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14) 예산 순교지
서로 신앙 독려하며 주님 품에 안긴 의좋은 순교 복자들
- 충남 예산 지도와 순교 복자 순교지
예산하면, 충효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앞선다. 예산군 관내엔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이 살아 있는 충의사가 있고, 조선조 세종 시대에 살다간 이성만과 이순이라는 ‘의좋은 형제’의 전설이 전해온다. 또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덕숭총림 수덕사, 조선 후기 서화가 김정희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추사고택도 예산에 있다.
이뿐 아니다. 예산은 내포신앙의 빛나는 요람이기도 하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생가 터가 자리한 여사울 성지도 예산에 있고, 곳곳이 순교신앙의 숨결이 살아 있는 순교 터다. 이번에 시복된 복자 124위 가운데 3위가 예산에서 순교해 내포 신앙의 빛나는 뿌리가 됐다. 예산군 내 예산장터ㆍ대흥ㆍ덕산 순교지다. 한가위를 보내자마자 새로운 순교복자들을 찾아 떠난 순례 길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간 이들을 ‘기억’하는 기회였다.
‘의좋은 순교 복자’가 탄생하고
이성만ㆍ이순 형제는 ‘의좋은 형제’이지만, ‘의좋은 순교 복자’도 있다. 친척 사이인 복자 김광옥(안드레아, ?∼1801)과 김정옥(베드로, ?∼1801)은 믿음을 통해 친형제 이상으로 친교를 나누고 신앙을 실천했다.
예산 여사울 출신으로 같은 여사울 출신인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광옥은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던 중 친척 김정옥을 만나 교리를 전한다. 이로부터 이들의 ‘끊을 수 없는’ 신앙여정이 비롯된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두 사람은 신앙서적과 성물만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교리 실천에 힘을 쏟았다. 그렇지만 중인 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지방 면장을 지낸 김광옥이나 같은 중인 출신인 김정득은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포졸들은 이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낸다.
- 김광옥 복자가 순교한 곳으로 추정되는 예산장 쇠장터(왼쪽)와 무한천.
포졸들에게 체포된 이후 김광옥은 예산으로, 김정옥은 홍주(현 홍성)으로 각각 압송된다. 갖은 심문과 문초, 형벌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자 관장은 이들을 병영이 있는 청주로 이송한다. 청주병영에서도 이들은 서로 신앙을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살이의 고통을 견뎌낸다. 이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그해 8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해 참수하라’는 선고를 받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그해 같은 날인 8월 25일에 순교의 화관을 쓴다.
예산군 덕산 출신 ‘내포 회장’ 정산필(베드로, ?∼1799) 또한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ㆍ원시보(야고보, 1730∼1799)ㆍ방 프란치스코(?∼1799) 등과 친교 공동체를 이루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한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입국하자 직접 찾아가 세례를 받은 그는 1798년 혹은 1799년에 체포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덕산 관아 옥중에서도 그는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옥에 갇힌 동료들에게 신앙을 권면했으며, 1799년에 순교한다.
200년 세월에 ‘순교 터’는 잊히고
- 김정득이 순교한 곳으로 보여지는 대흥부동산 뒷쪽 공터.
예산 관내는 곳곳이 순교 터고 증거 터다. 그래선지 인구 8만 5000여 명 인 군내에 올해로 설립 87주년을 맞는 예산본당을 비롯해 예산 산성리 · 신례원본당 등 본당이 7곳이나 된다. 그럼에도 ‘순교신앙의 뿌리’를 찾는 일은 힘겹다. 124위 시복법정 개정 당시 현장조사에 참여했던 윤인규(여사울성지 전담) 신부를 찾아가 관아 터나 옥터, 순교 터를 ‘지번’으로 일일이 확인한 후 찾아 나서니 한결 수월했다.
우선 김광옥의 순교 터는 예산군 예산읍 사직로 33(예산리 600) 예산관아(현 예산군청) 인근 옥터에서 300m가량 떨어진 예산리 334-2 쇠장(우시장) 일대다. 예산장터 옆 우시장이라는 말만 전해질 뿐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예당저수지에서 발원해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무한천을 낀 쇠장 일대에서 처형하게 된 것은 예산현에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전문 회자수가 없어 소를 죽이던 쇠장의 백정을 임시 회자수로 썼던 데서 유래한다. 어쨌든 처형되기까지 김광옥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끌려갔던 순교 길은 200년이 지난 오늘엔 퇴적된 역사의 지층으로나마 남아 있을 뿐이다.
김광옥과 ‘친형제와도 같은’ 형제애를 나눴던 김정득의 순교 터는 그가 갇혀 있던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4(동서리 384-12) 옥터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대흥초등학교 동쪽 공터다. 지번으로 보면 예산군 대흥면 예당로 883(동서리 174-5)이다. 예당저수지와 붙어 있는 순교 터에는 수풀이 무성할 뿐이다. ‘의좋은 형제’상이 곳곳에 세워진 공원을 걷다 보니 의좋은 순교복자상도 세워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 정산필이 매를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옛 덕산옥터(현 읍내1리 마을회관).
다시 발길을 돌려 대흥에서 19㎞가량 떨어진 정산필의 순교 터로 향했다. 덕산읍내다. 덕산관아는 현재의 덕산초등학교 운동장 오른쪽 예산군 덕산면 봉운로 70-9(읍내리 365-4) 건물 뒷편 공터이며, 옥터는 관아터에서 500m가량 떨어진 읍내리1구 마을회관(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봉운로 51-1, 읍내리 361-1)이다. 정산필의 순교경위는 자료마다 달라 정확한 순교위치를 알기가 어렵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이나 약전에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형장에서 참수당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사학징의」 권1 54쪽에는 ‘정산필이 매를 맞아 죽었으므로 이제 다시 신문할 것이 없다’고 기록돼 있어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 윤인규 신부는 매를 맞아 죽었다는 「사학징의」의 기록에 더 신빙성을 두고 읍내리1구 마을회관을 순교 터로 본다.
해거름녘 길목, 순교신심은 불타오르고
예산의 순교 터와 증거 터는 기왓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폐허가 돼 버려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그 치열했던 순교 신심이야 어디 폐허가 될 수 있으랴. 그 빛나는 순교의 얼은 이제 200년의 시공을 건너뛰어 우리 가슴에 아로새겨지고, 후세에 빛나는 신앙의 거울로 살아남으리라.
뉘엿뉘엿 저무는 해거름녘 덕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의좋은 순교복자’들의 삶을 반추해보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1일, 글ㆍ사진=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