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네 에세이 60
역사 가운데 살아 숨쉬는
구원의 땅 풍기
나는 풍기 사람이다.
이 말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 조용히 일어선다.
오래된 뿌리가 땅속 깊이 몸을 뻗듯 —
묵직하고, 따뜻하게.
풍기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수천 년의 역사와 예언적
신비가 깃든 특별한
'구원의 땅'이다.
소백산의 품 안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풍기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며,
이곳이 지닌 독특한 가치를 생각해 본다.
하나. 삼산(三山)이 품고,
이수(二水)가 흐르는 땅
풍기는 작은 고을이다.
경상북도 영주 땅 한쪽,
소백산 자락에 안긴 읍이다.
그러나 작다고 얕보지 말라.
민족의 영산인 소백산의 세 봉우리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그 사이에서
시작된 두 물줄기(금계천, 남원천)가
만나는 전형적인 '삼산이수'의 길지다.
산이 높고 바람이 맑아 전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맑은 날이 많은 고장,
이러한 자연적 이점을 바탕으로
사과와 인삼 농사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며 사람 살기에도
더없이 좋은 터전이 되어주었다.
삼산이수(三山二水).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이렇게 전한다.
"한반도 취락 가운데
이만한 복지(福地)도 드물고,
이곳에 겨룰 만한 땅도 희박하다."
이것이 풍기다.
사람이 살 만한 땅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 땅,
하늘이 먼저 점찍은 땅.
둘. 역사가 흐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전설은 이렇게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다시는 칼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 땅 어딘가에 용천검을 묻었다고.
그 자리에 절이 섰으니 — 용천사.
오랜 세월 절은 사라졌어도
그 이름은 지금도
동네 이름으로 살아 있다.
용천동.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몸은 사라져도 이름은 남아
땅 위에 역사를 새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 길에
소백 준령을 넘어
이 고장을 찾았을 때도,
그는 아무 땅이나 택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왕들의 태가 묻힌 땅,
나라의 실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던 땅,
삼재팔난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던 땅
그것이 풍기였다.
소백산 비로사 오른편 달밭골
고갯마루 아래,
지금도 주춧돌만 남아 있다는 사고 터.
잡초가 우거져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해도,
그 돌 하나하나에 고려와
조선의 숨결이 배어 있다.
나는 풍기 사람이기에
그 돌의 무게를 안다.
셋. 정감록이 으뜸으로 꼽은
피난처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사람들은 물었다.
"어디로 가야 살 수 있는가.“
정감록은 답했다.
"풍기 금계동으로 가라.
십승지 열 곳 가운데 첫 번째.”
소백산과 태백산이 마주 보는 양백지간,
산을 등지고 물길이 띠를 두르는
이 고을이 으뜸 복지라 했다.
임오군란, 한일합방, 대동아전쟁
나라가 무너지고 세상이 흔들릴 때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이 작은 고을로 걸어 들어왔다.
생활력 강한 그들은
인삼을 가꾸고, 사과를 심고, 베를 짰다.
고향을 잃었지만 새 고향을 일구었다.
그것이 풍기 사람들의 기질이다.
어떤 땅에 심겨도 뿌리를 내리는 힘.
그것이 풍기가
그들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넷. 인삼 한 뿌리에
담긴 이야기
풍기 하면 인삼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 선생 호는 신재,
스스로 무릉도인이라 불렀다.
이 분이 처음으로 산삼 씨앗을
땅에 뿌려 가삼 재배의 문을 열었다.
그 주세붕이 인삼밭 곁에 서원도 세웠다.
조선 땅에 선비의 씨앗을 처음 뿌린
백운동서원, 훗날 명종 임금이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내린
그 서원이 소백산 자락의
역사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지금의 금계중학교 앞 들녘,
누군가는 그 자리를
'부계밭'이라 부른다.
황금빛 닭이 알을 품듯
이 땅이 인삼을 품었다.
고려 시인 안축 선생은 읊었다.
"한 뿌리에 세 가지,
아홉 잎사귀 풀이여,
이것이 영약이로다.“
인삼 한 뿌리.
그 안에 풍기의 햇살과
바람과 토질이 녹아 있다.
그 안에 주세붕의 손길과
수백 년 농부들의 땀이 배어 있다.
풍기 인삼을 먹을 때
우리는 역사를 먹는 셈이다.
다섯. 사과나무와
선교사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오월번(A.G. Welbon)이라는
미국 선교사가
이 땅 풍기에 발을 디뎠다.
당나귀를 타고
순흥, 부석, 영주를 오가며
복음을 전했고,
그 손에는 사과나무 묘목이 들려 있었다.
풍기 땅 읍내 북쪽 솔경지 —
소나무 숲이 우거졌던 그 자리에
그 묘목들이 심겼다.
1928년, 그는 장티푸스로
이 이국 땅에서 생을 마쳤다.
고향도, 가족도, 명성도 없이.
그저 당나귀와 묘목 한 다발만 남기고.
그러나 그가 떠난 뒤에도
사과나무는 꽃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다.
한 촌로가 길에서
그를 보며 물었다 한다.
"당신네 나라에도 사과가 있소?“
얼마나 당당한 물음인가.
얼마나 순박한 자랑인가.
그 사과나무 시조목의 후손이
지금도 어느 농가 한편에서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풍기 사람이라면
그 나무를 기억해야 한다.
여섯. 베틀 소리와
직녀(織女)의 땅
날이 저물면
온 동네에 베틀 소리가 넘쳤다.
나무(펄프)에서 실을 뽑아,
날줄과 씨줄로 천을 엮는 인견.
손 빠르고 눈 밝은 직녀들은
한 대의 베틀 앞에 한 사람씩
앉아 밤새 손발을 놀렸다.
그 돈으로 시집 밑천을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갔다.
한때 전국 인견 생산량의 86퍼센트가
이 작은 고을에서 나왔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왜 하필 이 땅에 살아 있는지,
베를 짜는 여인들이
밤하늘의 직녀성을 올려다보며
실을 고르던 이 땅에
그 전설이 뿌리를 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곱. 풍기 사람으로
태어난 것
어릴 적 나는 몰랐다.
이 고을이 얼마나 깊은 땅인지.
소백산이 삼면을 품어주고,
두 냇물이 시가지 앞에서 만나는 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다.
인삼 향기가 코끝에 스미는 것도,
사과꽃이 매년 봄 언덕을
하얗게 덮는 것도,
베틀 소리가 밤을 채우는 것도
그냥 일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쌓이고 나서야 안다.
풍기는 그냥 태어난 고을이 아니다.
왕건이 칼을 묻은 곳,
공민왕이 피난처로 택한 곳,
나라의 역사를 지킨 곳,
정감록이 으뜸 복지로 꼽은 곳,
선교사가 목숨을 바친 곳,
인삼과 사과와 인견이 세상에 나온 곳.
이 모든 역사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 아래에 있다.
풍기 사람이라는 이름표
풍성할 豊(풍), 터 基(기).
풍성한 터.
이름 그대로의 고을.
나는 풍기 사람이다.
이 말 한마디에
삼산이수의 산천이 들어 있고,
천 년의 역사가 들어 있고,
인삼 향기와 사과꽃과
베틀 소리가 들어 있다.
작은 고을 하나가
이렇게 깊을 수 있다.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떳떳하게 말한다.
나는 풍기 사람이다.
이 땅의 아들이다.
왕건의 칼이 잠든 땅,
공민왕이 몸을 의탁한 땅,
인삼과 사과꽃과 베틀 소리가
천 년을 이어온 땅 —
그 아득하고 풍성한 땅에서 나는 왔다.
2026.5.26.
배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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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네 에세이 60 / 역사 가운데 살아 숨쉬는 구원의 땅 풍기
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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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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