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 행차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아버지 성종의 선릉을 참배하기 위해 중종이 배다리를 건넌 적이 있는 등 이전에도 배다리가 몇 차례 만들어지긴 했지만, 정조는 대규모 행차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배다리의 건설을 지시하였다. 1789년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고 『주교절목』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1795년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화성행차를 계획하면서 배다리 역시 이에 걸맞은 규모의 건설을 요구했던 것이다.
정조의 명을 받은 정약용 등은 1795년 2월 24일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완성하였다. 배다리가 건설된 곳은 노량 지역. 동호(지근의 동호대교 일대), 빙호(지금의 동빙고, 서빙고 지역) 등이 함께 물망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노량이 선정되었다. 노량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강폭도 좁아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근대에도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철교가 처음으로 건설된 것을 보면, 이 시대 과학과 건설 수준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을 활용하였다. 새롭게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세곡이나 어물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에게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여 비용의 낭비를 막은 것이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가운데는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 단계적으로 조금씩 작은 배들을 설치하였다. 배들의 설치가 끝난 후에는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약 7.2미터). 정조가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린 「주교도」를 보면 최대 9명의 사람이 일렬로 한강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다리의 양편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성을 꾀하였다. 또한 배다리의 양끝과 중간 부분에 세 개의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은 다리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리의 중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왕이 행차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과학적 설계 1795년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위해 화성행차를 단행하면서 최고의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고 그 완성을 보았다. 당시 건설된 배다리의 설계 과정은 『주교절목』과 『주교지남』을 통해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김홍도가 그린 8폭의 병풍 중 「주교도」로 남아 있다. 「주교도」에는 배다리를 건넜던 어가 행렬과 함께 행렬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다리. 그리고 그 설계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배다리 건설을 성공시킨 관료들과 장인들, 배다리 건설에 적극 협조한 경강상인. 이들 모두의 합작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은 화성 건설과 함께 과학과 실학정신이 만개하였던 정조 시대의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출처] 정조의 배다리(丹橋) 프로젝트|작성자 대화 |
출처: 강석정의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