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중보자의 사명”입니다.
본문은 2500여 년 전 쯤, 바벨론에 포로기간에 에스겔 선지자가 전한 말씀입니다. 22장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의 죄악과 심판, 즉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은 2절에 ‘피 흘린 성읍’이었고 3절에 ‘우상을 만들어 더럽혀진 성’이었습니다. 7절에서는 ‘부모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를 해하였으며’ 8절은 ‘성물을 업신여기고 안식일을 더럽히고’ 9-12절에는 ‘음행하는 백성’임을 지적합니다. 무엇보다 지도자들인 선지자와(25절) 제사장(26절), 고관들이(27절) 먼저 타락했습니다. 25절에 보시면 이들이 심지어 백성들의 영혼을 삼켰다고 합니다. 즉 이들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하라고 세운 사람들인데 도리어 영혼을 해친 것입니다. 영혼이 다치는 것을 상관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고 이익을 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락이고 범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애4:12,13에 땅이 심판을 당하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이유를 지적합니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또 렘23:15입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본문 앞 27절에서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불의한 이익을 위해 피를 흘려 영혼까지 멸하고 28절에는 허탄한 이상과 거짓 복술을 쫓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선지자도 지적합니다. 애2:14입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선지자들이 먼저 꿈과 환상, 거짓 계시를 쫓아간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이익 때문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입니다. 애당초 잘못된 목적을 쫓아가면 거짓과 미혹만 보고 따라가다 넘어집니다. 오늘날 이단에 발을 들여놓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살후2:11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거짓 선지자나 그에게 찾아가는 자의 죄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겔14:9,10입니다.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를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거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무당이나 무당 찾아가 묻는 자나 같다고 합니다. 이러니 당시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본문 앞 19절에 ‘찌꺼기’라고 합니다.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찌꺼기를 태우듯이 결국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쏟으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남자가 칼을 빼면 썩은 호박이라도 잘라야 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빼면 반드시 휘두르십니다. 본문 앞장인 겔21:4,5에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칼을 칼집에서 빼면 다시 꽂히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치시면 반드시 엎드러지게 됩니다. 겔21:27절입니다.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직전까지도, 칼을 뽑기 직전까지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 서서 모세처럼 중보할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신5:5). 그러면 중보자의 사명, 역할은 무엇입니까.
먼저 30절에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라고 합니다. 중보자는 허무는 자가 아니라 쌓는 자입니다. 쌓은 성도 허무는 자가 아니라 허물어진 것도 다시 쌓아올리는 자입니다. 파괴하고 부수는 자가 아니라 짓는 자, 세우는 자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는다는 것은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 살아갈 아름다운 성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술관원장이 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삼 일을 금식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청하여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자신의 능력과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자기의 지위와 재물을 다 동원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면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도비야와 산발랏은 성을 쌓지 못하도록 비웃고 조롱하다가 심지어 군사를 동원하여 쌓은 담을 헐려고 시도하고 그것도 안 되니 마침내 느헤미야를 모함하여 제거하려고도 했습니다. 쌓는 자와 허무는 자가 분명히 구분됩니다. 장애물을 세우는 자인지 장애물을 걷어내는 자인지 구분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허무는 자가 아니라 쌓는 자로 쓰임 받게 되길 축복합니다. 부수는 자가 아니라 세우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허물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가기는 어려워도 관계에 금이 생기고 깨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말 한마디로도 됩니다. 비방하고, 모함하고, 비난하거나 불평함은 허무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세우는 자가 아니라 허무는 자입니다. 짓고 쌓는 자가 아니라 깨고 부수고 허무는 자입니다. 사단이 쌓는 것은 하나님의 성이 아니라 자기의 왕국이고 자신의 성일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의 사명, 역할은 무엇보다 먼저 쌓는 자여야 합니다.
또한 중보자는 막아서는 자입니다.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께서 분노를 거두시고 한 번만 더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막아서는 자입니다. 무엇을 막아야 합니까? 물이 가득히 찬 저수지의 둑이 터지려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고 달려가서 막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너지는 성을 향해 달려가서 막아서는 자가 중보자입니다.
본문에 성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보이는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법이 먼저 무너지고 파괴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가, 가정이, 한 사람이 각각 지켜야 할 선이 먼저 무너지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 지극히 상식과 도리가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셨습니다.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해야 할 것, 들일 것과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허용되는 것과 도무지 허용할 수 없는 것을 지정해주셨습니다. 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과 성전을 짓게 하셔서 세속적인 것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성전 안에도 뜰을 정하여 그 뜰 안에 들어와도 되는 범위를 정하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여 제사장이라도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그들이 행할 일도 정해주셨습니다. 선을 정하신 것입니다. 이 선들이 흐려지고 지워지는 것이 바로 성이 무너지는 원인입니다. 성이 무너지기 전에 언제나 이 선이 먼저 지워졌던 것입니다. 이 선을 지키고 이 법을 지키는 것이 성을 지키는 실질적인 힘이고 방법입니다. 본문 앞 26절입니다.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더럽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길 때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명령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며 곧 성을 지키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리고 중보자는 화목케 하는 자입니다. 보이는 성을 쌓듯 중보자는 사람과의 관계를 화목으로 쌓고 화해시키는 자입니다. 원래 중보자의 의미 중에는 ‘화목제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하기 위해 필적할 만한 희생을 주고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에스더왕비는 자기 민족을 살리기 위해 왕 앞에 중보자로 섰습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향한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사무엘은 사울왕을 위해 밤을 새며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다리오 왕은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을 지켜달라고 그 밤에 금식하며 중보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친척 형제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롬9:3). 모세도 이 백성을 벌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보자는 화목케 하는 자입니다. 화해시켜 끊어진 관계라도 이어주고 연합하고 화합하게 하는 자입니다. 성을 쌓는 자요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서는 자입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사명이고 역할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중보자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나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이는 얼마나 됩니까.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화목제물, 온전한 중보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화목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결실이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중보자를 찾고 계시고 그런 중보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 형제와 자녀와 이웃과 민족을 위한 중보자의 사명과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