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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깊이 읽기 / 시
김 욱 진
대표작
씨/시, 앗!
非비
여시아문如是我聞
수상한 시국·1-코로나19
노모 일기·7
나의 문학 자전_김욱진
나의 삶 나의 시
해설_김상환
김욱진 시집 『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1958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월간〈시문학〉12월호에 시 “도성암 가는 길” 외 2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 『비슬산 사계』『행복 채널』『참, 조용한 혁명』『수상한 시국』등을 출간했다. 2018년 제 49회 한민족 통일문예제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2020년 일본 쿠온출판사에서 한영일중 4개 언어로 출간한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에 “노모 일기·7”이 선정 수록되었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경북여상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작 5편
씨/시, 앗!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
씨가 뭔 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 뿌리고 산 것도 감이라고
지방문에 걸렸다, 그게 다 시가 되어
불씨처럼 화끈 달아오르면
감은 요리조리 데치고 볶고 삶고
그걸, 다 우려낸 게 시 아니 씨라고 그러지 뭔가
앗!
非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좌우간에 非는
똑바로 놓고 봐도 非
거꾸로 뒤집어 놓고 봐도 非
둘이 하나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수상한 시국·1-코로나19
정체불명의 능력자다
그는 사교적이고 때로는 치밀하고 대범하다
흡사 신종 다단계 회사를 차린 유령 같다
치고 빠지는 수법이 신출귀몰하다
눈 깜짝할 사이 훔치고 이간질하고
아무 데나 달라붙어 떼쓰고 시비 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기꾼 같다
어눌한 척하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수줍은 척하면서 할 짓은 다 하는
반갑잖은 손님이다
말이란 말에는 다 끼어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퍼뜨리는
슈퍼 바이러스 전파자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객기를 부리나 싶다가도
밥 먹을 때나 차를 타고 달릴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여럿 있을 때나
심지어 정신병동까지 스며드는 걸 보면
인간시장 간 보러 온 염탐꾼 같다
출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마스크 사러 약국 앞 줄 서 있다가도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을 덥석 잡는다
금세 나는 숙주, 그는 바이러스
나와 그의 거리는 한 호흡 사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그곳
허깨비처럼 끄달려 돌아다니는
그곳에서 나는 그를 보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 하러, 왜,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물어볼 겨를조차 없다
생과 사 사이, 나는 숨바꼭질하고 있는 중
노모 일기·7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님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입마개하고 여기 갇혀 있게
이제 난 쑥이나 뜯으러 갈란다, 하시고는
화장실 들어가 온 바짓가랑이에다 똥오줌 술술 다 싸 붙이고서
야, 속이 시원하다 그러시지 뭔가
나의 문학 자전
나의 삶 나의 시
김욱진
나는 남섬부주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259번지에 본적을 둔 안동 김씨 양졸제파 26대손 종갓집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처녀 공출 바람에 열여섯 어린 나에 가문만 보고 시집온 어머니는 10년 넘도록 손을 잇지 못한 죄스러움에 30리 밖 절까지 밤낮 걸어 다니며 득남 불공을 드렸다. 김용사 나은전에서 3년 불공 끝에 서른이 다 되어서야 어렵사리 나를 낳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따라 절간을 자주 드나들었고, 스님들 말씀을 자연스레 많이 듣고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절집에서 주워 담은 말들이 내겐 참으로 편하게 와 닿는다. 묵언 속에서 오가는 스님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틈틈이 절도 많이 하고 염불도 외고 때로는 참선 흉내도 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시도 때도 없이 묻고 물었다. 되돌아보면, 그게 다 지금의 나의 시 종자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면소재지에 있는 산북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글짓기 반에서 활동한 적 있다. 당시 김정일 선생님(작고하신 김하나 동시인) 지도를 받은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해마다 한 두 번씩 점촌에서 실시하는 문경군 글짓기 대회에 나가곤 했다. 시가 뭔지도 모르는 나는 글짓기는 뒷전이고 짜장면 얻어먹는 재미로 은근슬쩍 따라다녔다. 내가 태어나 짜장면을 최초로 먹어본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어쩌다 나는 ‘감’이라는 동시를 써서 당시 새싹어린이회장 윤석중 선생님으로부터 대통령상을 받은 적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는 그 동시를 기억하지 못하고, 얼룩진 상장만 여태껏 끙끙 보관하고 있다. 그 후, 시는 새까맣게 잊고 살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문학의 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교직 초년 무렵인 2000년 초, 경일여고서 함께 근무한 김상환 시인과의 시절 인연은 남다를 뿐 아니라, 나의 시작 활동의 끈끈한 줄로 지금까지 닿아 있다. 그러고 2003년 ‘도성암 가는 길’ 외 2편의 시가 시문학사 편집인 문덕수 선생님과 당시 서강대 이태동 교수님 그리고 함동선 선생님 세 분의 심사를 받고 등단했다.
나는 시를 통해 삶의 고통을 위로하고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상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며 있는 대로 받아 적었다. 삶이 그렇고 시가 그렇고 나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삶 아닌 삶이 없고, 나 아닌 나가 없고, 시 아닌 시가 없다. '나-일상-시'가 하나다. 시라는 산의 능선은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 그러나 능선을 걸어갈 때 그 마음만은 무심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러면 많은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떠오를 것이다. 시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발견하기 위한 마음의 움직임이 발견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시는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나도 모르게 감추어놓았던 나의 인생의 일들을 다시 찾는데서 시작된다. 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구해야 한다. 그 내부를 위해 외부가 존재할 뿐, 만일 외부만 있으면 종이인형에서 생명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노력이 소질이며, 연습의 양이 질'이라는 말은 시 쓰기에 있어서도 해당된다.
일상의 주고받은 말들을 시답잖게 한참 중얼대다 보면, 쉽고 재미있고 나아가 깊이를 더하는 얘깃거리 하나가 오롯 생겨난다. 이게 나의 시라면 시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수도 없이 속았다. 고것들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없다. 또 나는 나를 찾아 헤맨다. 나는 나에게 속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나의 삶 나의 시는 이것이 전부다. 단출하고 진솔하다.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것, 찾는 순간순간들에 나는 잠시나마 희열감을 맛보며 살고 있는 중이다. 누가 이 말에 귀 기울이겠는가마는, 나의 시의 전생은 절집에서 익힌 시심마의 한 꼬투리인지도 모르겠다. 눈 밝은 자의 눈에는 눌어붙은 업장으로 비춰지겠지만, 이 나에 시의 눈 쪼깨나마 뜬 이 시절 인연에 깊이 감사한다. 나의 시 바탕엔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그놈의 나가 있다. 나는 그를 시라고 부른다. 이제, 시답잖은 그의 말을 한 무더기씩 꺼내 보려 한다.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 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 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안 가고 산 아지매
고운 치매 들었다하이
내 맴이 요로코롬 시리고 아프노
시도 때도 없이 자식 농사가 질이라고 했는데
풍년 드는 해 보자고 그랬는데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전문
이 시는 최근 출간한 시집 『수상한 시국』에 실린 시편이다. 일찍이 각종 문학지나 낭송시로 여러 곳에서 우려먹은 시답잖은 시다. 그런데 오탁번 시인께서 이 시를 읽고 주신 문자에 보면,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고 엄청 편들어 주시었다. 이 말씀 듣자마자 인터넷 잠시 돌아다녀 봤더니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이라는 오 시인의 시 한 편이 눈에 확 띄었다.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시 제목이 하도 거창해서 눈 빠지도록 들여다보았는데, 시답잖다. 이게 신가? 한참을 껄껄 따라 웃다, 나도 모르게 시답잖은 시 술술 받아 적기 시작했다. 눈 버쩍 뜨였다. 그렇다. 시는 그저 있는 대로 보고 듣고 받아 적는 거였다. 힘이 들어가거나 속임수를 쓰면 금세 다 들통나버린다는 걸, 이제야 나는 부끄럽게 깨달았다.
또 하나의 체험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일전 시집 『수상한 시국(2020 시산맥사』을 ○○○ 시인께 보내드렸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이 왔다. 고대로 옮겨본다.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 쓰는 ○○○입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시집 <수상한 시국>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카페 <+-×÷ 방>을 운영하면서
제게 보내주는 시집을 읽고 더러 한두 편, 세 편을
혹은 보내주지 않은 신간시집에서도 골라
두세 편을 '좋은 시 읽기'에 올리고 있습니다.
소개하여 올리는 일은 번거로워도
제 손으로 타이핑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지요.
끝까지 시집 다 읽진 않았지만 대여섯 편 읽어봤습니다.
'노모일기 7'도 읽어봤습니다.
미안하지만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코로나19로 뒤숭숭한 세상
건강 잘 챙기시길 빌며,
내내 건필과 가열찬 정진을 기대합니다.
200.09.24 ○○○ 드림.
이에 나는 하룻밤 몽땅 끙끙거리다, 무시 같은 시 한 편 정중히 답 삼아 보내드렸다.
○○○ 시인께
시를 보내드렸더니
무시를 한 보따리 보내주셨네요.
지난여름 태풍 장마로 올 가을 무시가 금값인데
이렇게 귀한 추석 선물을 보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아무 맛도 없는 무
시의 눈에는 시밖에 보이지 않고
무시 눈에는 무시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
어떤 눈 밝은 시인은 그랬지요.
시절 인연에 맞는 법 설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라고요.
죽은 시인의 사회 굴레에 어정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시인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시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명쾌히 답하신다면
시고, 무시고 다 삼켜버리겠습니다.
오늘 보내드린 무시 같은 시는
시입니까? 무시입니까?
-「무시 같은 시」전문(미발표)
아무쪼록 수상한 이 시국에 건강 유의하시고 잘 지내시길 빌겠습니다.
김욱진 손모음
여기서 나는 또 하나의 나를 보았다. 시답잖은 시와 시다운 시가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가? 시인으로서 고민해봐야 할 화두다. 여기, 지금, 나는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시는 모름지기 이데올로기와 모더니즘, 사실과 은유, 보수와 진보 등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시답잖니, 시답니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시는 일상 속 살아 있는 말 이전의 말을 전하는 방편이다. 한 편의 시가 서정성을 띠든 이념성을 띠든 그 시 속에 삶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시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다. 서정성을 갖는 시만이 수준 놓은 시고, 사실을 늘어놓은 시는 시가 아니다 라는 단순 잣대는 바람직하지 않다. 일상을 바탕으로 한 현상이나 사건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되, 진정성을 지니고 깊이를 더한다면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시가 된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무슨 서정이니 참여니 또는 사실이니, 은유니 하는 형식 논리로 시가 되고 안 되고를 구분 짓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나는 그저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시어로 받아 적었을 뿐이다. 그것들이 오롯 나라는 사유를 통해 걸러졌음을 진솔하게 밝힌다. 이런 견지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음미해보자.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패가망신하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상
한구석엔
패도 패거리도 아닌 부패가 암암리 도사리고 있어
나는 일찌감치 문패조차 내걸지 않았다
-「패」전문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은 길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상에 기반한 시편인지라 쉽고 재미있고 거기다 뭔가를 던져주는 메시지가 분명 있다. 그래서 깊이를 더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패”를 다양하게 우려먹고 있다. 화투판에서 부려먹던 ‘패’를 바둑판으로 끌고 와 ‘꽃놀이패’ ‘패싸움’ ‘팻감’ ‘패가망신’이라는 말놀음으로 신나게 즐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방패막이로 써먹고 돌아다니는 ‘패거리’문화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 ‘패’가 ‘폐’로 돌변했다. 정신 버쩍 들지 않는가. 이처럼 나는 시라는 방편 낯설게 걸머지고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부단히 묻고 물으며 팔부능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지점에서 읊은 시 한 편을 회상하며, 세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한 『참, 조용한 혁명』(2016 시문학사)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거짓과 혼돈이 난무하는 세상, 참
꽃으로 뿌리내린 비슬산
사월의 민심은
아래서부터 위로
붉게 붉게 번져
천심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참, 조용한 혁명이다
-「참, 조용한 혁명」전문
이 시는 짧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지면 곳곳에 실리기도 했고, 대중성을 띠는 시로 널리 알려져 지금도 동대구역 앞 버스정류소에 가면 시화로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비슬산 참꽃을 소재로 한 시편이지만,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 상황이 은근히 오버랩 되는 측면도 있다. 사월의 비슬산은 참꽃 얘기로 온통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 했잖은가. 산 아래서부터 꼭대기로 점점 붉게 붉게 번져가는 참꽃 모습이 흡사 민심을 사로잡은 천심 같다. 그게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힘 아니던가. 참, 조용한 혁명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늘 시끌벅적하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요즘, 우리는 코로나로 일상을 잃었고,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참, 수상한 시국이다. 나의 네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한 『수상한 시국』 연작시 중 ‘수상한 시국·3’을 음미해본다.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마스크 끼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수상한 시국‧3-밥값」전문
이 시편 역시 일상에서 자연스레 받아 적은 대표적인 시다. 밥 먹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며, 나 혼자 코로나 일상을 코믹하게 독백하듯 중얼거리고 있다. 이 속에서 소중한 나를 발견한다. 시인은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조용히 묻고 있다. 짧은 시 한 편 속에서 한평생 고민해야 할 화두를 어렵사리 던져놓고 있다. 이어서 이번 네 번째 시집에서 독자들로부터 가장 주목을 받은 어머니 관련 연작시 중 ‘노모일기·7’을 잠시 눈물겹게 읽어본다.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님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입마개하고 여기 갇혀 있게
이제 난 쑥이나 뜯으러 갈란다, 하시고는
화장실 들어가 온 바짓가랑이에다 똥오줌 술술 다 싸 붙이고서
야, 속이 시원하다 그러시지 뭔가
-「노모일기·7」전문
살아생전 어머니의 일상을 리얼하게 받아 적은 시다. 이 시편은 일본 쿠온출판사에서 한영일중 4개 언어로 출간한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시집 『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에 선정 수록된 시이기도 하다. 연일 코로나로 들끓던 지난 봄 어머니의 사소한 사소하지 않은 일상은 나와 깊숙이 닿아 있다. 이 시편 속에는 생로병사 과정이 한 눈에 다 얼비친다. 여기, 지금, 나의 모습이다. 평소 어머니는 그러셨다. 내 걱정 하지 마라, 너그 잘 지내면 나도 잘 있다. 그러시고는 부처님 오신 그담담날인 지난 5월 2일 나무아미타불 염하며 훌쩍 떠나셨다. 그런 후로 아직 꿈에서도 한번 뵙지 못했다. 끝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처박아둔 시 한 편을 나에게 씁쓸히 보내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길 가다 우연히 헌 책방을 들렀다
삼년 전 출간한 나의 시집
참, 조용한 혁명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온몸에 퀴퀴한 냄새 풍기며
책장 맨 앞줄 한가운데 꽂혀있다
시집살이 삼 년에 피골은 상접하고
명 다할 날 얼마 남지 않았는지
이젠 애비 얼굴조차 몰라본다
그 사이
책방 주인은 시치미 뚝 떼고
이 시집 아직 살아있다며
반값에 사가라고 통사정하는 눈빛이다
시집보내는 날부터 조마조마했었는데
그나저나 이 일을 어쩌나
시집간 딸 친정에 데려다놓으면
소박맞고 왔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 다 날 터인데
-「시집살이」전문(미발표)
(해설)
김욱진 시집 『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
김상환(시인·문학평론가)
김욱진 시인은 최근 네 번째 시집 『수상한 시국』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의 시에는 책의 첫 장을 넘기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재미와 힘이 있다. 일상에서 비롯된 그것은 말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주어지는 알레고리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자아와 타자에 대한 시편의 구성은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평이하지만 곱씹을수록 의미를 더한다. 참나의 문제가 뒷받침된 때문이다. 하여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거울 보는 새」)라는 질문은 시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도 통한다. 종교적이라 하기엔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라 하기엔 종교적인 그의 시는 내 안의 나에 대한 목소리이자 그림자놀이다. 시집의 [표4]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다. “김욱진의 시는 ‘나’를 의두疑頭로 들고 나오면서도 크게 무겁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으며 해학과 기지機智가 넘친다. 경험의 디테일에 기반한 그의 시는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가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이완의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그만의 의도와 행간의 의미 때문이다. 대상을 휘감거나 일거에 메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언롱言弄과 자재自在한 모습은 환력을 넘기고서다. 노모를 잃고 천길 벼랑 끝에 선 시인은 이제 “한겨울 밭모퉁이(에) 엉거주춤 서 있는 바람”처럼, 바람 든 무처럼 무의 마음과 눈을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김욱진의 새 시집 『수상한 시국』에 나타난 다섯 개의 모티프를 중심으로 텍스트 분석을 시도한다.
하나. 씨子
섣달 그믐밤 연탄 한 장 피워놓고
골방에 누워 감 홍시 하나 물컹 삼켰더니
고놈의 씨가 목구멍에 걸려
넘기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다 시가 되어버렸다
것도 모르고 날로 꼴깍 삼킨 시
명치에 딱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고놈의 시를 살려봐야겠다고
용을 쓰고 있는데
새벽녘 안도현 씨가 씨익 웃으며 찾아와
감이 익으면
삼킬 것도 토할 것도 없이
다 시가 된다고 그러지 뭔가
씨가 시가 되는 건 감이라고
죽은 시를 살리는 것도 감
날로 삼킨 시를 푹 삭히는 것도 감
뭣이 죽은 듯 살아 있는 감이라고
설날 아침
제상 맨 앞줄 터줏대감처럼 앉아 절 받는 감
씨가 그랬다
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
씨가 뭔 줄도 모르고 시집와서 그냥 씨 뿌리고 산 것도 감이라고
지방문에 걸렸다, 그게 다 시가 되어
불씨처럼 화끈 달아오르면
감은 요리조리 데치고 볶고 삶고
그걸, 다 우려낸 게 시 아니 씨라고 그러지 뭔가
앗!
ㅡ「씨/시, 앗!」전문
시는 씨앗이다. 씨앗은 밑씨가 발달한 것으로 새순과 줄기와 열매의 처음이다. 이런 생명체의 유기체적 속성과 메카니즘은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충동-어떤 것’은 정서나 관념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ghost’(존 휠록)이거나 ‘배胚’(또는, 胎兒embryo; T.S.엘리엇)에 해당한다. 시의 착상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김욱진이 생각하는 시에 대한 착상은 유다른 데가 있다. 인용시의 시와 씨-씨種·씨氏의 관계 설정이 그러하다. 한해가 끝날 무렵 골방에 누워 먹은 홍시가 그만 문제를 일으킨다. 씨가 목구멍에 걸린 것이다. 문제의 감-씨가 시가 된 것이다. 먹는 감과 느끼는 감感의 언어유희pun이다. 감의 씨와 씨-시의 감을 잇는(“씨가 시가 되는 건 감”) 말의 감각은 특출한 데가 있다. 이러한 감(각)이 죽은 시도 살릴 만큼 중요하지만, 더욱이 중요한 것은 ‘삭힌 말’이다. 충분히 발효시키지 않고 그냥 내뱉는 말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거나 호감을 갖기 어렵다. 후반부에서 씨-시의 상상력은 제의祭儀 또는 가계-족보의 성氏(“너의 고조모는 성주 이씨, 증조모는 장수 황씨, 조모는 인천 채씨”)로 확장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고 마지막 지방문을 불사를 때도 불씨는 씨의 한몫을 차지한다. 죽은 시와 말, 삶을 되살리는 데는 불(씨)만한 게 없다. 그 불로 음식을 요리하고 장만하여 먹고, 마지막 찻잎을 “우려낸” 맛이란? 시는 말과 삶의 씨앗이 자라 한 그루 (감)나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름다운 감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씨앗은 생명의 노래이며, 노래의 생명이다.
두울. 나我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ㅡ「여시아문如是我聞」전문
【주병율의 문학TV】에 소개되어 이렇다 할 화제를 불러 모은 이 시의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점이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앞의「씨/시, 앗!」의 경우처럼 재미있고 유니크하다. 시제로 내세운 ‘여시아문如是我聞’(또는, 아문여시我聞如是, 문여시聞如是. evam mayā śrutam)은 부처님의 말씀을 아난 자신이 이렇게 들었다. 아니,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는 뜻이다. 이는 아난 자신의 의지로 들은 게 아니라, 붓다가 말한 대로 들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체의 소멸로 인한 무아의 경지가 불가에서 말하는 선禪 수행이며, 존재의 들음-들림이다. 시인은 이런 주제와 주제의 깊이에 대해 결코 드라이하거나 무겁게 다가가지 않고 일상의 체험에 기반해 접근한다.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내(나)가 생각해 낸 것은 주변의 무성한 잡초에 대해서다. 잡(초)의 의미는 물론,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대상인가, 하는 점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잡이다(“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잡雜은 곧 화엄華嚴의 세계다. “흙 한 무더기”와 “공기 한 숨”, “햇빛 한 줌”과 “물 한 모금”은 모두 무심無心과 허-공의 주체이고, 타자의 윤리이며, 보살도의 정신이다.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에고ego의 나는 이제 물과 풀, 흙과 공기, 햇빛이 없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그들이야말로 참주인이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더해주는 진리의 주체임을 안다. “우주 한 모퉁이”가 갑자기 환해진다.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수상한 시국·3」).
세엣. 향香
방 한 모퉁이 책상 위엔
한 열흘 전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 한 개 뎅그러니 놓여 있다
낯설이 해서 그런지 얼굴색이 노래지고
주근깨 같은 까만 점도 후벼 파주고 싶을 만큼 생겼다
그 단새 구멍 두어 군데 숭숭 나 있는 흠집
나의 귀지 같은 더께 덕지덕지 앉은 구멍 속 한참 들여다본다
흠집은 암갈색으로 점점이 번지는 중이다
더군다나 몸통은 밀가루 반죽 짓이겨놓은 듯 울퉁불퉁하다
과일 망신 다 시킨다는 그 모과
온몸 쥐어짠 기름 반들반들 내뿜으며 웅숭깊은 향 풍긴다
아, 저 향수 속으로 나를 찾아 나서면
언제쯤 그곳에 가닿을 수 있을까
못생긴 인형처럼 앙증맞은 한 개구쟁이가
내 맘을 온통 다 파먹어 들고 있다
ㅡ「모과에 대한 단상」전문
서시 격에 해당하는 이 시는 대상(“모과”)을 바라보는 시선과, 시상의 디테일한 전개 방식이 돋보인다. 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은 향香과 기氣에 있다. 그 보이지 않는 향-기는 보이는 것에 있다. “고향 집에서 주워 온/ 모과” 하나가 이 시의 중심 모티프라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에서처럼 모과는 “못생긴 인형”이다. “주근깨”와 “귀지”, “흠집” 투성이와 “개구쟁이”에 비견된다. 그러나 암갈색의 모과 구멍에는 알 수 없는, 그윽한 향이 배어 있다. 모과향과 고향의 울림. 낡고 오래된 고향의 “웅숭깊은 향”은 어디서 오는가? 지혜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고향의) 맛을 아는sapere 사람이다. 모과의 외양에 비해 분홍빛의 꽃은 아름답고 순결하다. 흰빛이 섞인 붉은빛의 분홍은 ‘유혹-매혹’이란 꽃말을 뒷받침한다. 모과가 내 마음을 앗아간 데는 (삶의 부정과) 고통을 승화시키는 데 있다. 오시프 만델스탐의 말처럼, 시인은 공기를 훔치는 사람이다. 향이 승화의 다른 말이라면, 그것은 공기의 이미지-상상력이다. 공기의 시학이다. 하여 모과 없는 향, 향이 없는 모과는 이제 상정할 수가 없다. 시인은 푼쿠툼punctum이란 상처, 즉 구멍과 흠집을 통해 양자를 잇는다. 이음의 시인은 시와 모과라는 향을 알고, 음미하는 자이다. 우리는 “언제쯤 그곳에 가 닿을 수 있을까”.
네엣. 경鏡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참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ㅡ「거울 보는 새」전문
대상을 관-찰하는 능력과 말의 운용은 김욱진 시인의 특장에 속한다. 하여 이 시를 읽는 일차적인 즐거움은 말에 있다(“나는 새다/ 나는 새다”, “나는/ 새는”). 말의 재치와 순발력은 물론, 중층적 의미를 통한 리듬의 효과마저 누리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은 적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묻다-보다-돌아가다’의 서술어는 그런 긴장감을 나타내는 사유의 방편이다. 시는 마음의 빛이자 거울이다. 그 거울은 나를 비춘다. 이런 마음의 거울을 매개로 하여 나와 새의 관계를 보자. “거울(이)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보는 새,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는 나. 둘의 대비에서 ‘나’와 ‘새’는 동일성과 차이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 참나가 거울을 직관하는 참새의 모습이라면, 새는 우리가 잡거나 알려고 하면 이미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없다. 그 허공은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사이 존재다. 〔참-새-거울-시〕의 등가 관계에서 ‘새’의 고어古語는 ‘해’에 있다. 새와 해는 모두 빛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빛은 내 안의 나를 거울처럼 비춘다. 모든 분리된 것을 이어주고 감춰진 것을 드러나게 한다. 허공 속으로 새는 돌아간다. 사라져간다. “인류는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한 종이며, 어쩌면 사라짐의 예술이다”(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거울과 새, 그리고 나와 시는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섯. 병病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님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입마개하고 여기 갇혀 있게
이제 난 쑥이나 뜯으러 갈란다, 하시고는
화장실 들어가 온 바짓가랑이에다 똥오줌 술술 다 싸 붙이고서
야, 속이 시원하다 그러시지 뭔가
ㅡ「노모일기·7」전문
생전 어머니와의 대화와 ‘코로나19’의 현실이 뒷받침된 이 시는 내러티브의 기법에다 방언의 활용, 경험의 구체성으로 인해 실감이 난다. 배경은 비슬산 기슭의 양동 마을이다. ‘기슭’과 ‘양동’이란 말에는 음-양의 새로움과 깊이가 있다. 유기체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된 상태를 병이라 한다면, 어머니는 벌써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한다. 게다가 전국은 지금 코로나19로 비상이 걸린 상태다. 하지만 그 무서운 코로나도 어머니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그 순간, 어머니의 일성ㅡ“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은 그늘이 볕이 된 형국이다. 배설이다. 카타르시스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본래 의학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불쾌한 정서인 공포와 연민을 제거하여 정신적 정화 작용을 가져옴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병 ‘녁疒’자는 침대 위에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이고, 영어의 병disease은 ‘안락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즉, 쾌가 아닌 불쾌의 감정이다. 이 시에서 유일한 희망의 분위기와 정서를 나타내는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라는 구절도, 실은 불쾌의 기분을 고조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한다.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은 어머니의 병도 의사는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고 한다. 쑥의 비밀이다. ‘기슭-양동’의 마을에서 벌어진 불가해한 일이다.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같은 인간 실존에게 병이란 무엇인가, 왜 병인가? 이는 곧 시란 무엇인가, 왜 시인가, 하는 문제와 맞닥뜨려진다. 생은 병이다(“생병”). 누가 이 고통과 이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는 그 고통의 승화, 이별이라는 만남이다. 묘약이다.
김욱진은 “시답잖은” (『수상한 시국』자서」) 시인을 자처하고 나선다. 이 경우 ‘시답잖은’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이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발견과 깊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말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접근으로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언어와 가치에 무게를 두는 그의 언어에는 무엇보다 대지와 사회 현실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궁극에는 ‘지금-여기’와 ‘(참)나는 누구인가’ 라는 실존과 성찰의 문제에 닿아 있다. 불교에 남다른 관심과 조예가 있는 그는 일상과 시, 시와 나가 더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누구든 무엇이든 그의 시답잖은 언어의 포충망에 걸려들기만 하면 여지없이 해체되어 재구축된다. 그것은 시적 진리와 숨은 실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런 점에서 김욱진의 이번 새 시집은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약력
1981년 8월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시)으로 등단/시집 『영혼의 닻』/1993년 여름호 《문화비평》에
「한 내면주의자에 대한 비망록적 글쓰기-이가림론」을 발표함으로써 비평활동 시작/대구과정사상 연구소에서 활동 중.
첫댓글
선생님의 귀한작품
만나고
공부하며
오래오래 머물다갑니다
감사드리며
축하드립니다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