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제일 말을 잘 하고, 이치와 사리에 맞게 막힘없는 변재로서 지구상에 가장 최고는
예수님과 부처님이시다.
그렇지 않는가?
막힘이 없으시고 어떠한 질문에도 전부 순간적으로 동시에 다 보고 아시고 말씀을 해 주신다.
그러므로 말빨로서는 지구상에서는 당췌 이 분들을 당할 재간이 없다.
그리고 할말도 없다, 워낙에 옳으시고 정답만 말씀해주시기 때문이다.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경외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점점 깊어갈 수 록 진실이, 진리라는 그 명사의 용어가 이렇게 두려운 것도 함축하고
있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되는 전율을 느낄 수 도 있는 것이다.
이를 돌이킴이라 이름한다.
차치하고
그런데 예수님이 바른말을 하지 않아, 거짓말을 한 죄가 있어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는가?
예수님께서 누구 누구한테 피해를 주고, 돈을 떼어먹어서 비난을 받으셨는가?
전혀 틀린 것은 하나도 없는 흠결없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부처님께서 거리를 다니실때 이치와 사리가 없이 남한테 해 악을 주어서
어린아이들한테나 거리의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으시고 했겠는가?
경우를 논 하신다면 이 지구상에 두번째 가라하면 서러워 하실 분들이다.
한동훈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흠결이 없고 선명한 이치나 논리를 내 놓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항상 정치는 새로운 노래를 하는 이야기일 수 밖에는 없다.,
정치판에 오래 눌러앉아있는 사람들은 항상 똥차 같은 소리를 낼 수 밖에는 없다.
벤즈 대형도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다. 시대적으로 과분한 청소대상일 수 밖에는 없다.
왜인가? 인간은 산화 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요구하게 되어있다.
그중에 한동훈이 적절한 인물로 평가되는 셈이다.
그런데 한동훈도 아주 선명한 이치와 경우와 말빨이 아주 상당하다.
그렇지 않는가? 경우에도 밝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거나 모든것을 해결 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것으로 절대 정치적 문제를 다 해결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계속 정당성을 유지하는 말만 계속 내 놓는다면
그러면 아웃이다.
세상사는 옳은 것으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세상의 인류들은 특히 무엇이 옳은지에 대하여
전부를 다 판단할 수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이러한 사실을 자기도 모르게 잘 모르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그렇다면 모든 국민이 옳고 그름도 모른다는 이야긴가? 하고
의문스러움을 표할 지 모르나 사실 그러하다,.
우리가 옳다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옳지가 않다는 것을 깨치는 것이 진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노바닥 성인들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고 가셨다.
제일 옳으셨던 예수께서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까닭을 예수께서도 아주 진정한 말씀을 인간들에게 하시고 가셨다.
물론 시간적 과정에 다시 부활 하신것도 맞다.
하지만 일단 인류의 세계에서는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책임론을 부각해보자.
왜 인간은 그러해야 했는가?
옳고 진리를 정당하게 말씀하셧다는 이유로 왜 예수에게 죽임을 당하게 했는가 하는 사실을 물어보자 이 말이다.
그것은 인간은 짐승표를 물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서 그러하다.
공부삼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다.
요한계시록 8장 을 보면 주) 예수께서 빛 으로 심판을 하시는 장면이 요한이 보고 이를
증거 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상대세계는 언제나 심판을 가름하게 되어있다, 본질이다.
빛 7 의 일곱 봉인에 대하여 두루마리 하나씩 펼때마다 모든 생명성품을 포함한 산하대지 하늘
땅 심지어 해와 달도 그 온전한 비중의 100% 중에서 삼분지 1 은 항상 죽어버린다는 심판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 함인데
무슨 의미인가?
과학적으로 분자구조를 들여다 보면 분자 구성비중에서 항상 3분지 1 은 소멸되고 그와 동시에
3분지 1 는 새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말함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는 삼권분림의 민주주의 사회이다.
진리의 구조는 삼요소 인 분자구조이고 운자는 분자구조안에 몇개가 있는지를 의미하고
원소는 몇종류의 원자가 있는가를 구하는 실험중에 있을 뿐이다.
무조건 분자는 3 구조다 이 말이다.
진리의 말씀을 행하신 신께서는 삼위일체를 말씀하시고
부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 의 삼세간을 응축하여 생명운동을 지금 현재로 모아 행 한다 하셨다.
특히 말빨만 세워 서로간에 쑥덕만 꿋다가 세상 진리 삼분지1 을 죽인다는 사실도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인간의 생명력 운동은 과거 인자 그리고 현재인자 미래 인자 의 삼위를 구성하여 생명운동을 하고 생각을 내는데
항상 과거를 소멸하게 되고 과거의 인과관계로 구성된 현실적기반의 생각을 내는 영역의 소이를
다 잊어먹고 살기때문에 완연하게 옳고 진리의 소이점을 잃고 살아가는 자 들을 백성이라 이름하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중생이라 이름했다는 사실이다.
유사성을 지니고 (정확치 않으니 비슷함) 그 해당 종류들끼리 세상에 출현하는 무리를 중생이라 이름한다.
우리는 늘 삼분지 일을 망각하거나 멸실되어지는 상태로서 지금 의 생명운동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3 분지1 은 늘 생성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를 스스로 존재의 본질을 망각하고서야 살아내야 하는 인간류의 당사자 들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는 이미 어리석어져 모른다는 너무나 아픈 현실적인 사연들의 이야기를
펼친 말씀이 성경말씀이다. 우리는 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정신구조라는 의미를 새삼하여 본질적인 삼위일체론으로 보게되면
인간들을 향하는 신들의 마음은 아픔의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이고 이를 보시고 출현하신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고로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이 삼권분립의 자리에 있는 권력의 자 들은 항상 삼분지 1 이 썩어나가고 정신이
삼분지 일이 죽은 상태에서 온전한 생각을 담을 수 없는 원천적인 모순을 지니고 행하기 때문에
이 역시 항상 새 인물로 계속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분지 일을 망각하고소멸된 입장에서 옳다고 온전한 생각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된다는
사실이다.
정치라는 인류의 큰 노선을 결정해야 하는 자 들은 그러므로 옳은 말을 한다고 , 논리가 정연하고 선명하고
어떠한 흠결이 없다라고 표정유지 관리 하는 것에 매달리며는 큰 실수를 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유사성의 모습으로 무리로서 살아가는 대중들에게는 그래도 항상 유능한 자 가 정치를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향하는 바와 정신의 본성품은 완벽한 룰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서 만물의 영장이고 영적인 동물 아닌가 이 말이다. 이는 하나님도 인정해준 입장이므로
인침을 확보된 것이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모순을 안고있는 논리는 이와같다.
가장 완벽한... 어떠한 무기도 다 방어할 수 있는 방패.
가장 완벽한,,, 어떠한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는 창!
이 두가지가 동시에 존재 할 수 있을 까?
이를 모순이라 함인데. 인간의 정의를 내린다면 모순이다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떠한 무기도 다 방어할 수 있는 방패 를 원하고
어떠한 방패도 다 뚫을 수 잇는 창을 원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게 문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셨는데 인간을 원망하실까?
아니다. 창조주가 만든 백성들 아닌가? 불가분 관계 아닌가?
그러므로 절대주 신도 인간을 잡고 놔 주지 않고 있다.
물가에 내다놓은 아이처럼 늘 염려하고 있다 이 말이다.
그런고로 삼분지 일 을 늘 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본질적 소이는 불가피 한 것이 아닌가 이 말이다.
모순으로 제조했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모순률 등은 인간 입장의 생각점으로는 잘 못된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손짓은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존재한다.
사랑 자비 윤리등을 성인들께서는 공수하여 백성들에게 퍼다붇기 시작했다.
仁(인) , 恩(은: 은혜 은 字는 큰 大 가 삼획이다), 계정혜(삼위일체). 부모자식지간 (삼위일체) ,
삼강, 등을 추구하고 지향하며 인간의 범주로서 단지 윤리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삼위가 형성되어진 아주 온전한 보이지 않는 여백미로서 가능성을 추가한 것이다.
이 본질적인 삼분지 1 을 회복하는 것은 돌이킴을 주는 대상이 위에 열거한 윤리, 양심 인자이기
때문이다. 참회와 회개는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를 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단지 그 후는 하늘의 도리를 지켜볼 수 밖에는 없다.
인간은 모든것은 해결할 능력이 원래 없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삶을 대하여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살아내야 한다, 모순률을 지니기 때문이다.
어떠한 나라이던간에 나라안팎에서 몰아치는 갈등의 바람을 세울 정치가는 결코 옳다는 명제로서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은 지 멋대로 불기 때문이다.
이 바람이 잠시 침묵을 지킬때가 있다, 고요하고 정적의 의미를 잡고 있을때를 말한다.
인류의 바람과 운명! 은 여기서 잠시 가는길을 멈추고 이목을 집중할 수 있다 이 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의 정적감인 침묵이다, 달리 말하자면 여백의 공간 에서 서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한동훈은 침묵함을 오래동안 유지하기를 빈다.
침묵은 사람을 세우기 때문이다. 삼분지 1 의 망각점이 되 살아나는 계기는 침묵의 여백에서
되 살아난다는 사실을 말 한다. 시간과 공간적 장애가 없는 장소가 침묵이라는 사실이다.
한동훈이는 좋은 정치가 이기 때문에 한번 견해를 내 본다.
옳은말을 자꾸 내 뱉지만 말아야 한다. 좀 꾸라, 발효될때까지..
운칠기삼이다, 침묵은 칠이요 옳고 정당한 말은 삼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냥 재미로 한번 읽어보소
정치가 항상 답답하기에....
정호승 시인의 신과 인간관계를 산문으로 밝힌 유투브 를 첨부하여 소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