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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육식―의식(意識, skt. mano-vijnana)의 작용>
1. 제6식―의식(意識)이란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우리 인간은 육근(6根)이라 해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여기서 안(眼-눈)⋅이(耳-귀)⋅비(鼻-코)⋅설(舌-혀)⋅신(身-몸)는
육체 부분이고, 의(意)는 정신이므로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대상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
법(法)이라는 육경(6境)을 만날 때, 각각의 감각장소를 통해서 각기 인식이 일어난다.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
의식(意識)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합쳐 육식(6識)이라 한다.
소승불교(부파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여기서 여섯 번째 식, 즉 제6식이 바로 의식(意識, mano-vijnana)이다.
※근(根)---근은 기관이란 말인데, 식(識)을 일으키는 근거이다.
※식(識)---식은 알다, 인식하다, 요별하다는 의미이다.
육식은 기관별로 일어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서 안식(眼識)이라 하는데,
눈(眼)이 그 대상인 색(色-물체)을 접촉하면(보면)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그런데 안식은 꽃이 있으면 꽃을 볼 뿐, 이것이 장미꽃구나 하고
알아보는 것은 제6식(의식)의 작용이다.
제2식은 귀에 소리가 들리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는데,
즉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들으면)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이식은 단순히 소리만 들을 뿐, 그것이 종소리구나, 자동차소리구나 하고 분별하는 것은
제6식인 의식의 작용이다.
제3식은 코로 냄새를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는데,
즉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맡으면) 비식(鼻識)이 일어난다.
비식은 다만 냄새를 맡을 뿐, 이 게 무슨 냄새다, 좋다 싫다고, 하고
분별하는 것은 제6식의 작용이다.
제4식은 혀로 맛을 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는데,
즉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 설식(舌識)이 일어난다.
설식은 다만 맛을 볼 뿐, 이 맛이 달다 쓰다고, 좋은 맛이라고
분별해 느끼는 것은 제6식의 작용이다.
제5식은 몸(피부)에 접촉이 있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하는데,
몸(身-피부)에 무엇이 닿으면(접촉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난다.
이 때 신식은 무엇엔가 접촉했음을 느낄 뿐, 접촉했을 때 부드럽다,
싫다고 느끼는 것은 제6식인 의식의 작용이다.
이처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등 5근(根)이라는
육체의 다섯 부분에 의지해 활동하는 심식들인데,
이들은 앞에 나와서 활동한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 부른다.
이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 생겨나는 대로
마치 거울에 그대로 비치는 수준, 단순히 사물을 비출 뿐,
좋다 나쁘다 인식은 하지 못한다.
인식은 모두 제6식인 의식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전5식은 분별하거나 사량(思量)하지는 못한다.
제5식까지는 단순한 감각에 불과하다.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스스로 무엇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스스로 인식할 능력이 없다.
전5식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분별하는 것은 제6식인 의식(意識)이 한다.
‘색깔이 노랗다’, ‘이것은 뱃고동 소리다’, '냄새가 독하다', '맛이 좋다' 등으로
분간하는 것은 제6식이 한다. 전5식은 스스로 분별하고 의식할 능력은 없고,
분별하고 판단하고 추리하는 것은 제6 의식이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은 전5식과는 관계없이 혼자서 스스로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예상, 사고(思考), 상상(想像), 공상(空想), 기억(記憶),
추리(推理)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인식은 의식(제6식)이 혼자서 한다.
그런데 눈, 귀, 코, 혀, 몸 등 5근을 통해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제6식인 의식은 선ㆍ악, 호(好)ㆍ오(惡) 등
모든 생각을 결정하는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한다.
이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해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즉, 제6식인 의식은 전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 작용을 하고,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 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6 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5식과 공동으로 작용할 때,
이를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 하고, 제6 의식 단독으로 작용하는 것은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지하고 사고하는 정신작용 대부분이 제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바로 불교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하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어서 요별식(了別識)이라고도 한다.
전5식에 의해 인식이 일어나더라도 제6식에 의해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거나, 이것이 뭐다, 저것이 뭐다,
혹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분별이 생긴다.
예컨대 꽃을 보고 꽃이라고 아는 것은 안식이고, 이어서 이것이 무슨 꽃이다,
예쁘다거나, 저 꽃을 가지고 싶다는 것은 제6 의식의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맛을 보고 느끼는 것은 설식이지만 이어서
달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의식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제6식인 의식은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등
전5식과는 다른 좀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개 제6식인 의식의 영역이다.
제6식인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이 법(法)이라는 경(境:대상)을
인식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때 법이란 물질적ㆍ정신적인 일체의 사물을 포괄한다.
전5식은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집착이나 번뇌가 없다.
그런데 제6식에 오면 좀 복잡해진다. 이미 자아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말하자면 대뇌의 작용을 거의 제6식이 하면서 번뇌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전5식을 통할해서 인식을 일으키는 제6식(의식)은
어디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보통 제6식이 의(意)를 근거로 해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그 의근(意根)이라는 생각의 덩어리가 어떻게 제6식의
근거(뿌리)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와인을 음미하는데, 맛과 향은 입과 코가 한다.
즉, 설식과 비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게 좋다 나쁘다든지,
이 와인은 어디 산이라든지, 이 와인은 내 입맛에 맞다고
판단하는 것은 의식(제6식)이 한다는 말이다.
그 의식이 일어나는 근거가 되는 ‘의근(意根)’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소승불교(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즉,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 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 한다. 즉, 앞생각이 인(因)이 되고,
뒷생각은 연(緣)이 돼 등무간연으로 앞 생각이 없어지면서 이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즉, 앞생각을 의근(意根)으로 해서 뒷생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제6식의 의지처는 몸뚱이의 일부분이 아니라 앞생각이라서
앞생각을 의근(意根) 혹은 심근(心根)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흥기한 후 유식학(唯識學)이 발달하면서 의식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즉, 유식학에서는 제6식을 표층의식(表層意識)이라 한다. 본심 - 깊은 심성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제6식의 뿌리(意根)가 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을 새로이 설정했다.
소승불교(부파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을 봤으며, 의식의 근거(의근)가 앞생각이라 했다.
즉, 소승불교에서는 앞생각이 뒷생각의 뿌리, 즉 의근이 된다고 했으나
유식학에서는 말나식을 상정한 것이다.
이 말나식은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로서, 이것은 숨어있는 잠재의식이다.
그리고 같은 잠재의식으로 제7식인 말나식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까지 상정한 것이다.
이처럼 유식학에서는 8식으로 세분화했다. 6식에서 8식으로 늘어난 것이다.
식(識)을 마음이이라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마음을 일컫는 것이고,
보통 마음이라 하면 제6식을 포함한 6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마음이란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그리고 제7식부터는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심리로 들어간다.
따라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의 의근(意根)을 말니식이라 하게 됐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제6식인 의식의 근거가 되는 의근을 ‘뇌 - 대뇌피질’이라고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즉, 의식이 하는 여러 복잡한 분별 판단을 사실은 뇌가 하는 것이라 해서,
제6식의 근거를 뇌라고 하는 것이다.
제6식인 의식의 근거가 되는 의근을, 소승불교(부파불교)에서는 앞생각이라 했고,
유식학에서는 제7식 말나식이라 했으며,
오늘날엔 ‘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오게 됐다.
그런데 육근(六根)이 그 대상인 육경(六境)을 만났다 하더라도
반드시 식(識)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발생하는 조건은 육근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는 경우에 여섯 가지 경계(육경)에 부딪치고,
거기서 식이 일어나야만(확연한 느낌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식이 발생할 수 있다.
눈(眼)의 예를 들면,
외출했다가 귀가했다면, 그동안 길에서 마주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그저 살짝 스쳐 지나간 정도였으므로 비록 접촉은 있었지만
확연한 느낌이 없었기에 접촉에 의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안식(眼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의식(意識)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으로 등록이 되지 못한 것이다. 느낌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부딪치거나,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라야만 안식이 일어나서 인식이 된다.
그리고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리라는 경계는 눈(안근)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드시 귀(이근)로만 들어온다. 즉, 어떤 소리(경계)가 내 귀(이근)를 통해 들어와서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의식(제6식)에 의해, 아 이것이 차 소리구나,
아니면 기다리던 두부장수가 왔구나 하고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독서삼매에 들어 있으면 밖에서 차 소리나 두부장수 종소리가 났지만 못 듣는다.
이식(耳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귀(이근)가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경계가 다섯 가지 식을 통해 제6식(의식)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육근 육식이 제대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육근)이 접촉해서 좋거나 싫은 것도 경계이지만,
마음속에서의 온갖 느낌들,
이를테면 외로움, 답답함, 우울함, 시기 질투 등의 느낌도 경계(법경)이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것은 경계 아닌 것이 없다.
즉, 중생은 온갖 경계에 시달리면서 요란한 의식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좋은 경계가 닥치면 좋아하고, 나쁜 경계가 닥치면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허나 수행자의 삶은 그 어떤 경계가 와도 좋고 나쁨의 분별이 없이 늘 여여(如如)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식 활동이 요란하지 않고 여여해야한다.
그리고 그 여여함을 추구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런데 이 제6식(의식)이 동물에게도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동물에게도 거칠지만 제6식은 분명히 있다.
먹을 것을 보면 침을 흘리는 개의 마음이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이 아니라,
‘거칠지만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다시 말해 제6식의 결과라는 말이다.
애완견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제6식이 작용해서 그렇다.
그러니 동물들은 그저 지능이 낮은 것일 뿐, 비록 거칠지만 의식이 있다.
그래서 길들일 수 있는 것이다.
2. 제육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의 작용
위의 설명과 같이 광범위한 작용을 하는 제6식인 의식(意識)의 활동을 분류하면
크게 일곱 가지의 작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 광연의식, 오구의식, 분별의식,
독두의식, 몽중의식, 독산의식, 정중의식의 일곱이다.
① 광연의식(廣緣意識)---광연의식이란 쉽게 말해 광범위하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전5식들이 각각의 기관에 관련된 직접적인 인식만을 한 것에 비해,
제육식은 그 외부 대상이 법경(法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에 대해서 작용을 하게 되므로 관연의식이라 한다.
이런 정신계와 물질계 중에서 번뇌가 있는 부정한 것을 일컬어
유루법(有漏法:상대적인 진리)이라고 하고,
번뇌가 없는 청정한 법에 대해서는 무루법(無漏法:절대성을 가진 진리)이라고 한다.
이 유루법과 무루법을 모두 상대해서 작용하는 것이 제육식의 특징이다.
제육식이 번뇌가 일어나 혼란스러울 때는 유루법의 상대적인 분별심만을 일으키고
인식하지만 혼란이 가라앉고 청정한 마음을 내면 분별심이 없는 진리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유루법과 무루법을 모두 포괄하며 넓게 작용하기 때문에 광연의식이라고 한다.
② 오구의식(五俱意識)---오구의식이란 전5식이 각각의 근에 의지해서
대상 경계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을 말한다.
이런 전5식의 인식활동에 가담해서 색깔이나 소리의 높고 낮음, 좋고 싫음 등의
최종적 결정에 가담하는 의식의 역할을 오구의식이라고 한다.
제6식이 전오식과 더불어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③ 분별의식(分別意識)---분별의식이란 앞의 오구의식과 비슷하지만
전5식을 통해서 들어온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분별하는 역할로서의 의식을 말한다.
이런 분별의식이 오구의식과 다른 점은 오구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일어나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이라면,
분별의식은 전5식과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
의식 혼자 그 기억을 떠올리며 분석하기도 하는데,
오구의식보다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④ 독두의식(獨頭意識)---독두의식이란 전5식과는 관계없이
제6식(의식) 홀로 작용하는 의식으로서의 이름이다.
가령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생각하는 일이라든가,
또는 현재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을 추리하고 예측하며 계획하는 일 등은
모두 제6식 혼자서 하므로 이에 속한다. 또한 각가지 잡념 등이 일어나는 것도 독두의식이다.
⑤ 몽중의식(夢中意識)---몽중의식은 말 그대로 꿈속에서의 의식이다.
이런 꿈속의 의식에 대해서 유식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을 하는데,
우선 꿈 자체를 가몽(假夢)과 실몽(實夢)으로 구분을 한다.
가몽이란 공허한 의식작용으로 실다운 것이 없는 꿈을 말한다. 실다운 것이 없으므로
잠을 깨면 가몽은 다 잊어버리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실몽이란 실제의 체험과 일상생활의 경험이 의식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가몽과 실몽으로 나누고 있기는 하지만 꿈속에서 의식이 일어나는 이유는
결국 의식이 활동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렇게 꿈속에서 전5식과 관계없이 의식이 일어나 실제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제육식과 전5식의 관계가 정발업(正發業)과
수발업(隨發業)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발업(發業)이란 행동하고 활동한다는 뜻으로 눈, 코, 귀, 입, 몸 등의 다섯 가지 기관은
자연발생적인 외부의 인연에 따라 나타나고 수동적인 의식에 따라서 활동하는 의식이지만,
제육식인 의식은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런 능동적인 제육식의 활동은 정발업(正發業)이라하고,
수동적인 전5식의 활동은 수발업(隨發業)이라고 한다.
정발업의 의식의 작용은 매우 강렬하기 때문에 실몽(實夢)으로 제8식인 아뢰야식에 저장이 됐다가,
잠이 깬 상태든 다시 잠이든 상태든 의식을 통해서 다시 나타난다.
이렇게 실현돼 꿈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을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고 한다.
⑥ 독산의식(獨散意識)---독산의식이란 단독으로 일어나 헤매고 있는 의식을 말한다.
의식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른 심식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헤매는 것을 뜻한다.
이 상태가 나아가면 마음이 안정을 상실하고 인식의 대상과도 일치시키지 못하며
결국 분열증 증상까지 보이는 의식을 말한다.
이렇게 독산의식이 일어나게 되면 의식이 정처 없이 달려가서는
산란한 마음작용을 야기하게 되는데, 산란한 마음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억력이 감소하고
극도로 산만하게 되면 비정상의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렇게 된 의식을 광식(狂識)이라고 한다.
통속적으로 흔히 미쳤다고 하거나 치매에 걸렸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산란한 의식 속에서는 인식의 세 가지 작용이 바르게 작동하지 못하는데,
인식의 세 가지 작용이란 현량(現量), 비량(比量), 비량(非量), 세 가지를 말한다.
• 현량(現量)이란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직접지각’이라고 표현된다.
• 비량(比量)은 어떤 대상을 이것저것과 비교해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 너머에 연기가 난다고 할 때, 산 너머에 불이 났다고 유추해 판단하는 것인데.
이런 비량은 착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간혹 틀릴 수도 있는 인식의 내용을 말한다.
• 비량(非量)이란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으로 인식기관이 잘못됐거나
의식의 작용이 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판단 자체가 그릇 돼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산란의식이 지속되면
계속적으로 비량(非量)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⑦ 정중의식(定中意識)---정중의식은 독산의식이 산란하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의식이라고 한다면
이런 산란함이 정지된 선정 상태의 의식을 말한다.
즉, 선정 가운데 유지되는 안정된 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입정(入定) 가운데
나타나는 지혜로운 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정중의식은 마음이 가장 잘 안정되고 정화된 상태에서의
청정심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말한다. 광연의식에서 무루법을 제육식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정중의식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정중의식에서 존재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체성까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체성이란 존재의 무상함, 비어있음을 본다는 말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