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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하동 칠불사
칠불사(七佛寺)는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며,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이며, 동국제일선원이다.
또한 해동계맥을 수립한 율 도량이고, 동다를 증흥한 차도량이며,
거문고를 전승한 현악의 도량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
『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가야불교의 발상지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化生)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칠불의 명호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다. 이 칠왕자의 성불로 인하여 칠불사라 하였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마을과 대비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동국제일선원
지리산 칠불사는 아자방 선원과 운상선원이 있어 무수한 도승을 배출한 동국제일선원이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당시 담공(曇空)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서, 방안 네 귀퉁이에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담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으며, 현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상선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 장유보옥선사의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한다는 설과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운상선원을 대중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칠불사의 아자방과 운상선원에서 고려시대의 정명선사, 조선시대의 서산대사(1520-1604), 부휴대사(1543-1615),
초의선사(1786-1866), 이외에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 등 선승들이 주석하며 수선안거했다.
근현대에는 용성선사, 금오선사, 서암선사 등 큰스님들이 수선안거 했다.
칠불사 경내에는 임진란으로 인해 퇴락한 전각을 중수한 부휴 선수 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께서 임진란으로 퇴락한 칠불암을 중수하고 지은 칠불암개와
낙성시(七佛庵盖瓦落成詩)가 있다.
(『淸虛集 』권6)이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용성선사는 아자방에서 선승들을 지도하는 여가에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불교의 종지를 드러냈으며, 금오선사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서암선사 등 선승들을 모아 결사정진을 하였다.
거문고의 전승지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 이 곡조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하니 귀금선생은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다.(『삼국사기』, 권32. 樂)
칠불사가 위치한 화개면에 정금(井琴)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그 이름은 옥보고 선생이 칠불사의 옥보대인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이 마을의 우물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하여 우물 정(井) 자, 거문고 금(琴) 자를 사용하여 정금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다도의 중흥지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조선 순조(純祖) 28년(1828)에 초의선사가 차의 시배지인 화개동에 위치한 이 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여가에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지은 『만보전서』(萬寶全書)의 다경채요(茶經採要)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하였다.
이 다신전을 기초로 하여 후일에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였다. 동다송은 4구를 1송(頌)으로 하여 모두 17송이고,
백파거사가 초의선사를 찬탄한 1송을 더하면 동다송은 모두 18송이다.
화개동이 다도(茶)道의 성지임을 기리고 나아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풍류가 더욱 진작되어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룩되기를 염원하여 통광스님이 칠불사 경내에 다신탑비(茶神塔碑)를 세웠다.
문수기도도량
지리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다. 지리산이라는 이름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는데, 반야봉은 곧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문수도량인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으로서, 칠불사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화현하여 기도를 성취시켜 주고, 또한 공부인을 보살펴서 견성오도케 하는 영험있는 도량이다.
아자방(亞字房)
아자방(亞字房)은 스님들이 참선수행하는 선방이다. 벽안당(碧眼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축조 하였는데, 방안 네 귀퉁이의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 번 불을 지피면 100일 동안 고루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 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言, 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애써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 아자방에서 무수한 도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아자방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스님들이 발심정진케 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오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 중엽 어느 해 음력 10월 14일 동안거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어린 사미승이 걸망을 지고 조실스님을 찾아와
아자방에 방부를 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조실스님이 보아하니 나이가 어려 도저히 아자방에 방부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데는 장좌불와, 일종식, 묵언의 세 가지 엄한 규칙이 있는데, 어린 사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실스님은 그 사미승에게 더 커서 오면 방부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이 “부처님 말씀에 생사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조실스님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방부를 받아 주셨다.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대중들이 한방중이 되어 마구 졸면 그 사미승은 뒤로 벌렁 자빠져 꿍 소리를 내고,
그리고 땅을 치고 울면서 넋두리 하기를 “생사의 괴로움이 아니라면 왜 자고 싶은 잠도 못자고,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 졸던 스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한 철 내내 이렇게 되풀이 하며 해제를
맞이하였다.
해제날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끝나자 그 사미가 대중 앞에 나와 세 번 절을 하고 “조실스님께서 방부를 들여 주셔서
한 철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말자 그 사미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대중 스님네들은 그 사미는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나타나신줄 알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발심정진 하였고 한다. 칠불사에는
이 외에도 문수보살의 화현에 관한 말씀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상 글출처 : 칠불사 홈페이지)
하동 칠불사 아자방지
하동 칠불사 아자방지(河東 七佛寺 亞字房址)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지리산 칠불사에 있는 신라시대의
아(亞)자 방터이다.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44호 칠불사 아자방지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재위 AD42∼199)의 일곱 왕자가 외삼촌인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이곳에 와서 수도한지
2년만에 모두 부처가 되었으므로 칠불사(七佛寺)라 이름지었다.
그 후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 때 담공선사가 이중 온돌방을 지었는데 그 방 모양이 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하였다.
1951년 화재로 불에 타 초가로 복원하였다가 지금과 같이 새로 지었다.
아자방은 길이가 약 8m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곳으로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온돌은 만든 이래 1000년을 지내는 동안 한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하는데, 불만 넣으면
상하온돌과 벽면까지 한달 동안이나 따뜻하다고 한다.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 청소를 한다.
(출처 : 위키백과)
하동 칠불사 하늘나라 공주 백목련 /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78
한반도의 봄이 남해를 건너오더니, 맨 먼저 섬진강에 내려앉는다. 강 하류 고을 광양과 하동 산기슭의 매화가 온통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참으로 눈 깜짝할 새다. 그 봄은 쏜살같이 강을 거슬러 오르며 강 중류 고을 구례에 이르니 온 산천이 산수유 노란빛이다.
그 봄 길에 ‘얼쑤!’ 장단 맞춘 튀밥꽃인 조팝꽃이 ‘펑펑!’ 사방으로 튀어가 진달래, 개나리를 깨운다. ‘어? 봄이구나 봄!’ 기지개 켜며 말할 틈도 없이 목련, 살구, 홍도, 돌배마저 벌어지면 그저 온 산천은 한 마디로 꽃대궐이다.
한해의 그 봄은 평생에 딱 한 번이다. 그리 소중한 이 좋은 봄날 하루쯤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가 볼 곳이 또 딱 한 곳 있다. 바로 한반도의 봄꽃을 가장 먼저 피우는 지리산 계곡 하동의 화개골 칠불사이다.
그런데 여기 칠불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섬진강 화개골 푸른 물길 따라 몽실몽실 피어난 화사한 꽃구름 때문이다. 아니다. 벚꽃이나 돌배꽃, 홍매나 산복사꽃에 아무리 눈이 부시더라도 그저 쉬멍놀멍이다. 하지만 밀려드는 차량에 거의 주차장인 길은 ‘가다 멈추다, 가다 서다’이다, 그래도 그 횟수를 손가락이건 맘이건 세면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편안히 화개골로 접어들 수 있다. 좀 더 참으면 쌍계사이고 조금 여유롭다. 이어 지팡이를 꽂으니 싹이 났다는 최치원 지팡이 나무 즈음에선 더 여유롭다. 김수로 왕과 허 황후가 아들을 보러 와서 머물렀다는 범왕마을에 이르면, 이제 구불구불 거친 길에나 눈 크게 뜨면 된다.
그렇게 마침내 지리산 토끼봉 830m의 사찰 칠불사에 이르렀다면, 복 받은 거다. 꽃 피는 봄에 봄꽃 복이 어디 쉬운가? 그러니 아무 말 말고 그저 큰 꽃복 고맙게 받으면 된다.
이제 칠불사이니, 꽃구경에 앞서 2천 년 세월의 사찰을 잠시 둘러보자. 여긴 서기 101년 가야국 김수로 왕과 허황후의 일곱 아들이 운상원을 짓고 수행한 곳이다. 옥부선인이 구름 위 터를 잡아 피리를 불었고, 옥보고가 50여 년 머물며 거문고 노래 30곡을 만든 곳이다.
또 여기 아(亞)자방은 금관가야국 담공선사가 지은 길이 8m의 이중 온돌방으로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하다. 또 보광전은 나라가 어려울 때 소 울음소리를 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보광전에 불을 질렀다. 이때 산을 울리는 소 울음소리에 왜병은 허겁지겁 도망쳤고, 불길은 스스로 꺼졌다. 그 뒤로도 1876년 대 흉년에, 1910년 경술국치일에도 소 울음소리가 크게 났다. 여기 지형이 누워 있는 소의 형상이고 칠불사는 소 구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엇이든 인간의 소망이 간절하면 이야기로 남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6·25전쟁에 모두 불 속으로 사라져버린 칠불사를 1978년부터 복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모두가 아니듯, 운상원이고 칠불사인 이곳에는 2천 년 역사가 변함없이,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 성불한 가야국 일곱 왕자의 모습을 비춘 영지에서 김수로 왕과 허 황후를 뵙고, 옥부선인의 피리 가락, 옥보고의 거문고 곡도 바람결에 들을 수 있다.
그뿐인가? 새봄과 시작하는 한 해, 여기 칠불사의 매화와 백목련꽃을 본다면 2천 년 역사의 기운을 고스란히 몸과 맘으로 봄이고 받음이다.
매화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무어라 설명하랴? 또 백목련은 북쪽 바다지기를 사랑했으나 그에게 아내가 있음을 알고 목숨을 끊은 하늘나라 공주라고 한다. 꽃봉오리가 북쪽을 보며 벌어지고 북향화라는 이름인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사라는 게 모두 내 마음의 일이다. 그렇게 칠불사의 매화와 목련을 본 봄이면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아름다운 세상이리라.
사진작품 / ARA K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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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성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