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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rthur Conan Doyle(아서 코난 도일)
1859-1930년
탐정 <셜록 홈스>가 활약하는 소설을 발표하며
추리소설 발달에 기여했다
세계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은 아마 셜록 홈스일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최초의 탐정소설인 〈모르그 가의 살인〉을 쓴 이래로
채 200여 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추리소설 장르는 엄청나게 발달했다.
하지만
영국의 소설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셜록 홈스 시리즈만큼
오랫동안 폭넓게 사랑받은 추리소설은 드물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난 도일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진지한 문학가로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셜록 홈스의 인기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렇지만 1887년 《주홍색 연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셜록 홈스는 130여 년이나 건재하게 살아남아
코난 도일의 이름을 문학사에 길이 남게 했다.
아서 이그나티우스 코난 도일은
1859년 5월 22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앨터먼터 도일은 잠
시 공무원을 지내다가 퇴직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터라
유년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할아버지는
'H. B.'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인기 풍자만화가 존 도일이며,
숙부들 역시
〈펀치〉의 표지 디자이너이자 동화 그림 작가인 리처드 도일,
《영국 연대기》를 집필한 제임스 도일,
더블린 국립미술관 관장을 지낸 헨리 도일 등
문화계 전반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이었다.
9세 때
랭커셔의 예수회 예비학교인 호더 학교를 거쳐
같은 재단인 스토니허스트 칼리지에서 공부했는데,
이 무렵부터 불가지론자였다고 한다.
17세 때 에
든버러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가족의 생활비와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치료비 때문에
포경선을 타거나 외과 의사 조수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몇몇 편지를 대필하면서
글이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에드거 앨런 포, 에밀 가보리오, 브렛 하트 등의 작품을 좋아했고,
이 때문인지 초기 단편들에서는 이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879년,
〈체임버스 저널〉에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보물찾기 이야기인
〈사삿사 계곡의 수수께끼〉를 발표하면서
대학 재학 중에 수십 편의 단편을 썼는데,
큰 돈벌이가 되지 않아 졸업 후 개인병원을 열었다.
처음에는 금전적인 문제로
동창과 플리머스에서 동업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불화로 끝이 났고,
포츠머스 사우스씨에서 홀로 안과를 개원했다.
그는 환자를 돌보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고,
1884년 〈콘힐 매거진〉에 익명으로 투고한
〈J. 하바쿡 제퍼슨의 증언〉이 게재되기도 한다.
이듬해 병원 환자의 누나인 루이즈 호킨스와 연애결혼을 했다.
작품 활동을 계속했지만
작가로서 자리 잡지 못하던 도일은
1887년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첫 번째 소설 《주홍색 연구》를
영국 잡지 〈비튼의 크리스마스 연감〉에 발표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그리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셜록 홈스 시리즈가 성공을 거둔 것은
두 번째 작품 《네 사람의 서명》을
미국 잡지 〈리핀코트 매거진〉에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는 작가 생활이 큰 돈벌이를 보장해 주지 못해서
도일은 안과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고자
사우스씨의 병원을 폐업하고
빈으로 몇 달간 유학을 다녀온 뒤
1891년에 런던으로 이사해 안과를 다시 열었다.
그런데 그해 홈스 시리즈가 새로 창간된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연재된 단편들은
1892년 《셜록 홈스의 모험》,
1894년 《셜록 홈스의 회상》 등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셜록 홈스 시리즈가 게재되는 달
〈스트랜드 매거진〉은 10만 부에 이르는 판매고를 올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도일은 셜록 홈스, 즉 추리소설로 얻은 명성을 가볍게 치부했으며,
역사소설로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소설을 쓰고자 홈스 시리즈를 접기로 하고,
1893년 〈스트랜드 매거진〉 12월호에 셜록 홈스가
숙적 모리어티 교수와의 격투 끝에 폭포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마지막 사건〉을 게재한다.
이 단편은
《셜록 홈스의 회상》에 마지막 편으로 실렸으며,
이로써 도일은 확실히 홈스를 끝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독자들은 홈스를 살려 내라고 협박 편지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런던 시내에서 조의를 표하는 검은 완장을 차고 다닐 정도로 거세게 항의했다.
〈마지막 사건〉이 실린 뒤
〈스트랜드 매거진〉은
2만 명의 정기구독자가 구독을 취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이 홈스를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1893년,
아내 루이즈가 결핵 진단을 받자
도일은 요양을 위해 아내와 함께 1895년 카이로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가제트〉 소속 종군기자로 일하면서
모험소설 《로드니 스톤》, 《엉클 버낵》 등을 썼다.
1899년에는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이 일어나자 군의관으로 종군했으며,
이때 벌어진 영국의 포로 학대에 대해 세계적으로 비난 여론이 일자
《남아프리카 전쟁-원인과 집행》을 써서 영국군의 처우를 비호했다.
이로써 그는 1902년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으며,
통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기까지 한다.
도일은 셜록 홈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돈벌이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보어 전쟁에서 돌아온 후 다시 셜록 홈스를 살리기로 하고,
1901년 〈스트랜드 매거진〉에 홈스가 등장하는 장편
《바스커빌 가의 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홈스와 모리어티의 대결이 일어나기 전
홈스와 왓슨의 활약을 그린 작품으로,
홈스가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코난 도일이 이때까지만 해도 홈스 시리즈를 유지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홈스는 도일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 주었다.
이에 그는 1903년 단편 〈빈집의 모험〉에서 홈
스가 〈마지막 사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모리어티 일당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설정을 만들어 냈다.
홈스는 이로써 완전히 부활했다.
도일은 계속 홈스 시리즈를 발표했고,
1905년 단편집 《셜록 홈스의 귀환》,
1908년 단편집 《홈스의 마지막 인사》,
1915년 장편소설 《공포의 계곡》이 출간되었다.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은
1927년에 발표한 단편집 《셜록 홈스의 사건집》이다.
1906년에
아내 루이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코난 도일은 이듬해 애인 진 래키와 재혼했는데,
그녀와는 카이로에 갔을 무렵 만나 애인 관계를 유지하던 사이였다.
홈스 시리즈를 연재하면서도
도일은 당시 제대로 된 소설로 인정받던 역사소설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고 싶다는 욕망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는 1912년 남미를 배경으로 선사 시대 동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모험담
《잃어버린 세계》를 발표했다.
도일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학자 챌린저 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독 지대》,
《안개의 땅》도 집필했으나,
홈스의 인기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코난 도일은 55세의 나이로 군대에 자원했다.
입대를 거절당하자 그는 민간인 자원 부대를 결성해 일반 병사로 종군했다.
1916년에는
6권짜리 역사서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의 영국의 전투》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1917년에는 심령술에 빠져들어 《새로운 세계시》, 《심령술사의 방황》과 같은 작품을 썼다.
이때 심령술 강의까지 해서
언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1920년에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의 영국의 전투》를 완성했으나
그저 역사적 사실의 조합일 뿐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대단치 않다는 혹평을 들었다.
1927년에는 SF소설인 《마라코트 심해》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심령술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지지 않아
《피니어스가 말하다》 같은 심령술 책도 계속 썼다.
말년에 벌어진 심령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코난 도일을 언론의 공개적인 조롱거리로 만들었음에도,
셜록 홈스의 위상은 여전했다.
1930년 7월 7일 코난 도일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로열 앨버트 홀에 운집해 영매를 통해
코난 도일의 메시지를 듣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약 6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시신은 윈들셤의 로즈 가든에 묻혔다가 후일 햄프셔의 뉴 포레스트로 이장되었다.
12. Hermann Hesse(헤르만 헷세)
1872-1962년
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성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으며,
동양의 철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데미안》의 한 구절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구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성장에 대한 대담하고 관통하는 듯한 묘사,
휴머니즘적 이상과 고도의 스타일에 대한 전범이 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
라는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수여 사유처럼,
청춘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는
슈투트가르트의 유서 깊은 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마리 군데르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는데,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해 인도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죽은 후 칼프로 돌아왔다.
그 후 의학 공부를 하고,
칼프의 실업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헤르만에게 평생의 여성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헤세가 4세 때
아버지가 바젤로 발령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약 5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기운이 넘치는 악동이었던 그는 7세 때
바젤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기질을 억누르는 학교에 만족해했다고 한다.
9세 때 외할머니를 잃고 쓸쓸해하던 외할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은 다시 칼프로 이주했다.
헤르만은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 칼프에서 뛰놀고,
신학자로서 거대한 서가를 가지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집을 드나들며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서가는
헤르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후일의 작품에도 이따금 자전적 요소로 등장하곤 한다.
13세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역시 속박이 심한 기숙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시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헤세는 방황을 거듭했다.
탈출 소동을 벌이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자살 시도까지 한 것이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공장 견습공,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했다.
여가 시간에 시와 글을 썼으며,
1899년 22세 때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또한 같은 해에 헤세와 서신을 나누던
헬레네 보이크트의 남편 오이겐 디더리히스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판되었고, 릴케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
이후 헤세는
바젤로 옮겨가 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1904년에는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면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문학적 재능을 갖춘 청년 페터가
도회지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도
시 문명의 허위를 깨닫고 자연의 삶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는 성장소설이다.
젊은 시절 헤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개성과 현실과의 균형 찾기,
자연에 대한 동경, 젊은 예술가의 고뇌 등이 그려져 있다.
1904년,
헤세는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고,
스위스 접경 지역의 가이엔호펜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헤세는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게르트루트》를 비롯해
단편소설, 시, 에세이 등을 쓰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고독한 소년의,
《게르트루트》에서는
예술가의 내면을 탐구하는 등
초기 작품에서는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가이엔호펜에서 헤세는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낳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안락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만족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했다.
헤세는 책임감 있는 가장과 괴팍한 작가로서의 삶 양쪽을 오갔고,
남편의 계속 바뀌는 태도에 지친 마리아와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다.
1911년, 헤세는 친구인 화가 슈투르체네거와 함께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결혼 생활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그는 이런 상황을 《로스할데》라는 작품에 그렸다.
그는 예술가에게 과연 결혼 생활을 할 자질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또한 인도 여행은 《싯다르타》에 반영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으며,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독일을 휩쓸었다.
인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로서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스위스 〈신취리히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평화주의적 반전론(反戰論)을 받아들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매국노,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쟁 기간에는
독일에서 헤세의 글을 발표할 통로가 일체 막혔고,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전쟁포로 구호소에서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투병,
아내의 정신병 등
고난이 이어졌고,
헤세는 신경쇠약에 걸려
카를 융의 제자 J. B.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풍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1919년 대표작 《데미안》으로 나타난다.
소년의 고뇌와 자기 인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성장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과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에서 글을 발표할 수 없었던 헤세는
당초 이 작품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가
이 작품이 신인 작가에게 수여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하게 되자
진짜 작가가 자신임을 밝히고 상을 반환했다.
헤세는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을 떠나
스위스 남부 루가노 호반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등을 썼다.
《싯다르타》는
한 청년이 자기실현을 하는 철학적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의 철학이 결합되어 있다.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20년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연 이후
파리, 마드리드, 뉴욕, 도쿄,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던 시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23년,
아내 마리아와 이혼하고
루트 벵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 생활도 4년 만에 끝이 났다.
1931년에
니논 돌빈과 세 번째 결혼을 한 후
헤세는 비로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종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헤세는 물질 과잉의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담은
초현실주의 작품 《황야의 늑대》,
두 인물의 교류를 통해 지성과 감정, 종교와 예술 등의 대립을 다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광란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을 잠식하자
헤세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는 유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를 쓰면서 견뎠다.
이 작품은
194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고, 독일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문학, 논리학 등 광범위한 지적 유희를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유럽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헤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헤세는 전후 독일, 냉전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헤세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표방하지 않았고,
몬타뇰라의 집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지난 50년간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시 전집을 냈으며,
서평 등을 통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