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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서적 다시 읽기] 십자성호
십자성호는 ‘내 몸에 새기는 가장 짧은 구원의 손짓’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의 시작과 끝을 십자성호로 한다. 교회 안에서 십자성호 없이 시작되거나, 진행되거나, 완성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교회의 많은 예절과 축복에서 사용되며, 미사 안에서도 여러 번 사용된다. 특히 이 십자성호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식사나 중대한 일을 하는 전후에, 위험이나 유혹이 있을 때 사용한다. 또한 미사와 강복 등 우리가 축복을 받게 될 때 긋게 된다. 신자라면 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두는 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호경이란?
한마디로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도이다. 하느님과 사람이 이어진 상태를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은 ‘천상의 구원, 지상의 구원, 사람의 구원’으로 나눈다. ‘천상의 구원’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내려주시는 영원한 구원을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다. ‘지상의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며 자신이 천상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내면에 평온과 환희가 가득 차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예수님이 내려주시는 구원이자 우리가 신앙을 통해 얻는 구원이다. ‘사람의 구원’이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세상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는 것을 일컫는다.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의 구원’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의 권능을 믿도록 만드는 것, 즉 ‘천상의 구원’을 깨달아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함으로써 ‘지상의 구원’을 맛보게 하려는 것이다.
2. 성호경의 특징
첫째,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성호경은 보편적이고 본질적이며 완전한 기도이다. 둘째, 단순함에 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살아갈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기도이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한 다음 나머지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위대한 분께 맡길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 십자성호를 긋는다. 화살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주님, 도와주세요.” 등 괴로울 때나 두려울 때 특히 효과적이다. 셋째, 말뿐 아니라 몸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도이다.
3. 십자성호를 긋는 방법(상, 하, 좌, 우 순서로)
“성부와”를 읊으면서 오른손 손가락 끝으로 이마나 미간을 살짝 찍는다. “성자와”에 맞춰서 손가락 끝으로 배꼽이나 명치 언저리를 찍는다. “성령의”에서 왼쪽 어깨를 찍고 “이름으로”에 오른쪽 어깨를 찍는다. “아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오른쪽 엄지를 왼쪽 엄지 위로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이럴 때 십자성호를 긋자.
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을 때(평생 기념할만한 특별한 날) ② 기도의 시작과 끝에 덧붙일 때(삼종기도 등) ③ 미사를 드릴 때(성호경으로 시작과 끝을 알림) ④ 성당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성체조배 등) ⑤ 아침에 일어날 때와 잠자리에 들 때(하루의 시작과 끝에) ⑥ 식사할 때(생명을 주심에 감사하는 기도) ⑦ 차를 탈 때(시동-안전띠-십자성호-출발) ⑧ 일할 때(일이 있음에 감사와 끝까지 완수할 수 있기를) ⑨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은총의 도움을) ⑩ 감동했을 때(감동할 수 있음에 감사) ⑪ 마음을 다 잡았을 때(자신감을 위하여) ⑫ 병에 걸렸을 때(이길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하여) ⑬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할 때(치유력을 위해) ⑭ 죽음을 앞두었을 때(사람은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죽고 부활한다)
5. 십자성호 · 성호경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성부와 - 사랑으로 자녀를 낳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은 완전성, 영원성, 초월성을 나타낸다. 성자와 - 사랑으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자유의지와 영혼이라는 당신의 본성을 나누어 주실 정도로 사랑해서 만든 아주 특별한 자녀. 성령의 - 부모와 자녀를 잇는 사랑(성聖 - 하느님의 거룩한 성질, 령靈 -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그 활동). 성호경 -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이 기도는 역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현실을 하나로 연결하며 참된 구원을 가져다준다. 천상의 구원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 지상의 구원은 신앙으로 얻는 것이다.
* 십자성호 : 세로로 긋는 선(은총의 선) -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선.
가로로 긋는 선(보편의 선) - 땅에 있는 모든 사물을 연결하는 선이다.
* 보편적인 현실인 가로축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믿으며 자발적인 신앙의 힘으로 세로축인 은총의 선을 그을 때 하느님의 자녀가 자각하는 순간이자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나’란 존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6. 십자성호 긋기를 생활화하자.
십자성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상기하는 것이고, 천주교 신자임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됨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 시대, 막막한 현실 속에서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나 현세의 구원은 물질적, 상대적,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여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므로 보다 영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호경이 바로 그러하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사랑에 안겨 안심하게 되는 구원,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란 희망으로 가득 찬 구원이다. 십자성호는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통해 이미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표지이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매번 3년의 대사(大赦)가 있으며 성수를 찍어서 그을 때는 7년의 대사가 있게 된다. 성호경은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기도임을 명심하고 성호경 바치기를 생활화하자. - 하레사쿠 마시히데 지음|서은정 옮김|가톨릭출판사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프리마돈나로 활동한 김청자 씨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책의 전편에서 흐르는 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였다는 걸 느끼게 한다. 여는 말에서도 삶에서의 선택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 대부분임을 깨닫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항상 최상의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난 이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고, 가장 많이 받은 자가 가장 많이 나누어야 하는 하늘나라의 법칙에 따라 아프리카로 가는 것을 선택하였는데, 그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라 했다. 완전한 신뢰, 그래서 복을 주시나 보다. 그 사례들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하나, 어머니의 선물 : 어머니를 통해서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인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신부님이 우리를 위해 강당 한 구석을 내주신 덕택으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고 서울에서 독학하고 독일에서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실력을 쌓았다.
둘, 독일로! :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의 직업학교(간호사)를 선택하였고, 기숙사 환영파티에서 노래를 불렀고, 수녀님의 도움으로 병원의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유학의 기회를 기다렸다.
셋,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온다. :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 입학하여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며 베른 오페라극장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스물여섯에 한국인 최초로 유럽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바라던 음악공부를 끝내고 오페라 가수로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넷, 두 번째 내려놓음 : 첫 내려놓음은 가정을 돌보려고 프리마돈나의 꿈을 접고 귀국한 일이고, 전임강사로 중앙대에서 가르쳤고, 그 후 연세대로 옮겨 열정과 사랑을 쏟았다. 그 후 독일로 여행을 갔다가 카를스루 국립오페라 극장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가족들의 살 거처를 마련해 주고….
다섯, 이혼 그리고 새로운 삶 : 첫 결혼, 두 번째 결혼, 그리고 이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초빙교수의 제안을 수용한다. 아들을 데려와 한국에서 공부를 시키고 고등학교 과정을 위해 독일로 보낸다. 아들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나는 엄마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고, 일생을 함께할 색소폰을 배웠어요. 감사해요.”라고 쓰여 있었다.
여섯, 메주고리예의 기적 : 이혼의 상처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메주고리예에 가서 은총을 받았다. “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하고 그들을 외롭게 했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인 여자가 아닐까를 생각했었다. 울면서 통회하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삶,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소유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허영심을 버리리라.”고 결심을 굳힌다.
일곱, 저를 보내십시오. : 예순 살. 케이프타운에 들렀다가 미사에서 성작을 봉헌하게 되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라는 독서의 그 말씀이 가슴에 꽂혔다. 그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탐부 병원을 위해 침대 100개를 봉헌하고, 종합예술학교를 떠나 아프리카 행을 준비한다.
여덟, 루수빌로에서 음악부를 개설하고 : 카롱가 지역에서 유스센터를 운영하면서 음악부를 개설하고 크리스마스 연주회를 열다. 지인의 1억 지원으로 뮤직센터를 짓고 7개월 후에 완성한다. 그리고 1년에 20만 원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중퇴한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계속하게 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지원계획을 세운다.
아홉, 사랑의 열매를 맺다. : 치부쿠 콩쿠르에서 루수빌로 밴드가 1등을 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나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처음 출전한 콩쿠르에서 1등을 하였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니 그분이 하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루었다.
열, 말라위의 전국 순회공연 : 필립(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람), 림바니(할머니 밑에서 자람)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입학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사랑을 카롱가 아이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스쿨버스의 꿈이 이루어지고 전국순회공연에 나선다. 노래하고, 나팔 불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고, 공을 차는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이 생명 다 하도록 나를 내어줄 것이다.
열하나, 지금, 바로 이 순간 : 아프리카에 살면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후회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안 하면 언제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아주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열둘, 생명의 우물 : 우리는 물의 귀함을 모르고 살아왔다. 카롱가에는 말라위 호숫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죽음에 이르는 함정이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우물 12개를 파고(개당 천만 원 정도), 모잠비크에서도 10개의 우물을 파 주었다.
책을 덮으며 : 김청자 씨는 어린 시절, 청소년기를 살아온 한국이 육체적 고향이고, 역경과 전문적인 지식을 공급받은 독일은 정신의 고향이고, 영혼의 세대를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다. 그의 삶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사랑을 향하여 살아온 삶’이다. 하느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 즉 믿음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하느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용기를 잃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키팜바의 추장은 김청자 씨에게 ‘루세케로 마키팜바’(마키팜바의 행복)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기숙사와 미션센터를 지을 땅도 기증해주었다. 지금까지 12개의 우물을 팠지만 더 많은 우물을 파고 더 많은 학교를 지어주고 싶고, 더 많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갈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고 싶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른 도시에서 음악을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을 위하여 기숙사도 짓고 싶다. ‘미션-와서 보아라’ 센터도 지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길 꿈꾼다.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이 길을 함께 걸어주시는 좋은 분들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셨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이들과 함께 하려한다. 그리고 영혼이 이곳에서 영원한 쉼을 얻는 그날까지 하느님께는 감사와 영광을 드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한다. 유럽 오페라 무대에 선 성악가 김청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 아프리카에서 마침내 찾은 평화와 사랑의 길임을 보여준다. 가슴이 따뜻하다. - 《프리마돈나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김청자 지음|바오로딸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주름을 지우지 마라
『주름을 지우지 마라』는 늙음, 노인, 행복한 늙음 등 8개의 장으로 쓰여졌다. 늙으신 부모님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넘어, 늙음을 통해 부모님이 사랑임을, 늙음의 경지를 통해 인간이 완성됨을 새롭게 체험했음을 얘기한다. 노인의 얼굴에 핀 주름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깨우쳐 주기에 성형으로 주름을 지우는 것은 자기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 사회가 잘 먹고 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면서 가난과 늙음, 그리고 죽음이 주는 의미를 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소외시킴에 문제를 제기한다. 각 장마다 마음에 담은 생각들을 간단히 소개하고 4, 5장을 중심으로 소감과 함께 적는다.
1장 늙음, 하느님의 선물 : 늙음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최고의 창조물로 영원을 느끼게 하는 선물이다. 늙음은 축복이며 늙음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인생은 아름답게 완성된다. 노인은 연륜만으로도 인류의 스승이다.
2장 늙음, 하느님의 창조물 : 행복은 부, 명예, 권력, 장수에 대한 욕심을 비운데서 온다.
3장 늙음에 대한 예의 : 늙음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죽음은 축복이요 선물이지만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는 시간의 멈춤이고 인생의 끝이다.
4장 노년의 여유와 자유 : 청소년이 미래인 사회에서 청소년은 노인에게서 미래를 본다. 노인의 노쇠함과 느린 동작에 배어있는 기다림과 참을성과 희생심, 거기서 발산되는 인자함과 관용과 여유는 젊은이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쌓아야 할 덕목이다. 노인이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은 지나온 삶의 흔적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의 표지다. 그의 주름살은 젊은이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병도 고통도 늙음도 죽음도 인생을 완성하는 과정임을 안다. 이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노년의 영성은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지향한다. 행여 늙음이 추하다고 주름살을 없애고 외모만 가꾼다면 오히려 마음이 까칠해질 수 있다. 따라서 늙음을 즐기는 여유를 익혀야 한다. 노인은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힘도, 분노할 수 있는 힘도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는 존재다. 백십 년을 산 요셉의 일생은 용서와 자비를 몸에 익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할 때마다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에 대해 자비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5장 노인의 얼굴 : 사람의 마음은 그의 얼굴을 좋게 또는 나쁘게도 바꿔 놓는다. 행복에 싸인 마음의 기운은 밝은 얼굴에 나타난다.(집회 13,25-26) 아내의 방에는 4절 크기의 ‘두 손을 모으고 기도’ 하는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하느님, 저를 몽당연필처럼 써 주세요. 깎고 깎아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 몽당연필이 된 마더 데레사 중에서.” 데레사 성녀의 얼굴과 손에 많은 주름이 잡혀 있는 사진이다. 죽어가는 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성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저 깊은 주름 사이사이에서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는 게 아닐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얼굴은 아무리 늙고 주름투성이라 하더라도 참 평화롭다. 꾸밈이 없고 단순하며 그의 눈길은 인자하다. 얼굴과 손에 주름살이 깊게 패이도록 자비를 몸에 익혔으니 그의 품은 누구나 안길 수 있게 포근함을 주는가 보다. 어느 행려병자가 “저는 길거리에서 동물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사처럼 죽게 되었습니다. 웃으면서 죽을 것입니다.”라며 성녀 곁에서 미소를 머금고 죽어갔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자식들로부터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현금’이라고 한다. 돈이 있어야 건강하고 품위있게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사고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도, 사회에 동참하기도 어려운 풍토가 되면서 재물과 명예와 권력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일희일비하는 삶을 산다.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욕망을 비우고 생사에 대한 애착을 비워야 한다. 다 비워 맑고 밝은 마음이 되면 더 이상 두려워 할 것도 안타까워 할 것도 없는 자유의 경지에 이른다. 코헬렛에서 영화 속에 산 임금이 “허무로다, 허무!”하고 외친다는 것은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비워야 한다는 충고이다. 장수 하는 것, 건강한 것, 늙지 않고 젊게 사는 것, 돈과 명예와 권력을 쌓아 부를 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부요 행복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늙어보니 그게 아니다. 그것은 허무였다. 너희는 인생을 허무하게 살지 마라. 집착 대신 비우고 나누며 그 안에 감추어진 가치를 발견하여 인생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의 영성은 동정의 영성에서 빛을 발한다고 한다. 동정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다 비워 텅 빈 상태를 말한다. 노인은 인생을 살면서 욕심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고 동정의 알몸이 되어가는 인생의 마지막 과정에 이른 인간이다. 어린 아이의 얼굴은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고 목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18,3) 이는 나이가 들수록 순수한 어린이로 돌아가야 한다는 명령이며 어린아이의 순수성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종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 비로소 인간이 됨을 가르친다.
6장 노인과 유산 : 늙는 것은 베풀면서 인생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고, 자기가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면서 즐거움을 얻는 여정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지혜를 터득하란다.
7장 늙음과 죽음과 부활 : 부활의 삶은 씨앗의 생명에 비유된다. 씨앗의 운명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생도 죽음을 통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원리다. 결국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가?
8장 행복한 늙음 : 행복은 모든 것, 늙음과 죽음까지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살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임을 깨친다. 누구의 인생에도 젊음과 늙음, 어른과 아이, 생과 사가 만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축복이요 사랑해야 할 것들이다. 늙음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신비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사람만이 인생이 아름답다고, 인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을까? -『주름을 지우지 마라』 / 이제민 신부 지음 / 바오로딸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김수환 추기경, 하느님과 함께 5분
《김수환 추기경, 하느님과 함께 5분》은 ‘말씀의 씨앗’ 시리즈 중의 한 권이다. ‘말씀의 씨앗’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주요 영성가와 사목자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마르티니 추기경, 오상의 비오 신부, 마더 데레사 수녀, 김수환 추기경 등의 성경묵상과 말씀을 담은 책들이다. ‘하느님과 함께 5분’은 김 추기경님이 많은 이들과 다양한 곳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주제별로 엮어져 있다. 김 추기경님은 선종하신 지 6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장례식 모습들이 선하게 떠오른다. 김 추기경님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명동대성당을 찾은 일반 시민들이 시내 도로를 따라 4km까지 이어진 조문행렬! 운구차가 천주교 묘소로 향할 때 수십만의 인파가 연도에서 몰래 눈물을 흘리는 모습들! 가톨릭 사제로서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사랑의 손길을 보내고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으며 선종하는 순간에도 안구까지 기증하고 철저하게 빈손으로 떠나신 추기경님의 모습! 아마도 그런 모습들이 추모의 열기를 불러 일으켰으리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 철두철미하게 이기적이고,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은 아닐까? 또 우리는 감옥에 갇혀서 산다고도 볼 수 있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돈에,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권력에, 쾌락과 안락에 빠져있는 사람은 거기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세상을 바꾸려면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한다. 우리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양심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될 때에 참으로 행복하다고 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바보 취급도 받고, 시련도 많고, 박해도 받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좌절하지도 않고 실패했어도 다시 일어서서 꾸준히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 인간이고 사회를 향상시키고 역사를 빛낸 사람들이 아닐까?
죄와 용서에 대하여. 죄란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죄다.”(야고 4,17) 거짓말, 도둑질, 살인, 굶주린 이를 보고 지나치는 것, 병든 이를 방치하는 것, 약한 이를 수탈하고 권리를 빼앗는 것 등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다. 구원은 곧 죄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이다. 회개라는 말도 허위를 떠나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움과 다툼을 버리고 용서와 사랑을 주고 받는 것, 회의와 불신의 장벽을 벗기고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입은 상처나 맺힌 한은 상대방이 용서를 빌든 안 빌든 내가 용서할 때 내가 입은 상처가 치유되고 내 안에 맺혀있는 한이 치유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항상 내가 용서하는 일이 먼저임을 생각하자.
복음을 산다는 것.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죽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만일 이 삶의 의미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활동도, 삶 자체도 공허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복음말씀은 곧 생명의 말씀이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사랑과 봉사를 본받는 것이요, 그 극치는 형제를 위하여 당신 스스로를 바치신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데 있다. 그리스도 신자란 먼저 남을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가 있다. 오늘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한국 교회 안에 가장 결핍한 정신이 이것이 아닐까 한다. 복음화는 신자수의 증가나 성당수의 증가에 있지 않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겪으면서 이웃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뿌리째 뽑아버리면 시기, 질투, 미움, 야심, 탐욕 등 남는 것은 모두 죄악뿐이다. 혼은 타락하고 마음은 메마르고 황폐화하여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 현대인은 생명의 말씀에 굶주리고 있다.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 때에, 남을 위한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바칠 때 인仁(유교)이 있고, 자비慈悲(불교)가 있고, 사랑(그리스도교)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 기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 믿음과 소망의 관계이다.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고? 성경의 말씀을 보자.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기도는 결국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는 기다림과 내맡김이다. 핵심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분의 사랑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것, 즉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단 5분만이라도 전적으로 기도 속에 보낼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에 보다 긴 시간동안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평소에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단 5분을 기도 속에 전적으로 보낸다는 것도 쉽지 않다.
하느님과 함께 5분!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젊은이들은 남이 죽는 것을 보아도, 늙는 것을 보아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느끼며 착각 속에 살기 쉽다. 그리스도는 본래 빛이셨지만 십자가로 불멸의 빛이 되었다. 헬렌 켈러는 자신의 어두움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시각장애자들의 빛이 되었다. 간디는 어떤 환경에서도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빛이 되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빛이 되었다. 어둠과 싸워 이긴 사람만이,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던진 사람만이,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만이, 사랑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던진 사람만이 빛이 될 수 있다.
김 추기경님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닮고자 애쓰셨다. 추기경님의 단순하고 진솔한 믿음의 고갱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60세에 인간 김수환은 죽었다고 썼다. “세상은 그를 높이 평가할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그가 얼마나 약하고 죄 많고 이기적이고 겸손한 체 하면서 실은 교만한지를 잘 아신다. 그는 참으로 질그릇 같이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다. 그는 죽었다! 거듭나기 위해서!” 그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나기 위해 ‘묵은 인간 김수환’은 죽어야 한다고 썼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사제나 수도자, 본당의 사목위원이나 제단체장이 아니더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임을 가르친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가졌는지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한다. 참 사랑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남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만큼 괴로워해야 한다. 성경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며 대미를 맺으려한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3-5)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김수환 추기경, 하느님과 함께 5분》| 김수환 지음|성서와 함께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나를 위한 시간
옮긴이의 말에서, 지은이 “노트거 볼프 수석 아빠스님은 오틸리엔 베네딕도수도회에서 37세 때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당시 수도회에서는 아빠스님의 큰 형님이나 아저씨 또는 아버지뻘에 해당되는 회원들이 상당했을 텐데…. 그런데도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도원에서 젊은 회원을 장상으로 선출하였다니 그 판단력과 성숙한 태도가 놀랍다.”고 하였다. 수석 아빠스님은 본문에서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아빠스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본질적 삶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게 사치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를 묻고 답한다. 살아가면서 시련과 고통도 없지 아니하나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라고 한다. 깊이 묵상해야 할 말이다.
하나, 기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위하여 태어난 존재이지 고통을 겪고 불행해지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태어나는가?”라는 물음에 “기쁨으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수도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돌볼 수 없듯이 먼저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피사의 에우제니오 3세 교황 베르나르도에게 한 말) 또 성경에서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16)라고 말하듯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언제나 기쁨이 있음을 본다.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기쁘게 살기 위하여 태어났으니 우리는 자신에게 늘 기쁨을 주어야 한다.
둘, 휴식에서 힘이 솟는다. 하루 종일 숨 쉴 틈도 없이 일하고 점심식사도 몇 분 안에 먹어치우고 다시 일에 빠졌다가 저녁에는 지쳐 녹초가 되어버리면 어디서 삶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삶에는 휴식이 있어야 한다. 휴식은 긴장을 풀어주고 숨을 쉬게 하며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 멈추어 서는 사람은 좀 더 깊이 인지할 수 있고,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으며, 좀 더 주의 깊게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휴가 한 번 내지 못한 바보 같은 삶을 이제야 후회한들 무엇하랴만….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휴식의 리듬을 주어 활력을 찾게 해야 하지 않을까?
셋, 고통은 자연의 법칙이다. 누가 고통을 좋아하랴마는 고통은 인간 삶의 실재이다. 찰스 코우만의 실험을 생각한다. “그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하여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는 광경을 긴 시간 관찰하였다. 나비가 몸부림을 치며 긴 시간 애를 쓰는 게 안쓰러워 가위를 가져다가 크게 구멍을 뚫어 주었다. 나비는 고치에서 쉽게 빠져나왔다. 나비는 날개를 질질 끌며 바닥을 왔다 갔다 하더니 죽어버렸다.” 생명체는 고통없이 성장할 수 없고 너무 편하면 죽는다고 한다. 우리는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고통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숨을 쉴 수 있다.
넷, 주일의 의미와 가치. 6C! 일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문화권에서 생활한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에서 주중에는 기도와 일을 번갈아 해야 하고 주일에는 독서를 위한 자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주일은 멈춤과 휴식의 날이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탈출 34,21) 주일의 의미와 가치는 지속적으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요청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은 부활축제를 지내는 주님의 날이다. 주일미사를 함께 봉헌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자신의 자유를 결정짓고 신장시키는 일이다. 주일미사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아 다시 이 안으로 들어오는 현대적 공동체의식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면 공동체는 우리 사회를 다시 하나로 엮어주는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
다섯, 날마다 감사하자. 나이 탓인지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감사는 영성의 핵심이다. 일생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고, 모든 것이 선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내면세계가 깊기 때문에 감사한 것들에 대해 지각이 생긴다고 한다. 감사한다는 것은 ‘예’하며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 손안에 놓여 있음을 생각하자.
여섯, 죽음. 우리 시간은 그림자처럼 지나가 버린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구약) 그리고 “시간은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신약)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며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살고 평안한 마음으로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총이랴? 세상을 축복하면서 떠난다는 것은 삶을 평화롭게 마친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과 죽음에 대해 “그래”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 생애를 다시 한 번 축복하는 것이고 내 삶에 평화를 갖는 것이며 내 한계를 평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화해하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시간은 소유하거나 가지고 다닐 수 없다. 시간을 내놓지 않으면 삶은 가치를 잃어버린다. 한가한 시간을 허용하자.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닌가? 현대생활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산함 속에서 고요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느님께는 시간이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순리적으로 사는 자세, 책임감을 가지고 밝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나를 위한 시간! 고요한 시간을 찾아 자신만의 시간을 내어 휴식과 감사, 주일의 의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명제들을 깊이 묵상해야 하리라. - 《나를 위한 시간》|노트거 볼프 지음|전헌호 신부 역|바오로딸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나를 넘어 그 너머로
머리글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바른 삶을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아라. 버려라, 비워라.’하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쓰기도 한다. 이 말의 뜻은 잠심(潛心)의 개념을 도입하면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잠심이란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에는 “마음을 가라앉히어 깊이 생각함”으로 풀이하고 있다. 기도하면서 분심과 잡념이 생길 때 잠심을 하면 분심과 잡념을 알되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누가 아주 값진 물건을 가졌다 해도 그 값진 물건이 그를 대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되는 것이 잠심이라고 했다. 일상에서 좋고 나쁜 감정이 들 때 그 감정에 빠지지 않고 잠심상태에 머무르면 마음이 좀 더 평화로워질 수 있고, 그 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8개의 장으로 잠심의 삶을 위한 마음, 잠심이 어떤 점에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고 각 장마다 짧은 예화를 담아 이해를 도와준다.
1. 인간 최대의 관심사인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 이를 극복하여 재도전하기도 하고 극단의 늪에 빠져드는 등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볼 수 있다. 만일 성공과 실패를 구분할 줄 알되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진화와 발전의 방향이 아닐까? 따라서 잠심한다는 것은 세상을 내 생각과 경험대로 보는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을 탈출하는 일이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만 바라보며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가지 아니 하는가? 코이라는 비단 잉어가 있다. “코이는 있는 곳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자란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15-25cm,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자란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나’에 끼워 맞추는 삶이 아니라 잠심을 통해 벗어나면 ‘큰 나’로 성장한다는 것을 배운다.
2.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하느님께 의탁하여 하느님을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쁘거나 슬픈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말한다. 또 겸손한 사람이란 욕심이 없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고요하여 괴로워하거나 초조하거나 슬퍼하거나 흥분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또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한다. 어린이다움의 내적 특성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천진난만한 순수성과 단순성, 거짓이 없는 진실성,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말한다. 초등학교 3학년 수학시간에 낸 문제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하고 비둘기가 시속 20km로 날아간다면 몇 시간이나 걸릴까? 아이들은 “6시간입니다.”라고 답했다. “틀렸어, 5시간이야!” 아이들은 “선생님, 비둘기도 거기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1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참으로 어린이다운 생각이 아닐까? 잠심을 하면 우리의 삶에 어떤 도움이 있을까? 피카소의 조각품 중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있는 예술품인 ‘황소머리’의 재료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구한 낡은 자전거였다니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겉치레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게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은 다 드러나기 마련이다.”(마르 4,21-25)라는 말씀은 진정 자유롭게 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러니 드러내는 삶이 강인한 삶이고 생존할 수 있는 삶이며 ‘참 나’로 사는 삶이다.
3. 잠심은 소통이 제대로 되는 삶이다.
진정한 대화는 내 생각대로 진행되는 대화가 아니라 내 생각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아닐까? “세상에 대해 죽는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성 마키리우스의 제자가 스승에게 그 뜻을 물었다. 스승은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하고 돌아오너라.”고 했다. 돌아온 제자에게 그 반응을 물었더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있는 칭찬, 없는 칭찬을 다하고 돌아오너라.”고 했다. 제자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스승은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판단을 멈출 때 세상에 대해 죽은 때이고 자신이 죽고 비워지는 것이 잠심이며 이때 내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느낀다고 했다. 싸움이 잦은 부부가 스승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사소한 한 마디에도 귀를 기울이니 호전되었다. 신혼시절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깊이 사랑했던 감정으로 되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제 말하지 않은 것에 귀를 기울이게. 사랑은 이해와 공감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이라네.” 이렇게 잠심하며 사는 사람들은 상대의 말에서 자유롭고 상대의 진심 어린 호의를 받아들이고 발바닥으로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귀로는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눈으로는 본질을 꿰뚫어 보고, 머리로는 그것을 이해하고, 입으로는 표현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이 모든 걸 내려놓고 듣는 게 발바닥으로 듣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가진 재산이 없는 사람도 몸으로 하는 봉사, 따뜻한 마음, 평온한 눈길, 온화한 표정, 친절하고 따뜻한 말 등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
4.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세 가지의 여행이 있다. 안으로의 여행(내면으로의), 밖으로의 여행(사랑을 실천하는), 위로의 여행(하느님과의 일치)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발까지 이루어지는 여행”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잠심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며 그 뜻을 실천하게 되면 하느님과 더 깊이 일치하게 되리라. 우리 삶의 지향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려놓아라. 버려라. 비워라.” 이 한 마디를 우리의 생활에 접목시키는 삶이어야 하리라. - 《나를 넘어 그 너머로》|정규한 지음|성서와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