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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5(주일) 민수기 11:1~15 “원망과 탐욕의 다베라”
오늘은 ‘원망과 탐욕의 다베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원망과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당장 나에게 없는 것만 묵상하며 주님이 주신 것을 은혜로 여기지 못하면 악한 말과 행동으로 주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들으신 하나님이 여호와의 불을 보내 진영 끝을 사르십니다. 모세의 기도로 불은 꺼졌지만, 탐욕을 품고 그들 중에 섞여 살던 인종들과 함께 백성은 고기를 달라며 자기 장막 문에서 웁니다. 이 소리를 들은 모세는 탄식하며 죽기를 구합니다. 오늘 ‘원망과 탐욕의 다베라’를 살펴보면서 나의 원망과 탐욕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중보자로 이 땅을 살아갈 것인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원망을 불사른 여호와의 불(1~3절).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광야에 있었지만 뒤에는 여호와의 산이 있고, 앞에는 언약궤가 있으며, 위에는 여호와의 구름과 그들 중에는 지도자 모세가 있었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눈 앞에 펼쳐진 뜨겁고 황량한 광야와 맛없는 만나만을 보며 불평하고 투덜거리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처음에 말씀과 기도로 광야로 나아간 이스라엘 백성은 겨우 3일밖에 행진하지 못하여(10:33), 자신들을 고되고 피곤한 광야로 이끈 하나님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하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에 원망은 ‘못마땅하여 불평하며 미워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0:10 KRV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약속한 후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경우에 원망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처럼 세상 음식에 탐욕을 품었을 때 원망했습니다.(민 11:4~6)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애굽, 즉 세상에 있을 때 먹었던 음식들에 욕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들어와서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되자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쉽게 생선과 오이, 수박과 부추, 파와 마늘 등을 먹었는데 광야에서는 만나밖에 먹지 못한다고 원망한 것입니다.
둘째, 주의 종에게서 허물을 보았을 때 원망했습니다.(민 12:1~2)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하자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창조시대부터 금지됐던(창 6:1~3) 다른 민족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원망했던 것입니다.
셋째,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원망했습니다.(민 14:2~4)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 땅을 몰래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정탐을 마친 후 돌아온 정탐꾼 중 열 명이 먼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대하고 그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여서 결코 그 땅을 가질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자신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이끌어냈느냐고 따지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넷째, 주의 종이 저주했다고 생각했을 때 원망했습니다.(민 16:41,42) 하나님은 땅이 입을 열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던 고라, 다단, 아비람과 더불어 그 가족과 그에 속한 모든 사람과 물건들을 산채로 삼켜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반역에 참여했던 250명의 사람을 불로 싹 쓸어 없애버리도록 하셨습니다. 불같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종에게 맞서는 것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을 저주해 죽였다고 원망했습니다.
다섯째, 마음이 상했을 때 원망했습니다.(민 21:4~5) 모세가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땅을 지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은 거절당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은 호르산에서 출발해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멀리 돌아서 가게 됐습니다. 에돔을 가로지르는 빠른 길을 놔두고 걷자니 길은 험하고 더욱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에 지친 백성들은 마음이 상하게 되자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품었던 원망의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충분한 원망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쏟아냈던 원망들에 대한 결과가 어떠했나요? 결단코 행복하고 바람직한 결과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여호와의 불을 그들에게 내려 진영 끝을 불사르십니다(1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여호와의 불’이 백성들의 원망으로 인해 ‘심판의 불’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사름의 심판에서 회개하고 나의 고난의 사건을 공동체에 알릴 때, 하나님은 모세와 공동체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심판의 불을 꺼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2절). 그 곳의 이름을 ‘다베라’라고 했는데, 다베라는 ‘불사름’, ‘불타는 것’, ‘연소’라는 뜻의 지명으로 시내산에서 3일 길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 혹시 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내 뜻대로 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다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평과 원망은 내 신앙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원망 불평하는 자신을 회개하고 작은 것이라도 감사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적용) 나의 원망과 불평의 다베라는 어디입니까? 인생 길에서 불평하는 내 죄를 불사르시려고 하나님이 고난이라는 불을 허락하신 것을 깨닫습니까?
2. 탐욕으로 불평하여 우는 백성(4~9절).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며 진영 끝에서 시작된 원망이 그들중에 섞여 사는 인종들의 탐욕과 결합하여 백성의 온 종족에게 퍼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에서 두루 거두고 쉽게 요리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그러나 탐욕에 미혹된 그들이 울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4,5절) 이제는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서 기력이 다했다고 또 다시 탐욕으로 불평합니다(6절). 그러나 이들의 기력이 다 한 것은 ‘만나’ 때문이 아니라 애굽(세상)을 그리워하는 탐욕 때문입니다. 대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하고 질긴 놈인지 아무도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탐(貪)하는 탐욕은 결국 사람과 가정과 나라를 망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호 앤드류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에 탐심에 대한 경고의 계명을 주십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이것은 사람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달리,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욕심을 내고 그것이 탐욕화 되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탐욕을 품는 자는 오늘 본문의 다베라의 사건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탐욕’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고,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뜨겁고 황량한 인생의 광야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내는 비결은 탐욕을 버리고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큐티인 간증] 악한 말은 이제 그만 이상욱
저는 대학을 졸업한 뒤 비교적 쉽게 디자이너로 취업했습니다. 그러나 잦은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로 1년 반만에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다 야근이 적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자리를 찾던 중 예술관련 기관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면접관의 질문에 답현을 잘해서 붙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이 마지막에 가끔 주말에 당직을 서야 하는 데 괜찮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주일예배를 매주 드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꼭 붙고 싶은 마음에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주일예배로 직장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잘된 것이 뭐가 았냐”는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1절).
하지만 공동체에 속해 매주 예배의 자리에 있다보니 구속사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탐욕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 자손처럼 합격을 떼쓰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4절). 그러자 예배에 지장을 주는 직장을 떨어뜨리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이 느껴졌습니다. 그 후 저는 다른 기관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보던 방식과 다르게 시간 제한이 있는 면접이었습니다. 생소한 면접방식에 걱정이 되어 들어가기 전에 짧게 기도했습니다. 다녀야 할 직장이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며 면접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시간 배분이 잘 되어 제가 준비한 말을 모두 할 수 있었고, 말을 끝내는 동시에 벨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최종합격했습니다.
현재 저는 청년부 소그룹 리더를 맡고 있습니다.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울 때 오늘 본문의 모세처럼 “감당할 수 없나이다”하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14절). 악한 말로 불평하던 저에게 찾아와주시고 예배를 지킬 수 있는 직장으로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공동체에 잘 속해 가기를 소망합니다.
적용하기) 수요일은 가족 사랑의 날로 야근이 없으니 수요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잠들기 전에 소그룹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적용) 인생의 광야에서 나는 무엇을 의지하며 하루를 살아냅니까? 하나님입니까? 자식입니까? 돈으로 인한 탐욕입니까? 내가 지금 탐욕을 품고 애굽에 있을 때 먹었던 고기를 달라고 울며 떼쓰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중보기도하는 모세(10~15절).
온 백성이 모세를 향해 불평을 쏟아놓자 지도자 모세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타락한 백성을 살려주시는 대신 자신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모세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한 말과 불평에 지친 나머지 ‘어찌하여’라고 탄식하며 이제는 왜 자신에게 백성을 맡겼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11,12절). 모세 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림으로 백성과 같이 넘어지고 맙니다. 모세가 완벽한 지도자인 것 같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 지도자는 없음을 우리에게 교훈해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 [큐티인 한줄 교훈]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서 사는 것이 천국의 매장지를 사는 삶입니다”.
오늘 주보광고에 “생명책 중간점검 짝수달 마지막 주일에는 생명책 중간 점검을 하겠습니다. 오늘 주일(25일)에 가져오신 노트를 가져오신 분은 노트를 보여주시고 늦어도 29일(목)까지는 노트를 사진찍어서 단톡방(혹은 목사님, 사모님톡)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광고내용이 있습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들은 ‘생명책’이라고 하는 노트 한권씩을 받으셨습니다. 이책은 중보기도노트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지 않는 자, 교회를 다니다가 중단하고 방학 중에 있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와 아내나 남편의 이름까지도 적어서 수시로 기도해주는 ‘전도기도노트’입니다.
그리고 그 노트 앞면에 이런 성경구절이 적혀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계 20~12)
세상에 아주 중요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참으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역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간서적, 베스트셀라, 등 책들이 즐비하게 꽃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책들 가운데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책들을 소개합니다.
오늘 성경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계시록20장12절 말씀이지요.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늘에 책들이 있고 또 다른 책이 있다, 그 책은 생명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라고 기록된 말씀이지요. 책들이 있고 책이 있다! 그 책은 생명책이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생명책에 관심을 모아보기로 합니다. 우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중요한 책이니까요. 먼저 생명책, 이렇게 말이 나오는 성경의 최초의 구절은 시편69편28절입니다. 한번 찾아 보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이 때 생명책, 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세페르 하임’이라고 합니다. .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호적’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선민의 호적’에서 저 사람들을 빼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호적에서 뺀다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을 호적에서 빼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것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집안이 알아주지 않으니 산다고 해도 부끄럽고 어디가서 돈도 빌리지 못하면서 집안에서 버림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옛날 같은 형편에 살길이 막막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가 아니고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일은 영원한 생명의 책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 생명의 책에 우리의 이름이 있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이웃, 우리에게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그 책에 기록되어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빌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생명책이란 구원받은 사람들의 책이란 말씀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때에 우리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지요.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또 우리가 받은 노트에 기록된 구절은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그는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쉰들러의 리스트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영화로 나왔었지요.
스필버그가 토마스 케넬리의 저작 '쉰들러의 방주'를 접한 것은 1982년이었습니다. 'ET'라는 영화의 촬영을 막 끝낸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쉰들러 리스트'에 대한 구상에 들어갔고 영화가 완성되기 까지 준비기간만 10년이 걸렸습니다. 실화이기도 한 이 영화의 배경은 폴란드의 '크라코우'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600년 전 흑사병을 피해 몰려 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된 도시로 그들은 경제,과학,교육,예술등 여러 방면에서 탁월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그들의 빛은 꺼지고 모든 것이 암흑으로 바뀐 것입니다. 1941년 폴란드 내 모든 유대인들이 크라코우 시내 강제주거지로 이동되고 ,1943년 3월 플라초프 수용소로, 독일이 패망하기 7개월 전 그들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옮겨지며 최후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휴먼드라마가 펼쳐지는데 그 주인공은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사교성을 십분 발휘해 독일군 장성들을 미리 포섭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파산한 공장을 인수해 군용식기 공장으로 개조하고 값싼 유대인 노동자를 고용합니다. 평소에 확보한 군의 인맥을 통해 받은 제품주문으로 그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들을 장악하고 있던 프라초프 수용소장 괴트 소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듭니다. 괴물이었던 괴트는 신들러를 만나 점점 인간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그의 관대함과 재치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이 생명을 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공장은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천국으로 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인생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절명의 위기가 곧 닥쳐옵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잠못이루는 번민 끝에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유대인의 생명을 산 것입니다. '돈'에서 '생명의 고귀함'으로 그의 가치가 확고하게 전환된 것입니다. 무려 1,100명의 유대인이 그를 따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7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그는 도망자가 신세가 됩니다. 이별의 순간,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합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했지. 두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그의 통곡은 계속되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했던 모세가 이제는 백성을 왜 자신에게 맡겼다며 하나님께 따지는 연약함을 보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은 완전한 지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나의 짐을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 맡길 때 주께서 나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시 55:22). 이 짐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고 가야하는 여러 먹고 사는 일 뿐 아니라 내게 맡겨주시고 보여주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짐이기도 해야 합니다. 5000명의 비전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통하여 이런 기적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적용) 나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완전한 지도자이신 예수님께 내 인생의 짐 뿐 아니라 생명구원을 위한 짐들도 주님께 맡기십니까? 오늘 내가 생명책에 기록해야 할 이름은 무엇입니까?
결 론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인 가나안,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인생의 광야길을 갈 때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6:33).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또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망과 탐욕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자로, 또한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고전10:31~33). 고린도전서 10:31-33 KRV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나의 원망과 탐욕의 다베라는 어디이며 영적인 가나안을 향하여 제대로 걸어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