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여
류지미 2022. 7. 16. 13:05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여
학가산인
황진이는 자칭 송도삼절을 이야기한다. 송도에 3가지 꺾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 그리고 황진이. 아래 시는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햐,,,,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 내겠다는 표현을 과연 누가 쓸 수 있겠는가? 오로지 황진이만이 가능하다. 일 년 중에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짓달. 그 밤의 한 허리를 잘랐으니 얼마나 길겠는가? 그런데 기나긴 밤을 옷감 자르듯 한 허리를 잘라낼 수 있겠는가? 그 발상 자체가 참으로 신선하다. 추상적 시간을 가위로 싹둑 잘라낸다.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다.
춘풍과 이불,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로 볼 수도 있고, 춘풍도 다사롭고, 이불도 따뜻하니 춘풍 이불은 따스함의 상승감을 고조시킨다. 명주 솜과 비단으로 만든 폭신한 이불 속에 버혀낸 '시간'을 ‘서리서리’ 넣어두고 싶다고 한다. '서리서리'는 아름다운 의태어이다. 긴 물건을 똬리처럼 감아 놓은 모습을 서리서리 라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길 길래 서리서리 넣어야만 할까?
그렇게 서리서리 넣어둔 시간을 님이 왔을 때 구비구비 펴겠다는 것이다. 2연의 '서리서리' 와 3연의 '구비구비'는 절묘하게 댓구를 이룬다. 구비구비는 연인들이 사랑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긴 밤에 구비구비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진정한 사랑은 정신의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이 없는 육체적 관계에 큰 의미를 줄 수 없다는 말일까? <동짓달 기나긴 밤>은 조선의 여인내가 길어올린 애틋한 사랑 예찬의 절창이다.
마음이 어린 후니 ~~
황진이는 과연 실존 인물인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당대에 이름 있는 선비이자 출세한 인물이다. 허엽은 개경의 은자이면서 학식이 높은 서화담과 교류했고 <식소록>이라는 책도 썼다. 이 책 속에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완전 허구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온갖 야담이나 패설류에 황진이가 등장하지만 허구가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예컨대 지족선사에 관한 부분이다. 지족 선사의 10년 면벽 수행도 황진이 앞에서 무너졌다는 야담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황진이가 당대의 인물 화담의 이름을 듣고 ‘너도 꼬추 달린 남자인데 별 수 있겠냐’ 하는 심정으로 그를 유혹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고, 잠자리 날개 같이 야시시 한 옷은 이미 시쓰루 상태에서 진이의 살결에 찰싹 달라붙어버린 상태였다. 비에 흠뻑 젖어 굴곡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진이. 화담은 진이 옷을 홀딱 벗기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며 잠자리를 만들어준다. 화담은 절세미인을 옆에 두고 금세 평안하게 코를 골았다. 다음날 아침 진이가 눈을 뜨자 화담은 간데없고 아침 식사가 소반 위에 소박하게 놓여 있었을 뿐.
다음날 옷을 단정히 입고 다시 나타난 진이는 화담 선생 앞에 큰 절을 올리고 제자가 되기를 청한다. 이어 말하기를 송도에 꺾을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화담과 박연폭포, 그리고 황진이. 송도삼절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아, 화담과 진이의 사랑은 아름다워라. 만일 화담이 진이의 육체를 품었다면 기생과 한량의 정분 이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나 서로 바라보고 애껴주는 정신의 사랑이어서 이들의 만남이 난향처럼 그윽하게 수백 년을 전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재미없다. 화담이 아무리 수행이 높은 도학자라지만 거시기가 달린 남자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할지언정 진이를 향한 속마음은 활활 타올랐지 않았을까? 세간의 이목 때문에 갖고 싶어도 취할 수 없는 인간이 화담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래의 시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외로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화담은 이미 진이를 사랑했다,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화담이 은거하던 성거산 자락에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 상수리 나뭇 잎새가 오소소 떨어져서 바람에 흩날릴 때, 화담은 사랑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영창으로 교교하게 달빛이 스며드는 삼경이었을까?
마음이 어린 후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는 바람에 행여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다 보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다. 마음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지당하다. 만중운산은 구름이 만겹으로 쌓인 산이다. 화담의 마음 속엔 그리움이 먹구름 되어 몰려와 있는 것이다. '어느 님' 은 당근 황진이다. 가을 바람이 낙엽을 떨구는 소리 하나에도 혹여 진이의 발걸음 소리가 아닌가 화들짝 놀라서 문을 열어 보고 있다.
아, 누군가를 연모하는 마음은 이렇다. 화담이 만 권의 책을 읽었고 도학이 높았다 한들 사랑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화담을 위선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황진이가 스승 화담의 마음 한자락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이는 시조 한 수에 자신의 마음을 띄운다.
내 언제 무신 無信 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 月沈三更 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닙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를 버리고 님을 속일 수 있겠어요. 달빛도 침침한 야심한 밤에 나로선 뭐라 할 것이 전혀 없사옵나이다. 가을 바람에 낙엽 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라고요. 나도 님이 그리워 미치고 폴짝 뛰다 죽을 지경이랍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시다.
화담과 진이의 맑은 사랑 앞에서 우리는 오로지 애틋한 감탄사만 연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황진이의 빼어난 연애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어저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 하노라.
아, 내가 한 짓거리가 참으로 한심하다. 그리워 할 줄을 몰랐단 말인가? 있어 달라고 하면 아마도 님께서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가시겠다면 가보라고 내 스스로 말해 놓고서 돌아서서 그리워하는 이 마음은 또 뭔가?
젊은 이들은 사랑은 밀고 땡기는 것이라고 한다. 밀당! 과연 그럴까? 땡기다 고무줄 끊어져 봐라. 얼굴에 한번 맞아봐야, 눈탱이가 밤탱이 되어 봐야 고무줄 매운 맛을 알지. 사랑의 밀고 땡기는 얍삽함이 황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냥 후회와 애틋한 그리움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정. 이러한 사랑의 정념이 깊고 깊어지면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이리라. 오늘 동짓날 밤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출처> (사)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 카페 2022.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