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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부자지간에 돌이킬 수 없이 너무 엇나간
글,편집: 묵은지
세상을 살다보면 무슨 일인들 없겠냐만은 내손으로 내자식을 죽이는 그런 천륜을 거스르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지경까지 치달아버린 부모의 마음은 어떻고 죽는 그 자식은 또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까요. 조선시대에 그것도 임금과 자기 아들인 왕세자 사이에 실제로 이런일이 일어났으니 정말 기가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 부자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자식을 죽인 애비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임금으로 무려 82세의 기나긴 삶을 구가하며 살았던데 비해 그의 자식인 사도세자는 불과 28세의 짧은 나이에 그 애비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이야기입니다. 하기사 이 이야기는 시대를 달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에도 이해하기 힘든 상당한 충격을 주는 특이한 사건이기에 오래전 부터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심심치 않게 다루어져 왔었으며 지난 2015년 9월에 개봉된 '사도'라는 영화까지 이런 역사물을 통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조선의 비통한 역사 이야기입니다. 묵은지가 새삼스럽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조선의 건국 이후 왕의 자리를 가지고 형제간이나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 튀기는 볼썽사나운 혈전을 치루는 일은 더러 있었어도 애비가 자기의 친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왕권을 지키려는 경우는 전례에 없었던 특이한 일이었고 또한 그 내막에는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여 그 궁금함을 풀어나 보자는 뜻으로 다시 돌이켜 보았습니다.
우선 이 사건의 핵심인 '임오화변'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을 돌아보자면 먼저 영조가 임금의 자리에 등극한 과정이 중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선의 제19대 왕인 숙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3살의 아주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숙종은 영조의 조선 최장기간인 52년을 집권한 다음으로 45년을 넘게 다스렸던 임금이었지만 재임기간 동안에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감싸는 남인과의 치열한 당파싸움은 극에 달했는데 희빈 장씨의 소생(경종)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던 남인의 위세는 결국 희빈 장씨가 숙종에게 사사되면서 정권이 서인으로 넘겨지는 등 당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숙종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은 경종은 2년여를 친정하다가 그 역시 친모인 희빈 장씨의 말로를 목격한 이후 극도의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병세가 악화되었고 후사도 없어 연잉군(영조)에 의한 대리청정을 하다 결국 1724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다음으로 제21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영조 역시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도 심한 당파간의 당쟁다툼으로 아슬아슬하게 죽음 직전까지가는 굴곡을 겪으며 '신임사화'나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리기까지하며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임금의 자리에 가까스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자신의 어미인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으로 미천한 신분인 것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껴왔던 영조에게는 이런 힘겨운 과정을 거치며 임금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그만큼 왕좌에 대한 집착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는 무한한 기대와 사랑을 쏟았는데 적어도 자기의 아들에게는 완벽한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기대감이 부자지간의 엇나간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왕세자의 책봉도 일찍 서둘기도 하였거니와 불과 서너살 밖에 안된 어린 아들(이선)에게 학문을 두고 닥달을 하는 정도였으니 그 조급함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하겠습니다. 이러다보니 세자는 커가면서 점점 임금인 아버지와의 대면을 피하려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영조는 어린 아들에게 심한 책망을 해댔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세자는 점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심하게 앓게되고 성격과 행동도 광기를 띠며 기행을 일삼고 포악해져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된 것이지만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이러한 사도세자의 광기 증상과 행패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영조의 우려에는 자신을 두고 숙종의 아들이 아닌 한 때 숙빈 최씨의 연인이라 알려졌던 김춘택의 아들일꺼라는 소문에도 집권내내 시달렸는데 실제로 경종 독살설과 함께 이를 이유로 영조가 집권한지 불과 4년째인 1728년 3월에 충청도 청주지방에서부터 영남지역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이 그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비록 6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이러한 계속되는 당파싸움에 이은 정정의 불안감과 함께 늦은 나이에 얻은 세자 조차도 장래를 걱정해야하는 영조의 처지였습니다. 임금의 자리를 굳건히하고 한시라도 빨리 당쟁을 잠재워 세자의 위상을 확보하려다보니 세자를 향한 영조의 조급함이 심해지게 되었는데 극성스런 애비의 도를 넘어서 심한 히스테리 증세로까지 진전되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반대로 엇나가며 자신의 바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세자를 원망하는 일이 늘기 시작하였는데 세자 또한 점점 자신에게 과중된 심적 부담감을 스스로 감당키 어렵게 되자 아예 학업을 도외시하고 뒤틀린 기행의 생활과 광기를 부리며 난잡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색당파 다툼과 툭하면 정권의 주도권이 바뀌는 정변으로 일상을 쫒기듯 살아온 영조에게는 자신과 자식의 왕권을 유지하고 지키는데 온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며 그에 따른 발빠른 안도감을 찾으려는 조급증은 그를 더욱 옥죄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더욱이 심성조차 연약했던 세자는 자신이 감당키 어려운 일들이 연일 계속됨으로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그들은 부자지간에 돌이킬 수 없는 엇나간 사이가 되고만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아들을 멘붕에 빠지게 하고 바보로 만든 애비의 실수는 세자 나이 15세에 영조 자신이 작정했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말이 대리청정이지 세자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자리였는데 영조가 시행한 대리청정은 정사를 펼치는 과정에 세자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영조에게 아뢰면 영조는 그것도 결정 못하느냐는 식이었고 세자가 어떤 일을 결정하면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식으로 탓을 하니 그야말로 말만 대리청정이지 세자는 그저 허물만 뒤집어 씌워 영조 앞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또한 차이가 많았는데 성격이 외향적이고 성급한 영조와는 달리 세자는 내성적인 성격에 느릿한 언행과 동작으로 영조를 답답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화통한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도 왕세자를 나무라는 일이 빈번했으며 이럴때면 세자는 의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는데 그 정도가 하도 심하여 도리어 신하들이 세자를 두둔하는 간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속에 성장을 한 세자의 성품이 정상적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며 세자의 성격은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하더니 그 도를 넘어 사람을 마구 해치는 광기마저 띠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영조는 자신의 보위에 위협을 느낄 때면 의례적으로 맘에도 없는 왕세자에게 선위를 밝혔는데 이 또한 세자에게는 큰 스트레스를 받게만든 원인이 되었고 선위는 아니지만 영조가 명을 내린 대리청정 역시 오로지 영조가 신하들에게 보여주기식의 그런 차원에서 꾸민 대리청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자에게는 도리어 많은 정신적인 부담만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대리청정은 사도세자로서는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시발점이었는데 노론 세력을 이룬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가 합세해 노론을 싫어한 세자의 대리청정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모략하여 세자의 패악을 간청하였고 이를 곧이들은 영조는 불같이 화가 끓어 1762년 세자에게 10가지 이유를 들어 스스로 죽으라는 자결을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이 명을 불복하였고 화가 치민 영조는 문정전 앞뜰에 뒤주를 갖다놓게하고 세자를 그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세자는 폭염속의 뙤약볕 아래 놓인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8일간을 허기와 더위에 지치며 신음을 하다 결국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자신의 안위마저 위태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자식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일수 있는 건지 권력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기는 아무리 비정한 애비라 할지라도 영조는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갈거라고 예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과거 고려를 침략했던 몽고 유목민들의 풍습에는 죄인을 뒤주 속에 가두는 형벌을 시행하였는데 그것은 유목민들의 떠돌이 생활에 걸맞는 이동식 감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세조에 대한 뒤주 형벌은 아마 이런 과거의 몽고 유목민의 형식을 생각하고 따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한여름 찜통 더위에 물한모금 주지않고 8일씩이나 좁은 뒤주 속에 가둔 것은 애비로서 자식에게 가하는 형벌을 떠나서라도 너무 잔인하고 심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뼈아픈 결과를 초래한 임오화변의 과정을 지켜본 세손(정조)은 애비의 고통을 통곡하며 할아버지인 영조와 당쟁을 일삼는 볼썽사나운 신하들을 얼마나 원망 하였을까요.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행여 애비가 자식을 죽였다는 백성들의 좋지않은 여론이 떠돌 것을 의식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죽인 아들 세자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와 세자의 묘지에 함께 묻힐 청화백자판에 새긴 총5장으로 구성된 장문의 묘지문을 내렸는데 그러면서도 사도세자의 시신은 세자로서의 예를 저버린채 능이아닌 양주에 있는 배봉산 자락에 초라한 모습의 묘에 안장시켜 버렸습니다. 영조는 조선의 임금으로 최장기 집권을 하면서 들끓는 당쟁을 '탕평책'으로 다독거리고 군제를 개편하여 조총을 제조하게 하는 등 부국강병의 정책을 펼치는 한편 백성들의 군역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는 '균역법'을 제정하고 '신문고'제도를 부활시키는 등 백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펼쳐 백성들로 하여금 '성군'의 소리까지도 듣는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애비의 불명예는 두고두고 피해 갈 수는 없었으며 공교롭게도 영조의 치적가운데는 백성들을 위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내지는 개정을 한 업적도 있어 묵은지는 영조가 자식에게 가한 잔학 무도한 형벌을 언듯 떠올리며 그의 다중인격적인 모습에 씁쓸한 썩소를 짓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들 부자간을 그렇게 엇나가게하여 비극을 낳게 하였는지... 과연 이것이 자신의 출신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영조 개인의 왕권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허약한 심신의 사도세자가 벌인 기·비행이 불행을 초래하였는지 또 아니면 만나기만하면 서로를 헐뜯어대는 사색당파간의 다툼이 이를 조장하였는지는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힘들겠지만 묵은지 개인의 사견으로는 천륜을 어기고 잘못 가버린 이런 것 하나만을 보더라도 그안에 깔려있다 돌출된 무수한 문제점들이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담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송시열은 조선 최고의 주자학의 대가인 학자인데 그런 학자가 노론의 영수로 활동하였으며 이이 역시 조선의 학자로서 서인의 영수로 활동하였고 이황 역시 학자이면서 남인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학자들마저도 당론을 들고 당적을 달리하면 적대감을 갖고 응대를 했다하니 설사 세상이 그럴지언정 학자로서의 품위는 지켜야 했습니다. 묵은지가 감히 말하건데 아무리 학문의 경지가 높았다한들 이런 권력의 다툼속에 있는한 그들은 학자도 아니요 그저 서푼짜리 정치인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들 학자들을 서푼짜리 정치인들로 만들어버린 붕당정치는 조선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사색당파의 정치 형태로 시작되었는데 붕당정치의 처음도 학자들이 학파적으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정치의 권력에 따라 나뉘는 정파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시작된 또 하나의 조선 망국의 길인 세도정치 이전까지 성행한 붕당정치가 조선의 정치적인 발전에 약간의 영향을 끼치기는 했다지만 그보다는 당쟁으로 사사건건 다툼을 일삼는 폐단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폐단은 도를 넘어 왕권을 가르는 지경까지 거침없이 행하였고 권력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일도 서슴없이 저질러 학자로서의 기품을 유지하기는 커녕 시정 잡배들도 꺼리는 일들을 마구 일삼았습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을 보며 일단의 학자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는데 정약용을 위시해 이중환 등 실학자들은 당쟁을 일삼는 이런 학자들을 가리켜 통렬히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임오화변 사건은 총체적인 조선의 비극이었으며 조선의 수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영조가 당쟁을 막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탕평책 자체가 공평치 못하게 노론쪽을 더 두둔한 편파적인 정책이었기에 화를 자초, 아들까지 죽이는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결과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가짐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데 묵은지의 보태는 말로 원론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학자는 무엇보다도 학문과 학식을 높이는데 힘써야 하며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은 편과 적을 만들게 되고 그런 과욕으로 인해 자칫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기정 사실로 깨우쳐야합니다. 학자는 학자로서 학문을 위한 순수 열정이 넘쳐야 하고 위정자는 사리사욕에 젖은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직하고 지혜로운 정치라야만 국민들의 마음속에 존경심이 우러러나와 따르게 되고 그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하며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