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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9: 11-23 그러할 때에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집요한 유혹을 물리친 일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으신 은총의 일로 돌립니다.
동시에 요셉의 일을 만고의 모본이 될만한 일로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1. 본문 11-13절은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입니다.
시간이 경과해도 보디발의 아내는 경건한 요셉에게 조르기를 중단하지 않다가 급기야는 아양과 완력까지 더합니다. 모세는 여기서 그 전의 위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고귀하고 중대한 절조(節操)의 본을 보였습니다.
청년으로서 허구한 날 그토록 자주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함없는 인생 행로를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방종에 빠졌다고 해도 으레 용서받기 일쑤인 나이에 요셉은 어느 노인보다 더 절제심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노골적으로 광란하며 그녀의 애욕은 발광하는 화염으로 변합니다.
투쟁이 열기를 더하고 이런 저런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요셉의 도량은 칭찬 받을 만합니다. 요셉은 자기 신앙과 생명조차 잃어버릴 위험을 부담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악을 저지르느니보다 차라리 자기 명성을 희생시키기로 결심하고 삶 자체를 포기할 각오를 했습니다. 사실 그는 여러 차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한 젊은이의 그러한 귀감을 보여주시고 권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나이의 남자나 여자들이 자진해서 범죄로 뛰어들거나 혹은 가벼운 시험으로 범죄에 빠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어떤 변명을 남겨 두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존중심만으로 모든 세상적 애욕을 진압하고 온 세상의 박수갈채보다 선하고 정직한 양심을 더 높이 평가하도록 우리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증인이라는데 만족하여 의무의 길에서 이탈하느니 어떤 불명의 감수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기가 미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 이방인들 사이에도 '양심은 일천명의 증인이다 양심은 극히 아름다운 주장이다'라는 따위의 속담이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법정이 세상의 외곡된 모든 판결을 그늘 속에 던져 버릴 만큼 우리 눈 앞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무감각을 크게 부끄러워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일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만 마음을 조이며 그분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충분한 공경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범죄를 피하고 싶다'느니 '나는 사람들이 나의 올바른 행동을 오해할까봐 두렵다'느니 하는 따위의 헛된 구실은 집어 치워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단지 우리들 자신의 명예에 무관심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보다 우선시 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요, 무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정직한 생활의 본을 좀더 많이 보임으로써 이웃을 교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모든 악의 표적에 대해 사려 깊게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꼭 세상의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면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부르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본문 14-18절은
"(14)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망의 위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악한 여인이 사랑에서 분노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육욕의 고삐가 풀릴 때는 짐승같은 충동을 수반한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납니다. 사단이 일단 비참한 사람들에게 대한 지배권을 획득할 때에는 쉬지않고 그들을 이리 저리 급히 끌고 다니다가 드디어는 정신을 혼미하고 미치게 함으로써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는 사단이 타락자들을 얼마나 완악하게 하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자기 세력 하에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악인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셔서 그들은 떨면서 죄를 저지릅니다.
이 불순한 여인의 얼굴과 말에는 가책을 느끼는 듯한 흔적이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단은 완악을 더욱 공교히 합니다.
그 정도는 그녀가 대담하게 그 경건한 청년의 파멸을 도모할 정도입니다.
그 여인은 그 순간 무죄한 요셉을 학대할 수 있는 속임수를 꾸며냅니다.
그녀는 마치 한가한 때에 그의 멸망을 오래도록 심사숙고했던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녀는 얼마 전 만해도 증인을 한 사람도 만들지 않으려고 비밀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집안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건을 자기 방식으로 외곡시켜 버립니다.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수치감에 의해 그 무죄한 자를 벌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자기 남편을 그 무고한 사건에 연루시킵니다.
그녀는 '이 이방인이 나를 희롱한 것은 바로 당신의 잘못 때문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녀는 보디발이 눈을 딱 감고 이런 비난을 면하기 위해 서둘러서 그녀의 복수를 하는 방식 외에 달리 어떤 방도를 남겨둡니까?
그러므로 비록 모든 악인들은 두려움을 느끼긴 하지만 무감각에서 유래하는 완악함은 그들의 행동이 어떤 두려움에도 구애받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고하게 모든 악의 심연을 향해 돌진하며 거만하게 선량한 자를 짓밟습니다.
우리는 무쇠같이 완악한 악인도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정신으로 옷 입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이 시련을 주목해야 됩니다. 이 시련 또한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주 인간적이었는데 그런 인간성에 대한 보답으로 너무나 무가치한 것을 받습니다. 그는 그 여인의 수치를 침묵 속에서 덮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가능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 방정한 행동으로 죽음의 위험을 자초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가 시험에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미련 없이 자신을 하나님 봉사에 바치려는 것이 그의 진지한 결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배은망덕 때문에 의무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이 같이 행해야 됩니다.
3. 본문 19절은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입니다.
그 사건은 너무나 그럴듯하게 윤색되었습니다.
보디발이 극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기 아내의 참소를 곧이 들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질투심에 의한 행동은 격하고 열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이 사려 깊고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 않고 즉시 투옥시킨 경박성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영향을 덜 받았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내 대신 창기를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거의 뚜장이 노릇까지 함으로서 자기의 안일한 어리석음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례는 만인에게 유익합니다. 특히 남편들은 슬기로와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는 자기 아내의 뜻에 경솔히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자기 아내에게 너무 순순히 따라가는 자들이 조소의 대상이 되는 일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망하신 심판에 정죄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엄하고도 온당한 심령으로 기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세가 보디발의 경솔을 정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일입니다.
보디발은 자기 아내 말을 듣고서 즉시 요셉에게 격노하며 마치 요셉의 죄가 입증되기라도 하듯 분노의 고삐를 풀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공평은 제외되고 정당한 방위도 허용되지 않으며 마침내는 그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도 배격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앞에서 보디발을 환관이라고 말했으므로 어떻게 보디발의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이 물음의 해결은 용이합니다.
동방에서는 실제로 고자인 내시와 총독과 귀족들도 그렇게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칭 역시 모세가 마치 보디발을 왕궁의 우두머리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4. 본문 20절은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입니다.
모세는 요셉이 투옥 초기에 어느 정도로 혹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어떤 자유도 허용 받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옥 속에 감금되었다는 것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권세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전옥(典獄)도 자기 세력아래 두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질투심에 불타고 격렬한 분노에 제 정신을 잃은 자에게서 어떤 온화한 행동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시편105편 18절은 요셉에 대해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또는 혼)이 쇠에 매었다"라고 기술하는데 이것은 열조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에 틀림없습니다.
순결에 대한 보상이 어찌 이러합니까?
그는 육신을 따라서는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의 원인을 자기의 순수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요셉은 이 시험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앞에 크게 당황하고 염려하며 애곡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으로 분쇄되지 않고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소망 위에서 편히 쉬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하나님께로 도피하는 것은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지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지주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는 우리를 무적의 용사로 만들어 주는 유일한 갑주입니다.
5. 본문 21-23절은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입니다.
시편 기자의 증언에서 보면 요셉의 극한 고난은 금방 완화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부러 요셉에게 그런 곤경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마치 그를 음부에서 다시 데려 오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쳐다 볼 때 태양 광선이 가장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처한 캄캄한 불행 중에 하나님께서 예상 외로 우리를 구조해 주실 때 그분께서 주시는 은혜는 더 밝게 빛납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향해 은혜 또는 인자를 확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당한 학대에서 우리를 구출하시거나 좋은 일로 우리를 도우시는 때에조차 자신의 인자하심에 의해서 그렇게 행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구조를 베풀어주실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못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조를 전달하는 원인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영원토록 자비로우신 분이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의무를 부담시킬 공로를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다면 요셉에게서도 그런 공로가 발견되었으리라 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요셉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운 은총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언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자기 경건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인자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 인자를 행사하시는 방법도 추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전옥의 총애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여러 가지 이유로 전옥에게 열납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미덕은 그 자체가 호감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앞에서 성자 요셉이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랑스러웠다는 것을 언급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마치 가장 비천한 사람이기라도 한 듯 비인도적 대우를 받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모세는 전옥이 결국 인간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분명히 기술합니다. 전옥의 마음은 자발적으로 공평의 기미를 띠게 된것이 아니라 신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옥이 자기 잔인성을 배제하고 친절심과 온화함으로 행동한 것은 인간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지배하시는 하나님으로 유래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전옥이 보디발의 분노를 살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 심지어 아무 어려움 없이 간섭할 수 있었던 보디발조차 그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던 자가 이처럼 친절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대우받는 것을 묵과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보디발의 잔인성이 하나님께 의해 억제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있을 수 있는 일은 그가 의심하다가 간교한 음모를 다 알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요셉에게 대한 감정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불명예를 각오하고 요셉을 방면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의 정직성은 저절로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을 지키는 자로 선임되어 그에 따라 제반 업무를 마음대로 다를 수 있게 되었는데도 탈주를 시도하지 않고 석방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그 주변에 사람이 없을 경우에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11-13).
요셉에게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 사태가 역전이 되었을지라도 의로우신 심판장으로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14-20).
요셉에게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고 함께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21-23).
결과만 뻥튀기 하듯이 허황되게 취하지 말고 어떤 분이 누구와 함께 하시고 어떤 길을 가게 하시며 어떤 은혜를 입게 하시는가를 자세히 살피십시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감사히 받으십시요.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