추방당한 침술천재 유세풍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드라마의 재미는 그가 낙향한 작은 시골의 <계수의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그 시골의원 역시 과거 내의원이었다가 권력투쟁을 피해 낙향한 의원이 가난한 이에게는 무료 진료를 해주면서 자리를 잡은 곳이었습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은 자폐증이 있지만 모든 약재를 외우고 관리하는 암기천재 소년, 아들을 여의고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계수의원이 양녀로 삼은 죽은 지인의 딸 등등 모두가 떠돌이들인데 함께 모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힘을 합해 왕이 중독된 독초가 <단사초>라는 것을 밝혀내고, 해독제가 <사매초>라는 독초인 것도 알아냅니다. 독을 독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단사초를 풀어 또 독살을 시도하는 권력자들에게 맞서서, 사매초의 독성을 자기 몸으로 시험하며 해독제를 만들어 사람을 살려내는 이야기는 정말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교훈을 이 계수의원 사람들이 정말 잘 실천하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그래서 <허허로운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이>가 해석의 키워드입니다. 고대 사회의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이고 작은 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누가 높은 사람이가를 두고 다툼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는 전혀 다른 맥락의 교훈을 던집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속내는 어린이 이야기를 통해서 높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영접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은 <높아지려는 욕심 대신에 낮은 자를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마지막에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에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행간을 읽어 연결해 보면, 낮은 자와 작은 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낮고 작은 자리에 함께 하는 사람인데, 그가 바로 큰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정말로 높아지게 될 것이라는 말과는 다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은 자와 함께 하는 그 사람은 이미 큰 자입니다.
교회와 교계 안에서도 높아지려는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이면 서열을 정하고 군림하는 문화 속에서 “기독교 정신” (Christianity)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일부는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다른 일부는 높아지고 대접 받고 출세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과 매우 부합한다고 확신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유세풍이 조선 정신과 의사로 불리는 것은 환자들의 병 뒤에 숨겨진 아픈 마음을 읽어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예수의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하기 보다는 서로의 아픔을 읽어내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다른 남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가장 작은 사람들의 마음과 연대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큰 자라는 교훈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골의원에서 작은이들을 아끼고 돌보는 드라마 속의 삶을 보면서 저는 이것이 <허허로운 행복>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높은 자들의 투쟁 속에 끼어서 마음 졸이며 살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로 위대한 낮은 자들과 마음을 같이하는 허허로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이 길임을 깊이 깨닫고 살면 좋겠습니다.
2024년 10월 20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