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왕과 마사코 간 약혼의 함의
지난 3월 29일 오후 2시 시가현립 예술극장에서 오페라 “ 더 라스트 퀸(The Last Queen,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 한일관계자의 축하를 받으며 공연되었다.
그리고 보니 朝日 간 황족을 대표하는 영왕 이은 황태자와 나스모토노미야 마사코 공주가 1920년 4월 28일 결혼식 올린지 올해가 105년이자 이방자 여사가 사망한지 36년이 되는 해이다.
영왕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아버지 고종 이희와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선영(1854~1911, 57세, 시위나인, 장티푸스 死) 44살의 늦은 나이인 1897년 10월 20일 고종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7년 7월 순종이 즉위함에 따라 11살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어지만 12월 5일 “일국의 황태자가 어찌 나라 안에서만 세월을 보내는가. 일본제국으로 보내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구실하에 초대 통감 伊藤博文에 의해 볼모로 이끌려 인천항을 출발 일본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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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황태자비 간택을 한국 황제 폐하께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일임하셨으므로 일본의 모 고귀 영양(令孃)을 후보자로 택정(擇定, 택하여 뽑음)한 뒤 고종과 순종의 윤허를 얻었는데 …”/대한매일신보(구 서울신문) 1909년 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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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박문(伊藤博文)은 영왕의 일본 유학을 관철시킨데 이어 노골적인 정략결혼을 추진했으나 아이러니하게 이등박문이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처단됨으로써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배우자 대상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는 일본 천황 가족 외에 9개 황족 중 나시모토노미아 가문의 딸로 메이지(明治) 일왕의 조카인 아버지 나시모토(梨本宮) 모리마사와 어머니 이츠코사이에서 1901년 맏딸로 태어났고 현재 아키히토 일본왕의 이모(姨母)이다.
본래 마사코는 히로히토(Hirohito, 유인)의 배우자 물망에 올랐다가 사촌 나가코에 밀려나 희생양이 되었고 영왕과의 결혼은 집안이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숭례문)를 따라 참전한 조선과의 인연으로 배우자 후보 중 으뜸이었다.
이같은 배경하에서 이들의 정략적인 결혼 계획은 이등박문의 뜻밖에 죽음으로 수면으로 가라앉은 듯 했으나 일제의 계획은 조선 식민통치 일환으로 수면 아래에서 차근 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하루 영왕(英王) 이은(李垠, 1897~1970)이 일본 육사 생도시절(20살) 1916년 8월 3일 휴가지 별장에서 아침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을 펼쳤다가 자신이 일본 황족 마사코(方子, 1901~1989)여사와 약혼 보도를 보고 놀랐다.
마사코 여사 역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이왕) 이은 선생과 약혼 사실을 16살되던 해 아침 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기사에 실린 것을 보고 알았다.
게다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 보도에 따르면 아버지(고종1852~1919)와 형님(순종,1874~1926, 명성황후 민비의 子)도 둘사이의 약혼사실을 몰랐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황태자 이은 선생과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의 약혼은 일제에 의한 조선 통제 강화, 식민통치 정책의 일환 계획으로 치밀하게 추진되었고 둘은 이에 따른 정치적 책략(政略的)의 산물이자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원하든 원치않든 그로부터 4년 뒤 영왕은 “동경에서 이방자 여사 혼례 가마에 유학생 서상일의 사제포탄 투척”과 "영왕 이은은 무부무국(無父無), 즉 아비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 짐승)이며 적자(賊子, 불충)다.
이조는 이제 영원한 정죄와 저주를 받을 것이다"(독립신문 12920년 5월 8일) 등 민족의 역적으로 몰리고 조선의 따가운 시선하에서 식을 올렸다
1920년 4월 28일 조선과 일본인의 축복 속에 치러져야 할 가례가 동경의 삼엄한 경계속에 둘만의 불행에만 그친게 아니라 대부분 식민지 백성으로 모멸과 서러움 및 패배감에 치를 떨었고 한일융화(韓日融和),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 아래 수탈과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연합뉴스, 이희용 기자.201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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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본 융화의 대역이라니…. 불안과 두려움 속에… 아무도 모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으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략결혼의 희생양이었으니까…”/이방자 여사 회고(이가환, 영친왕 정혼녀 민갑완을 아시나요, 경향신문, 1984,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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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방자 여사는 정치적 책략의 틈바구니에서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본의 아닌 두나라를 섬기며 살게 될 운명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영왕과 마사코 가례 이전 정혼녀 민갑완과 이후 이야기를 한 후 글을 맺을까 한다.
민갑완(閔甲完, 1897~ 1968, 02, 19)은 영왕 이은의 전 약혼녀로 명성황후 여흥 민씨 먼 조카벌로 아버지 민영돈(동래부사)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1916년 9월 16일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07년 150대 1의 경쟁을 뚫고 황태자 영왕의 약혼녀로 간택되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은 황태자는 “일본제국으로 보내 문명을 배워야 한다”며 1907년 12월 5일 이등박문은 영왕을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다.
이후 민갑완은 1917년까지 10년간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지냈으나 일본은 노골적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하여 1916년 8월 영왕과 마사코의 약혼 그리고 1920년 4월 28일 결혼하게 되면서 1907년 금지환(金指環. 금반지)을 받은지 13년만에 완전히 남남이 된 것(파혼)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 민영돈은 화병으로 죽으면서 민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와 유사한 판박이가 김을한 기자의 동생 김장한과 덕혜의 정혼(본의의 의사와 무관하게 집안 간 합의 하에 혼인 약속,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결혼권한 지님)이 그 예라 하겠다.
영왕이 1907년 12월 5일 일본에 유학이란 구실하에 이등박문의 손에 이끌려 일본에 보낸 진후 마사코와 정략적인 결혼이 추진되는 것을 바라본 고종은 덕혜가 오빠의 전철을 밟지 않게 1919년 김장한과 정혼을 맺은 것이다.
결국 파혼과 정혼의 당사자인 민갑완과 김장환은 정략결혼(영왕-마사코-민갑완과 쇼 다케유키- 덕혜옹주-김장한)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민갑완은 둘이 결혼한지 50여 일 만인 1920년 6월 7일 동생 민천식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우사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녀는 “아닙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남을 해치면서 팔자에 없은 행운을 찾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후 상해에서 여러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참아라. 너 하나로 가문을 더럽히고 만다면 그 누명은 자손만대까지 지속될 것이다. 청춘의 고뇌를 참아라.”를 되뇌이고 가문을 생각하며 모두 거절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 김구·이시영 선생과 동생 민천식의 권유로 1946년 귀국을 했지만 돌볼 친지가 없어 여관과 친적집을 번갈아 가며 생활하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란했다.
또한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이 박정희 도움으로 귀국하였으나 뇌졸중 혼수상태 빠진 상태라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말년 민갑완은 가톨릭을 신앙하였고 고혈압, 기관지염, 후두암으로 고생하다 1968년 2월 19일 70세 나이로 한많은 삶의 무게를 뒤로하고 부산 실로암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영왕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와 1948년에 두 차례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을 했으나 광복 직후에는 미군정이, 정부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의 반대로 거듭 귀국이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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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재일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자리에서 영왕을 우연히 만났을 때 영왕이 자신의 영구 귀국을 타진 해 보려 했으나 이승만은 "오든 가든 마음대로 하시구려."라며 홀대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는 구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상당부분을 국유재산화하여 한국전쟁 이후 구 황실의 사유 재산은 사동궁(의친왕 집, 현 종로구 견지동 84), 창덕궁 낙선재 등이 전부였다.”
“영왕은 "나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라며 아내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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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인즉 이승만 정부는 영왕과 순정효황후 윤비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이우(귀인 정씨)에 대해 조금 호의적으로 반응했는데 여러설이 있지만 이승만은 영왕이나 덕혜가 귀국하게 되면 왕정복고의 두려움 때문에 이같이 대한 듯 하다.
영왕은 이복 동생인 덕혜가 조현병으로 의사표현을 못하자 후견인이 되어 1955년 종무지와의 이혼을 허락했고 마쓰자와 정신병원 병원비(1946~1961년)를 지원하는 등 여동생 덕혜을 보살피고 귀국을 위해 김을한 기자와 더불어 백방으로 노력했다.
영왕은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고 재일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63년 11월 22일 당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도움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영왕 이은 선생은 195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상태로 지내다 혼수상태에 빠진 체 돌아와 1년간 서울 명동성모병원에서 치료하다가 퇴원, 이방자 여사와 함께 1963년 박정희의 도움으로 중구 중명전과 창덕궁 낙선재에서 국가에서 국고 보조금을 받아 생활했다.
한편 오래도록 꿈꾸었던 불우 이웃, 심신장애인 등을 위한 사업으로 1967년 언어장애와 소아마비 장애인을 위한 명휘(영왕의 호)원, 1971년 정박아 교육을 위한 자혜학교 등을 설립했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지 7년되는 해 1970년 5월 1일 사망, 희정당에서 영결식(빈전 낙선재) 후 남양주 홍유릉 영원에 묻혔다.
영왕 사후 이방자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며 정박아·언어장애인·소아마비 등 장애인 사회봉사. 바자회 등을 하며 생활하다 1989년 4월 30일 88세 나이로 식도암과 직장암으로 사망하여 희정당에서 영결식(빈전 낙선재) 후 영왕이 잠들어 있는 홍유릉 영원에 합장되었다.
* 글/양은석
* 참고 자료
- 대한매일신보(구 서울신문) 1909년 1월 8일자
- 독립신문 1920년 5월 8일
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2019.
- 이가환, 영친왕 정혼녀 민갑완을 아시나요, 경향신문, 1984, 05, 01
* 참고 : 덕혜옹주/빈전, 영결식 수강재, 이구 : 빈전,낙선재, 영결식 희정당
* 이미지
- 1960년 초 가족사진/좌(영왕 이은), 중(이구),우(이방자 여사)/자료 나무위키
- 영왕 이은과 마사코 약혼/1916년 8월 3일 아사히(조일)신문 보도 기사/자료: 더 라스트퀸실행위원회, http://lastpueen.net
- 영왕의 전 약혼녀 민갑완/경향신문
- 1963년 11월 22일 귀국 이후 명동성모병원/좌(영왕 이은), 중(마사코), 우(둘째 아들 이구, 첫째 아들 이진은 생후 9개월만인 1922년 死)/자료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