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
김진열
여자의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는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능력 밖으로 넓다 몸 풀기 동작에 고양이자세까지 끝냈다 여자가 쁠리레를 할 때 세탁기는 삐삐삐 세탁이 끝났음을 알린다 집을 떠났을 때가 가장 명랑하다는 남자*가 세탁물을 바구니로 옮긴다 거실에서의 동작은 바뀌어 드미 쁠리레로 이어진다 팔을 집어넣고 빨래를 꺼내던 남자, 윽 소리를 내며 놀란다 여자의 하얀 팬티가 진한 회색으로 변했다
흰 빨래는 희게 해야 한다던 말에, 받았던 상처가 아직 딱지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얼핏 돌아보니 발끝을 바닥에서 끌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펴고 밀어내고 있다 바뜨망 탄듀라고 했던가 불현듯 흰 빨래와 검은 빨래의 구분이 잘못되었을 때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동작을 연상시킨다 큰 숨을 내쉬며 여자의 가위질에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색깔이 바뀐 팬티를 쓰다듬는다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서 설치한 거실의 바 위에 다리를 올린다 입 꼬리를 올려가며 여자의 눈이 노려보는 발끝에 회색 팬티가 걸리는 상상, 남자의 심장이 빨리 뛴다 세탁실에서 빨래를 꺼내던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 챈 여자의 침묵은 연기다 입 꼬리 더욱 올라가고, 고통은 지그시 누리는 환희로, 뜨겁게 쏟아지는 머릿속 박수를 들으며 백조의 잔걸음이 이어진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남은 빨래를 꺼낸다 빨래 바구니는 팔을 굵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소리 없이 소파에 앉는다 호두까기 인형 음악이 흐르고 눈을 감는다 좀 전에 여자의 티셔츠를 툭툭 털어서 널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한 환상적인 안무였다 일주일 동안 입었던 자신의 팬티 6장을 연거푸 널었던 것은 여자와 보조를 맞춘 발레리노의 턴을 위한 기초였다 그 동작 속에 떠오르는 알라스꽁을 거실에서 꿰면, 몽환적인 스토리는 완성되는가 여자는 빠세 를르베를 연습한 뒤 도도하게 서서 땀을 닦는다
남자의 시선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행복이 빵처럼 부푼다
*세익스피어의 말
----김진열 시집,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에서
김진열 시인의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의 시적 화자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진행자이자 관찰자이며, 그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판단하는 심판관이고, 발레하는 여자는 여자 주인공으로, 빨래하는 남자는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회적 신분이 전도된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시적 화자는 박학다식하며, 여자와 남자의 신분의 차이와 그 대립과 갈등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전지적 관점을 유지하며,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를 극적인 이야기로 이끌어 나간다.
여자의 아버지가 사준 아파트는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능력 밖으로 넓고, 이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 의해서 ‘남녀의 관계’과 ‘녀남의 관계’로 전도된다. “몸 풀기 동작에 고양이자세까지 끝냈다 여자가 쁠리레를 할 때 세탁기는 삐삐삐 세탁이 끝났음을 알린다 집을 떠났을 때가 가장 명랑하다는 남자가 세탁물을 바구니로 옮긴다.” 여자의 동작은 바뀌어 드미 쁠리레로 이어지고, 팔을 집어넣고 빨래를 꺼내던 남자가 단말마의 비명처럼 ‘윽 소리’를 내며 놀란다. 왜냐하면 여자의 하얀 팬티가 진한 회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며, 이 과오에는 심리적인 트라우마가 진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흰 빨래는 희게 해야 한다는 말은 여자의 체벌이 되고, 그 결과, 그가 입었던 상처에는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얼핏 돌아보니, 여자는 ‘바뜨망 탄듀’, 즉, “발끝을 바닥에서 끌어 한 쪽 다리의 무릎을 펴고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동작마저도 흰 빨래와 검은 빨래의 구분이 잘못되었을 때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동작을 연상시키게 되었다. 이 역전된 신분의 질서 속에서, “여자의 가위질에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색깔이 바뀐 팬티를 쓰다”듬으며, 거세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돈이 상전이고, 돈이 구세주이며, 여자는 돈의 화신이다. 여자는 예술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지만, 남자는 노동을 하고, 언제, 어느 때나 여자의 눈치를 보며 폭행을 당한다.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서 설치한 거실의 바 위에 여자가 다리를 올릴 때, 여자의 발 끝에 회색 팬티가 걸리는 상상만 해도 남자의 심장은 매우 빨리 뛴다. 입 꼬리가 올라간 여자의 눈은 살모사의 눈빛과도 같으며, 신체적 폭력과 심리적인 외상과 거세공포의 총체와도 같으며, 남자의 삶의 의지가 크나큰 장애를 만난 것과도 같다. 여자는 언제, 어느 때나 진실한 사람이고 옳은 일만을 하지만, 남자는 언제, 어느 때나 거짓말을 하고, 입에 발린 변명과 실수만을 연발한다. 남자의 실수를 눈치 챈 여자의 침묵은 연기이고, 그 결과, 입 꼬리는 더욱더 올라가면서도 수많은 대중들의 찬사와 박수를 받으며, 백조의 여왕과도 같은 자세를 취한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빨래를 꺼내고, 빨래 바구니는 팔을 굵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소리 없이 소파에 주저앉는다. 아니, 남자는 소리없이 소파에 주저앉아 흐느낀다. 호두까기 인형 음악이 흐르고, “좀 전에 여자의 티셔츠를 툭툭 털어서 널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한 환상적인 안무”였고, “일주일 동안 입었던 자신의 팬티 6장을 연거푸 널었던 것은 여자와 보조를 맞춘 발레리노의 턴을 위한 기초였다.” “그 동작 속에 떠오르는 알라스꽁을 거실에서 꿰면, 몽환적인 스토리는 완성되는가, 여자는 빠세 를르베를 연습한 뒤 도도하게 서서 땀을 닦는다.” “남자의 시선이 가슴속으로 들어와 행복이 빵처럼 부푼다.”
여자는 예술(발레)을 위해 살고 예술을 위해 죽으며, 순수예술을 위해서는 남자(남편)를 개같이 학대하는 것은 물론, 이혼까지도 불사할 태세다.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돈이며, 돈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대중들의 찬사와 박수를 받는 백조의 여왕을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남자는 돈이 없기 때문에, 그날 그날이 그날 그날인 평범한 회사원에 지나지 않으며, 아내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집 바깥에서 자그만 명랑함을 향유할 수가 있다. 누가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누가 순수예술을 하고, 누가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말하는가? 언제, 어느 때나 최종심급은 돈이며, 돈을 가진 자가 순수예술을 하고,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말하고, 그의 하나님과도 같은 은총에 의해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
발레하는 여자는 부의 세습에 의해서 순수예술을 하고, 만인들의 연인이자 우상을 꿈꾸지만, 빨래하는 남자는 기껏해야 빵 몇 조각의 최하 천민의 생활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까지도 팔아버린다. 빨래하는 남자는 씨받이이며, 성적 욕망의 도구이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하인에 불과하다. 김진열 시인의 [발레하는 여자 빨래하는 남자]는 돈에 의해서 남녀의 관계가 역전되고, 돈 많은 여자는 순수예술을, 돈 없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몸과 영혼을 팔아버리고 끊임없는 착취와 학대와 육체노동에 시달리게 된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술은 사치의 아이들(패륜아들)이고, 모든 사회적 천민들은 이 사치의 아이들의 행패에 시달린다. 인생이 예술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타락이 생겨난다. 순수예술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폭력에 기초해 있고, 이 폭력을 행사할 때만이 ‘잔인성의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난다. 모든 식물들, 모든 곤충들, 모든 동물들까지도 폭력적인 서열제도를 이루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예술을 위해 복무하고,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예술은 ‘잔인성의 아름다움이다’라고, 김진열 시인은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