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오해
임병식
1
보내온 시집을 받고 곧바로 전화를 걸 생각부터 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듯한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노총각·노처녀로 만나 오십오 년을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그리운 추억만 먹고 산다는 구절이었다.
평소 같으면 문자 한 통으로 고마움을 전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늦었더라도 직접 목소리를 건네는 것이 예의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시인도 아는 사이지만 부군 또한 잘 아는 분이다. 신호음 끝에 웬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혹시 아무개 시인님 번호 아닌가요?”
상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데요. 잘못 거셨습니다. 저도 시인이기는 합니다만.”
순간 책봉투를 다시 확인했다. 이름도 번호도 맞는 듯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전화번호 한 자리가 잘못 인쇄돼 있었다.
어이없는 실수였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오래전 들은 말이 떠올랐다. 파고다공원에서 돌멩이를 던지면 십중팔구는 김 씨, 이 씨, 박 씨 가운데 하나를 맞는다는 우스갯소리였다.
그 말처럼, 내가 잘못 건 전화의 주인도 “나도 시인”이라고 했다. 그 순간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이제는 시인이라는 이름 또한 어디서나 쉽게 부딪히는 세상이 된 것 같아서였다.
서둘러 전화를 걸려다, 세상 풍경 하나를 엉겁결에 확인한 셈이었다.
2
혼자 살다 보면 혼밥도 습관이 된다. 그래도 괜히 민망해 점심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가곤 한다.
그날도 식당으로 걸어가는데 자꾸 몸이 휘청거렸다. 밤새 잠을 설쳤나 싶어 걸음을 조심해 보았지만, 발밑이 영 자연스럽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썬글라스를 벗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외출용 썬글라스가 아니라 글 쓸 때 쓰는 돋보기였다. 도수가 꽤 높아 책상 앞에서만 끼는 안경인데, 정신없이 집을 나서며 바꿔 쓴 것이다.
그러니 길바닥의 높낮이가 달라 보이고 몸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내가 쓰는 썬글라스는 겉으로는 색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 모양까지 비슷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야.”
혼잣말처럼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옆에 있었다면 공연히 오해를 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깜박 잊는 일은 늘어나는데, 세상은 그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쉽게 뜻을 붙인다.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기억이 흐려지는 일이 아니라, 남의 시선까지 조심하며 살아가는 일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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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첫댓글
'우연한 오연(誤緣)'의 즐거움을 보여줍니다. 잘못 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저도 시인입니다만"이라는 대답은, 당혹감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문학이 흔해진 세상'에 대한 시니컬하면서도 정겨운 시선을 던집니다. 서두름이 선물한 뜻밖의 세상 풍경이 흥미롭습니다.
'노년의 자기성찰'이 돋보입니다. 돋보기를 선글라스로 착각해 비틀거렸던 해프닝을 단순한 건망증으로 치부하지 않고, "남의 시선까지 조심하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노년의 숙명으로 연결한 대목이 압권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실수'에서 시작해 인생의 '진실'을 건져 올리는 솜씨가 대단히 유려합니다. 문장은 담백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여운은 돋보기 도수보다 훨씬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삶을 관조하는 따뜻하고도 예리한 시선이 느껴지는 명작입니다.
양일간에 우연한 계기로 짧막한 수필감을 얻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새삼스럽게도 어떤 깨다름을 주는 일어었습니다.
하나는 이세상에 문인이 차고 넘친다는 것. 또하나는
살아가면서 챙기고 조심할것이 자꾸만 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늘어나 쌓이니 마음도 몸도 늘어지고 굳고 뻣뻣했던 고집도 눅어져가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늙'이라는 글자가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겠느냐 억지를 부려 봅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겨룬 후 이세돌 9단은 돌연 바둑계를 떠났지요 요즘 일부 문인의 글을 보면 여기저기서 인공지능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그들은 시치미를 떼며 누가 눈치를 채랴 하는 듯 합니다 글장이가 양심을 잃으면 막장이지요 고민이 깊어져 가네요 붓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깊어집니다 역겨운 세태입니다
인공지능도 문명의 이기인데 약간의 도움을 받는건 용인이 되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개월 전만해도 저도 쳇지피티나 제미나이 존재조차도 몰랐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른이들은 벌써 수년전부터 접하고 있었더군요.
그만큼 저만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접하다보니 당장 고질병적인 오타자 문제가 해결되어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정체설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까지 나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기법에서 저도 그런 글들을 많이 접하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