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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오온을 위주로 한 가르침 (Khandha-vagga)
제22주제 무더기(존재의 다발)[蘊] 상윳따 제6장 속박 품
무아의 특징 경(S22:59)
Anattalakkhaṇ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오비구를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다(내가 아니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나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은 무아이기 때문에(나가 아니기 때문에) 물질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무아다(내가 아니다). 만일 느낌이 자아라면(나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느낌에 대해서 ‘나의 느낌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느낌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느낌은 무아이기 때문에(나가 아니기 때문에) 느낌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느낌에 대해서 ‘나의 느낌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느낌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인식은 무아다(내가 아니다). 만일 인식이 자아라면(나라면) 이 인식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에 대해서 ‘나의 인식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인식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인식은 무아이기 때문에(나가 아니기 때문에) 인식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인식에 대해서 ‘나의 인식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인식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형성은 무아다(내가 아니다). 만일 형성이 자아라면(나라면) 이 형성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형성에 대해서 ‘나의 형성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형성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형성은 무아이기 때문에(나가 아니기 때문에) 형성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형성에 대해서 ‘나의 형성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형성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의식은 무아다(내가 아니다). 만일 의식이 자아라면(나라면) 이 의식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나의 의식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의식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의식은 무아이기 때문에(나가 아니기 때문에) 의식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나의 의식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의식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4.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형성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5.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건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건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건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형성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건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열등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지혜)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의식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6.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인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7.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비구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얼한 상세한 설명[授記]이 설해졌을 때 오비구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Saṃyutta Nikāya 22
6. Upayavagga
59. Anattalakkhaṇasutta
Ekaṃ samayaṃ bhagavā bārāṇasiyaṃ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Rūpaṃ,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ṃ anattā, tasmā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ati, na ca labbhati 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Vedanā anattā. Vedanā 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vedanā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vedanāya: ‘evaṃ me vedanā hotu, evaṃ me vedanā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vedanā anattā, tasmā vedanā ābādhāya saṃvattati, na ca labbhati vedanāya: ‘evaṃ me vedanā hotu, evaṃ me vedanā mā ahosī’ti.
Saññā anattā … pe … saṅkhārā anattā. Saṅkhārā 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ṃsu, nayidaṃ saṅkhārā ābādhāya saṃvatteyyuṃ, labbhetha ca saṅkhāresu: ‘evaṃ me saṅkhārā hontu, evaṃ me saṅkhārā mā ahesun’ti. Yasmā ca kho, bhikkhave, saṅkhārā anattā, tasmā saṅkhārā ābādhāya saṃvattanti, na ca labbhati saṅkhāresu: ‘evaṃ me saṅkhārā hontu, evaṃ me saṅkhārā mā ahesun’ti.
Viññāṇaṃ anattā. Viññāṇañ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viññāṇaṃ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viññāṇe: ‘evaṃ me viññāṇaṃ hotu, evaṃ me viññāṇaṃ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viññāṇaṃ anattā, tasmā viññāṇaṃ ābādhāya saṃvattati, na ca labbhati viññāṇe: ‘evaṃ me viññāṇaṃ hotu, evaṃ me viññāṇaṃ mā ahosī’ti.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rūp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Vedanā … saññā … saṅkhārā … viññāṇ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a, bhikkhave,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Yā kāci vedanā atītānāgatapaccuppannā ajjhattā vā bahiddhā vā … pe … yā dūre santike vā, sabbā vedanā: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Yā kāci saññā … pe … ye keci saṅkhārā atītānāgatapaccuppannā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 pe … ye dūre santike vā, sabbe saṅkhārā: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Yaṃ kiñci viññāṇ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ṃ.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pañcavaggiy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Saṃyutta Nikāya 22
Connected Discourses on the Aggregates
59. The Characteristic of Nonself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t Baraṇasi in the Deer Park at Isipatana. There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bhikkhus of the group of five thus: “Bhikkhus!”
“Venerable sir!” those bhikkhus replied. The Blessed One said this:
“Bhikkhus, form is nonself. For if, bhikkhus, form were self, this form would not lead to affliction, and it would be possible to have it of form: ‘Let my form be thus; let my form not be thus.’ But because form is nonself, form leads to affliction, and it is not possible to have it of form: ‘Let my form be thus; let my form not be thus.’
“Feeling is nonself…. … Perception is nonself…. Volitional formations are nonself…. Consciousness is nonself. For if, bhikkhus, consciousness were self, this consciousness would not lead to affliction, and it would be possible to have it of consciousness: ‘Let my consciousness be thus; let my consciousness not be thus.’ But because consciousness is nonself, consciousness leads to affliction, and it is not possible to have it of consciousness: ‘Let my consciousness be thus; let my consciousness not be thus.’
“What do you think, bhikkhus, is form permanent or impermanent?”—“Impermanent, venerable sir.”—“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or happiness?”—“Suffering, venerable sir.”—“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and subject to change fit to be regarded thus: ‘This is mine, this I am, this is my self’?”—“No, venerable sir.”
“Is feeling permanent or impermanent?… Is perception permanent or impermanent?… Are volitional formations permanent or impermanent?… Is consciousness permanent or impermanent?”—“Impermanent, venerable sir.”—“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or happiness?”— “Suffering, venerable sir.”—“Is what is impermanent, suffering, and subject to change fit to be regarded thus: ‘This is mine, this I am, this is my self’?”—“No, venerable sir.”
“Therefore, bhikkhus, any kind of form whatsoever, whether past, future, or present, internal or external, gross or subtle, inferior or superior, far or near, all form should be seen as it really is with correct wisdom thus: ‘This is not mine, this I am not, this is not my self.’
“Any kind of feeling whatsoever … Any kind of perception whatsoever … Any kind of volitional formations whatsoever … Any kind of consciousness whatsoever, whether past, future, or present, internal or external, gross or subtle, inferior or superior, far or near, all consciousness should be seen as it really is with correct wisdom thus: ‘This is not mine, this I am not, this is not my self.’
“Seeing thus, bhikkhus, the instructed noble disciple experiences revulsion towards form, revulsion towards feeling, revulsion towards perception, revulsion towards volitional formations, revulsion towards consciousness. Experiencing revulsion, he becomes dispassionate. Through dispassion his mind is liberated. When it is liberated there comes the knowledge: ‘It’s liberated.’ He understands: ‘Destroyed is birth,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
That is what the Blessed One said. Elated, those bhikkhus delighted in the Blessed One’s statement. And while this discourse was being spoken, the minds of the bhikkhus of the group of five were liberated from the taints by nonclinging.
잡아함경 제3권
75. 관경(觀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5수음이 있으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이른바 색수음 등이니라. 비구들아, 색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고, 일으키지 않고, 해탈하면 이런 이를 여래(如來)·응공[應]·등정각(等正覺)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고, 일으키지 않고, 해탈하면 이런 이를 여래·응공·등정각이라 하느니라.
비구 또한 색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면 이런 이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라 하며, 이와 같이 수·상·행·식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면 이런 이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아, 여래·응공·등정각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법의 근본이요, 법의 눈이며, 법의 의지처이십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소서. 모든 비구들은 그것을 듣고 마땅히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여래·응공·등정각은 일찍이 법을 듣지 못하고도 능히 스스로 법을 깨달아 위없는 보리를 통달하고, 미래 세상에서 성문들을 깨우쳐 설법하나니, 그 법은 이른바 4념처(念處)·4정근(正勤)·4여의족(如意足)·5근(根)·5력(力)·7각(覺 ; 覺支)·8도(道 : 正道)이다.
비구들아, 이런 이를 여래·응공·등정각이라 하나니, 그는 다른 이가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다른 이가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롭게 하며, 도를 알고 도를 분별하며, 도를 설명하고 도를 통달하며, 다시 능히 모든 성문들을 성취하여 가르치고 훈계하느니라. 아라한은 이러한 말씀에 바르게 순종하고 그 훌륭한 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이것이 여래와 나한(羅漢 ; 阿羅漢)의 차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雜阿含經
SA 75 (七五) 觀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告諸比丘:「有五受陰。何等為五?謂色受陰,比丘於色厭、離欲、滅、不起、解脫,是名如來、應、等正覺;如是受、想、行、識,厭、離欲、滅、不起、解脫,是名如來、應、等正覺。比丘亦於色厭、離欲、滅,名阿羅漢慧解脫;如是受、想、行、識,厭、離欲、滅,名阿羅漢慧解脫。比丘!如來、應、等正覺,阿羅漢慧解脫,有何差別?」
比丘白佛:「如來為法根、為法眼、為法依,唯願世尊為諸比丘廣說此義,諸比丘聞已,當受奉行。」
佛告比丘:「諦聽,善思,當為汝說。如來、應、等正覺未曾聞法,能自覺法,通達無上菩提,於未來世開覺聲聞而為說法,謂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八道。比丘!是名如來、應、等正覺未得而得,未利而利,知道、分別道、說道、通道,復能成就諸聲聞教授教誡;如是說正順欣樂善法,是名如來、羅漢差別。」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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