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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평
양자역학의 이중성, 수필시학의 복합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양자 물리학은 파동-입자 이중성 및 양자중첩, 양자얽힘과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에 도전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이중성과 그것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밝히는 작업을 현대수필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은 계간평 청탁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 먹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성은 구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이중성과 수필시학의 복합성이 주는 묘미가 독자들을 수필의 매력에 빠뜨릴 것이라 믿는다. 나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파동과 입자 모두로 행동하는 빛의 이중적 특성과 같은 개념에 신기해하면서, 우리의 지식에 한계를 부과하는 양자역학의 이중성 원리를 수필의 구조의 복합성과 귀납추론, 주제의 내면화 원리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양자 영역의 비밀을 밝히고 이 매혹적인 과학 분야의 경이로움을 수필 분석틀으로 치환해 현대수필의 창작원리를 분석하는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Ⅱ.
뉴턴 역학에 기초한 고전 물리학이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내준 양자혁명 동안 발생한 패러다임 전환을 ‘사실을 사실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전통수필’에서 수필은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한다’는 현대수필에로의 전환에 견주어보면 어떨까. 현대수필은 이중구조와 전이미학으로 분석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그 문학의 본격성과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공중부양되고 있는 영자역학은 오랜 결정론적 세계관에 도전하고 파동 입자 이중성, 불확실성 및 양자중첩, 양자얽힘과 같은 개념으로 우주의 운행원리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지식을 부여하고 있다. 양자 혁명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놀라운 과학적 발전과 기술 혁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현대수필이론도 양자역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교술이라는 전통수필 이론에 도전하고, 기존 수필에 대한 개념에서 전환하여 수필적 허구, 중층구조와 존재론적 의미화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현대수필의 옷을 입게 되었으니, 현대수필의 이중성이란 분석틀은 앞으로 우리 수필의 복합성과 구조성을 재단하는 척도로 널리 애용되리라 믿는다.
박복임의 <제주 새, 유리 벽>에 먼저 주목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출점점이 인식에 있고, 인문학적 발상이 생태적 합리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데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의도적으로 음수율에 맞춰 둘 하나, 둘 하나로 리듬을 타게 한 제목의 음성학적 배열로 음악적 효과를 내게 한 것도 좋았다. 현대문학은 강렬한 제작성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응집성에서 결속성까지 감동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수필은 상기시켜준다. 이 작품은 제주도가 배경이 되고 있다. 작가는 맏사위를 맞이하고 가족들이 제주여행을 가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화소로 의미있는 메시지를 수필을 통해 전달하려 하고 있다. 작가는 어느 날 제주의 낮은 2층 주택을 숙소로 택하고 제주의 산림을 즐기고 있는데, ‘포탄 같기도 했고, 커다란 바위가 지붕에 떨어진 것 같기도’ 한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새 한 마리가 통유리 창 앞에 쓰러져 파들파들 떨고 있는 걸 발견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런 끔찍한 일에 대해 펜션 관리인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다. 여행 중 내내 다친 새를 걱정하는 작가와 손녀의 바이오필리아가 신라시대 솔거 이야기에 힘입어 더욱 공감을 자아내머 수필의 향과 맛을 더해준다.
“새들은 시력이 안 좋아요? 왜 진짜와 가짜도 구분 못하고 부딪힐까요?”
그러고 보니 새들에겐 이야기가 없다. 어느 집 누구 식솔이 실수로 벽에 부딪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졌어도 오늘의 새는 부상을 면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가짜 숲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날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우리도 얼마나 많은 유리 벽에 부딛혀 넘어지고 일어서며 전진했던가. 무모하단 이야기를 듣고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유리 벽을 깨며 성장했다. 남북이 갈라지고, 전쟁의 폐허가 된 나라에서 우리는 분단의 벽에, 가난의 벽에 부딪혔다. 나라만이 아니다. 내 삶에도 유리 벽이 많았다. 아버지가 있는 어린 시절의 풍경, 세일러복을 입고 등교하는 내 모습은 닿을 수 없는 유리 벽 넘어의 세상이었다.
- 박복임 <제주 새, 우리 벽> 중에서
이 수필의 복합적 구성은 기술방법론에서 보면 ‘이중성’과 같은 말이다. 빛의 이중성을 강조하는 ‘파동-입자’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박복임 수필에 적용해 보자. 빛이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모두 나타내듯이 박복임의 수필도 복합적인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박복임 수필의 문학적 성취를 드높이는 이중구조의 쾌미는 ‘새들에겐 이야기가 없다’는 단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서사가 없는 새들의 세계’라는 가설이 설정된 이유를 밝혀나가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하겠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시간과 공간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살아간다. 유리 벽 너머 진짜 세계의 열림을 지향하는 것이다. 새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아니다. 단지 예전부터 있어 온 세계, 가짜가 가득 찬 세계, 서사가 없는 땅 위를 날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무사히 비행하기를 원한다면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에서 스스로 진실이라고 믿는’ 유리 벽을 깨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는 이 가짜 세계의 맞은편에는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수필 <제주 새, 우리 벽>은 서사가 없는 제주 새들의 삶을 통해 바로 진실한 세계의 삶이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 대단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 하겠다.
전미란의 <가난한 벽>은 섬마을 학교 사택에 살면서 벽을 통해 듣게 되는 음악 선생인 한 남자의 비극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 수필이다. 아내를 육지에 두고 홀로 와서 외롭게 살아가는 남자의 아내가 섬으로 오고 난 후였다. 작가가 방학을 맞아 육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그 옆집 남자는 죽음의 문턱을 혼자 넘어가고 없더라는 이야기다. 들뢰즈는 입이 미각을 잃으면 입이 아니라고 했다. 이 수필은 한 남자의 비극적 최후를 통해 벽이 벽 구실을 못하면 여러 개의 벽으로 이루어진 가정은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글이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의 강점은 문학성을 높이기 위해 ‘날씨’ 등의 기상 장치를 잘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난’에 대한 재해석을 유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가난이란 단어는 재물의 빈곤에 주로 쓰는 말이지만 이 수필에서 ‘가난’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전통적인 해석의 제한이나 한계를 넘어서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풀어가는 것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다.
그녀가 떠나던 날 틉틉한 안개가 덮치더니 섬에 비가 내렸다. 새벽녘 옆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어떤 설움이 저토록 오열하게 만들까. 내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리자 남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픈 사람이라고. 동료들 사이에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방학 때 육지에 갔다 돌아오니 낯선 사람들이 옆방에서 짐을 배고 있었다. 그는 결국 혼자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캄캄한 밤 마주 잡을 손 하나 없었던 남자, 누구보다 육지로 나가기를 원했던 그의 넋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불운은 자신을 가둔 가난한 벽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벽이 벽의 구실을 못했던 것처럼 나는 그의 고독을 지켜보기만 한 옆방의 여자일 뿐이다.
- 전미란 <가난한 벽> 중에서
벽 앞에 놓인 ‘가난한’이란 말의 제대로 된 의미는 그 음악 선생의 아내가 섬에 온 날, 작가에게 던진 한마디의 말, “저는 옆방 사는 사람 아내예요. 남편 따라와서 살림하는 사람도 있네요?”라는 말 안에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다. 가난은 ‘캄캄한 밤 마주 잡을 손 하나 없었던 현실’을 의미한다. 몸이 아픈 데도 혼자 버림받다시피 해서 홀로 섬 생활을 견뎌야 했던 이 비극적 삶을 산 남자는 높은 힐에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아내를 육지에 두고 홀로 섬에 있었던 것이다. 극한의 외로움과 분노를 안고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새벽의 오열’은 이 부부의 위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요즘 세상에 누가 남편 따라 섬에 와서 사느냐고 하는 이 아내의 발언에 비극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튼튼한 사건의 예고된 장치들은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준다. 결국 이 작품은 영자역학의 원리 코펜하겐 해석의 하나인 양자얽힘에 따른 ‘상보성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의 + 또는 –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얽혀 있듯이 전미란 수필적 소재나 화소도 하나의 주제와 상관적으로 잘 얽혀져 있어서 주제 줌심의 문학인 수필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물질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파동의 성질을 띤다고 한다. 공기 중의 산소 분자까지는 입자로 보면 되고, 산소 분자보다 더 작아지면 파동 성질이 더 강해진다. 원자 주변의 전자들은 파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전자 입자설을 깬 드 브로이는 모든 물질은 파동성을 지닌다는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다. 두 개의 슬릿에 전자를 쏘니 파동의 성질이 나타나는 입자간섭실험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최경숙 수필시학에 적용하면, 일반화된 이야기나 소재들을 더 작게 만들면서 이중화해야 한다는 데 귀착된다. 이를테면 죽림-> 대나무-> 귀새로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버지 ->혈맥 ->부정으로 전이되면서 제재가 이중 층위로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수필에 파동성을 주려면 마지막에 원소와 같은 제재소로 지배적 정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의 파동성은 전이, 치환, 변용의 미학으로 빛나는 시적 언술의 양상에서 도출되는 성질이다. ‘이것’을 ‘저것’으로에서 ‘저것’에 해당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에서 ‘보조관념’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우리집 귀새는 과묵한 아버지의 혈맥이었다. 소리없이 8남매를 세세히 챙기는 사랑의 자부심이었다. 말썽 많은 자식들을 지켜 보면서 좀처럼 불안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길이 멈추지 않고 새어나가지 못하게 아귀를 단단히 묶은 귀새처럼 자식이 올바르게 자라도록 세세히 보살펴 주었다. 봇물이 다랭이논을 차례차례 채우듯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똑같은 기회와 부정을 공급해주었다. 부모라는 존재는 붉은 물을 공급하는 귀새라는 것을 60이 넘은 지금에야 깨닫는다.
- 최경숙 <귀새> 중에서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제재인 ‘귀새’를 ‘과묵한 아버지의 혈맥’으로 의미화하고, 부모의 존재를 ‘붉은 물을 공급하는 귀새’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도출된다고 하겠다. 이런 멋진 형상미학은 최경숙의 수필시학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결과라 하겠다. 작가는 이중 층위의 활용으로 목표영역을 잘 변용시켜 자신의 수필시학을 완성했다. ‘봇물이 다랭이논을 차례차례 채우듯’ 과 같은 비유가 곳곳에 들어 앉아 있음으로 독자들은 한층 문학적으로 확장된 맥락에서 수필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을 직접적인 수필의 대상으로 삼아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응시하는 최경숙 수필가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수필을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가슴과 눈을 열어 한낱 사물인 ‘귀새’가 보내는 발신음을 듣고자 세계 속에서 언제나 내포적 자아를 취하면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현상의 속살을 환히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졌기에 그가 창조해낸 ‘아버지의 혈먁’인 ‘귀새’라는 창작물은 결코 예사로울 수가 없다.
Ⅲ.
일반적으로 수필은 사람, 사건 또는 사연, 사상이라는 ‘삼사’를 관하는 가운데서 쓰여진다. 위에서 다른 세 분 수필가는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삼사의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수필과 교감한다. 수필가는 수필을 쓰면서 감동의 고지를 오르기 가장 쉬운 전략을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전략적 방법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주제를 문학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선택하는 제재는 이중 층위를 가지면서, 양자중첩이나 양자얽힘과 같이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밀접관 사물이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딸이나 옆집 남자, 아버지라는 작중 인물은 작가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코드화된 대상들이다. 특히 이들의 현대수필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의 진리를 담고 있어 좋다. 수필은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현실적 요소에 필수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가미될 때 그 지점에서 비로소 수필이 문학이 되는 것이다.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 옆집 남자에 연민을 보내는 옆집 여자, 그리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딸로서의 작가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이들 수필은 이중층위라는 수필시학의 핵을 관통하면서 다른 많은 문학적 효과를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현대수필의 저력이 빛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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