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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르코 대성당
산마르코 광장 동쪽 끝부분에 자리한 대성당은 829년에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몰래 가져온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10세기 말에 착공하였으나 11세기 말에 오늘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성당 정면을 장식하는 청동 말 4기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진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잔틴 양식을 기본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재되어 당대 최고의 건축술로 지은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본으로 삼았다는 대성당은 유럽의 것들과 비교하면 규모는 중급으로 가로 76m에 세로 62m로 높이는 43m다. 이 성당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 할 때까지 두오모나 카드레랄레로 불리지 않고 도제의 개인 경당으로 불리며 교황청을 배제했다가 1807년에 총 대주교좌 성당으로 바뀌었다.
새벽 2시에 찍은 대성당 야경
그리스 십자가형의 성당은 5개 돔 지붕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내부에는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여 베네치아로 가져온 보물도 적지 않은데, 성당 내부에 깔린 대리석 판석들도 하기아 소피아에서 이때 뜯어온 것이라 하니 무차별한 약탈의 범위가 짐작이 되며, 이집트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나폴레옹이 침범 시에 모조리 약탈해갔다가 그가 실각하자 가져갔던 전리품 중 일부만 돌려받은 것이라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의 모자이크
약 8,000㎡에 달하는 성당 내부 공간은 황금과 청동, 유리, 기타 값비싼 광석을 사용해 만든 눈부시게 빛나는 금박 때문에 '황금의 교회‘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12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천장과 벽과 바닥의 모자이크는 대성당의 백미로,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비잔틴 성당의 특징인 narthex(본당 옆의 홀)에는 13세기에 제작되었다는 모자이크에는 구약의 내용이 촘촘하게 그려 있다. 입구에 서있는 깃대에는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시절의 해외 영토였던 싸이프러스, 칸디아와 모레아를 의미하는 산 마르코기가 이탈리아 국기와 함께 게양되어 있다.
콰드리가
콰드리가는 로마 시대의 전차경주 때 사용된 4두 2륜 전차를 뜻하며, 6백년 가까이 산마르코 광장을 지켜오던 청동으로 만든 사두마(四頭馬) 조각상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개선문 윗부분에 올려놓은, 높이 1.6m의 네 마리의 청동 말, 콰드리가는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옮겨왔다는 설도 있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옮겨놓은 것을, 85세에 도제에 올라 90살이 넘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참가했던 도제 단돌로가 1204년에 베니스로 운송 될 수 있도록 말의 머리와 몸통을 분해하여 베네치아로 약탈해온 것이다.
제4차 십자군은 집결지였던 베네치아에 모여 베네치아의 배를 타고 원정을 떠나기로 했으나 십자군이 운송비조차 없는 것을 안 도제 단돌로는 운송 대신 크로아티아 지방의 도시로 베네치아의 식민도시였던 ‘자라’가 배신을 함에, 이를 십자군이 대신 응징해 달라고 하여, 자라를 굴복시켜 본전을 뽑았다.
그때 콘스탄티노플의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황태자가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 왕위를 찾게 해주면 뒷돈도 주고 정교회인 동방교회를 가톨릭의 서방교회로 통합하겠다는 솔깃한 제의를 해오자, 교황은 같은 기독교 국가 끼리의 전쟁이라며 거부했으나, 단돌로의 부추김에 넘어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침범하여 황태자를 왕위로 올렸으나 곧 살해당했다.
황태자는 죽고 콘스탄티노플의 국고가 텅 비어 뒷돈을 챙기지 못한 베네치아와 십자군이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파괴하면서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해왔다. 또 단돌로는 자신에 맞는 황제를 선출하여 베네치아는 추후 동방과의 거래에서 이익을 얻었으니, 누가 누구를 도둑이라고 손가락질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지만 베네치아 의 상인들은 셰익스피어의 소재가 될 만하다.
약탈해온 이 청동말의 운명 또한 기구하여, 1797년에 베네치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은 이 청동상을 파리로 가져가 자신의 카루젤 개선문 위에 올려놓았으나, 그가 몰락 후 1815년에 대성당으로 되돌아왔다. 1980년 초에 대기오염을 피해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산마르코 대성당의 청동말은 모조품이다.
팔라 도로
높이 2.2m에 너비가 3.4m인 팔라 도로는 '황금 가리개'란 말로, 제단의 전면에 거는 안테펜디움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내진제단 뒤에 봉안되어 있어 별도의 관람료를 내야 볼 수 있다. 위쪽과 아래쪽이 결합된 형태인 팔라 도로의 밑 부분은 1102년 제34대 도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에 주문한 것으로 마르코의 일생, 도제의 초상화, 옥좌에 정좌한 그리스도가 법랑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윗부분은 대천사 미카엘을 묘사한 것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한 것으로 추정한다.
실지로 보면 섬세하기 짝이 없는 팔라 도로
은으로 된 고딕 틀 속에 금으로 얇게 입힌 면에 에나멜로 칠한 250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팔라 도로는 장방형 모양의 면(面)을 여러 개로 구분하여 옥좌의 그리스도, 복음서가, 예언자 등의 복음서 장면을 표현한 아마유 판 등 총 83매를 배열해서 그 주위에 보석을 박은 금은 세공의 테를 붙였다. 1343년 도제는 위 아래의 두 부분을 합쳐 황금 골조 바탕에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진주 등의 보석 1,927개를 박아 화려하게 장식하고, 파올로 베네치아노에게 팔라 도로를 가리는 제단화 패널을 그리도록 명령해 교회의 전례가 거행될 때만 패널을 열어서 대중이 팔라도로를 보게 했다.
나폴레옹은 베니스 공화국을 멸망시킨 후에, 팔라 도로의 보석 다수를 갈취했지만, 250개의 그림에 남아 있는 진주, 루비, 사파이어와 자수정으로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지금은 상설로 볼 수 있으나 관람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 보물 중의 보물은 세상 어디에서나 보기 힘든 아름다움의 극치라, 한 번 보면 영원히 머릿속에 각인된다.
사두정(四頭政)의 네 황제(The Tetrarchs)
이집트의 진갈색 반암으로 제작된 조각상 으로, 293년부터 31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사두정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 아누스와 부제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묘사한 이 석상은 콘스탄티노 폴리스에 있었으나 지금은 궁전 모퉁이에 서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 탈해올 때에 발 한 쪽이 깨져 사라졌는데, 20세기에 ‘터키에서 사라졌던 그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 는 발 조각을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발조 각을 양보하여 한 작품을 완성하게 하는 대범함이 결여된 터키는 베네치아의 요청을 거부해, 발 조각은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타 마리아 글로리어사 데이 프라리 성당
산타 마리아 글로리어사 데이 프라리 성당은 정부가 1250년 베네딕토 수도원을 부지로 기부하자,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코회의 수도사들이 벽돌로 지어 1338년에야 완공되었다. 성당의 외관은 수수하나 실내는 화려하며 베네치아의 성당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으로, 1250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100년의 세월이 넘게 걸려, 1492년 5월에 축성식이 열렸으며, 산마르코의 종탑 다음으로 높다는 종탑은 1396년 별도로 건축되었다.
티치아노의 제단화인 ‘승모 승천’도 볼 거리지만 중앙 성가대석은 성자와 천사 들이 새겨진 화려한 목재 조각에 좌석 마다 금박으로 덧입힌 장인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정수를 보여주는 티치아노의 대작인 ‘승모 승 천’은 3등분으로 구분되어, 땅에서는 하 늘로 팔을 뻗친 사도들이 승천하는 성 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고, 구름 위로 는 붉은색 옷의 마리아가 악기를 연주 하며 구름을 받치고 있는 아기 천사들 에 둘러싸여 있으며, 황금빛 천상에는 아기 천사의 비호를 받는 두 명의 신이 마리아의 승천을 내려다본다. 티치아노는 사도들을 그리면서 평범한 시민들을 모델로 썼다고하며, 선명한 붉은색과 황금색은 화면을 압도하고 있는데, 특히 황금색은 그림 전체를 따뜻한 분위기로 만든다.
베네치아 인근에서 출생한 티치아노 베첼리(1488∼1576)는 10살 때 형 프란시스코과 함께 베니스의 화가인 벨리니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당대 최고의 화가 조르지오네의 제자가 되어 성화, 풍경화 등 회화의 전 장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510년에 스승인 조르지오네가, 1516년에 벨리니가 모두 사망했지만, 이미 완숙의 경지에 오른 그는 1518년 ‘성모 승천’을 완성하여 화단을 놀라게 하였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간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1576년 여름 90살을 앞두고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그만이 흑사병 사망자 중 교회에 묻히는 영광을 부여받았다. 참고로 오페라의 시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도 이 성당에 묻혔다.
곤돌라
돌다리를 건너는데 베사메 무초를 열창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흥에 겨워 승객에게 서비스하는 목청 좋은 곤돌라 사공이 한 곡을 뽑고 있다.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교통수단 중 하나이지만,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나 수상택시에게 기능을 내 준 지금은 일정 구간을 순회하는 관광 상품일 뿐이다. 곤돌라 뱃사공은 베네치아 인기 직업 중 하나다. 관련 학교를 수료하고 4개 국어를 할 줄 알아야 하며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 주소를 둔 사람만이 가능하여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몇 년 일하면 교육비용과 곤돌라 값까지 수월하게 벌 수 있어, 곤돌라 뱃사공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전래된 방식으로 제작하는 곤돌라는 1대 당 웬만한 고급 자동차 가격을 훌쩍 넘는다. 게다가 곤돌라 제조 장인들은 총 17명밖에 되지 않는다. 교통수단이 곤돌라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수많은 곤돌라가 불법으로 운영되었고 색상 또한 다채로워서 문제가 생기자, 합법적으로 인정한 곤돌라는 무조건 검은색으로 칠할 것을 명령했다. 미풍양속을 위해 곤돌라의 칸막이가 없고 지금도 모든 곤돌라는 검은색이다.
과거의 곤돌라 비용은 뱃사공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으나, 현재는 곤돌라 협회에서 지정한 요금인 20분 당 80유로를 받는다. 승선은 6명까지 가능하다. 곤돌리에들이 콧대가 높아, 노래라도 듣고 싶다면 10~20유로 정도의 팁은 필수다.
무라노 섬
베네치아에서 2km 떨어진 무라노 섬은 13세기 이래 베네치아 유리 제조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5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진 무라노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옛 가옥과 운하로 베네치아에 못잖은 정취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산타 루치아 역에서 바포레토라 불리는 수상 버스(42번)틀 타고 20분 가면 무라노 섬이다. 이집트에서 처음 개발된 유리 기술은 아랍으로 전수되었다가 10세기에 베네치아로 전해졌다.
베네치아 정부는 유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1291년 유리공예 기술자 전부를 무라노로 옮기면서 기술자를 귀족에 준하는 금전적 우대를 한 대신에, 기술의 독점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는 허용하지 않았고 해군의 감시 하에서 생활을 했다. 도주 시에는 극형에 처했기 때문에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 갔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 섬에는 직원 수는 몇 명 내외의 공장이 100여 개 있다.
유리공예는, 1200도로 재래식 화덕에서 모레를 끓인 후, 색소를 배합하여 다양한 색을 만들고 점성이 높은 유리 반죽을 만든 다음, 다시 가열한 후에 대롱을 이용해 입김을 불어 형태를 만들면서 완성시킨다. 전시장을 들러보니 탐나는 제품이 많다. 그들이 호가하는 가격의 2/3 정도면 살 수 있고 고가품은 더 흥정을 하면 된다. 마음에 드는 명품은 수천 유로를 상회한다.
베네치아가 16세기에 세계적인 강대국의 자리를 빼앗기면서 베네치아 유리공장도 상업적으로 쇠퇴하기에 시작하지만 19세기 중엽에는 유리제조미술학교를 개교하고 기술 인력을 양성하며 대를 이어가고 있다.
카사노바
1725년 베네치아의 희극배우였던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카사노바는 키가 2미터가 될 정도로 거인인 데다 파도바 대학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학업을 닦아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구사할 수 있어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을 쌓았다. 그는 또 춤, 펜싱, 승마 등의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으며 평생 40여 편에 달하는 저서를 남기는 저술가였다.
15세에 성직에 입문하고 베네치아의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고 열여섯 살에는 비잔틴 성당에서 첫 신학 강의를 했고 열일곱 살 나이에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는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면서도 떳떳하다고 생각하고 성직을 포기하고 방탕한 생활이 계속하자 참다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내자, 유명한 카사노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1747년 4월 카사노바는 귀족이자 상원 의원인 브라가딘과 우연히 같은 곤돌라를 타게 되었는데 브라가딘이 갑자기 쓰러지자 그를 치료하여 이에 감동한 브라가딘은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비천한 출생에 대해 그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한 때 사교계의 황태자로 각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난 모든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만난 여인이 122명이라 기록했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섹스 파티가 유행하여,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했는데,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의 남편들은 성직자와 종교 재판관이 많았다. 이들은 카사노바에 반감을 품어 그가 프리메이슨 등 이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1755년 서른 살의 그를 체포하여 1년간 카사노바는 두칼레 궁전 감옥의 열악한 감방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1년 뒤 그는 탈옥하여 프랑스로 도망쳐 호색 행각을 계속하며 네덜란드, 잉글랜드, 벨기에, 러시아, 에스파냐를 그렇게 떠돌며, 공상 과학 소설도 한 편 썼고, 호머의 ‘일리아드’를 베네치아 방언으로 번역했다.
또 볼테르, 벤저민 프랭클린, 예카테리나 여제를 위시해, 당대의 명망가들과 어울렸으며 자신의 열두 권짜리 회고록 ‘내 인생 이야기’를 써냈으나, 50 줄에 접어든 그는 전설적인 외모가 사라졌다. 빈털터리로 베네치아로 돌아와 사면을 받았지만, 정치적 망명자이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는 그는 다시 추방당해, 1785년에 둑스 성의 사서로 자리 잡고 1798년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별 가치 없는 많은 저서를 남긴다. 자서전의 운명도 순탄하지 못해, 외설적인 표현 때문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제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출판되었다.
자서전에서 ‘여자를 말로 유혹하는 남자는 바보다. 목표로 하는 여자에게 섬세하게 신경 쓰는 것이 최고의 유혹의 최고 비법이다.’라는 어록을 남겼지만, 그는 그저 사기꾼과 성범죄자일 뿐이다. 임종 시에 ‘나는 철학자로서 살다가 크리스천으로서 죽는다.’고 했다니 죽음의 순간에 정신이 돌아오는 평범한 범부였나 보다.
첨가; 새벽 5시 경에 로마행 항공을 이용하려 120유로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전세 모터보트로 공항으로 가서 로마에서 몰타로 가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었지만, 며칠 뒤 베네치아는 홍수로 마르코성당까지 물이 잠기는 수해를 입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베네치아는 섬인데 어찌하여 비가 많이 와도 빗물이 바다로 빠지지 않고 그런 홍수가 나는지가 궁금하다. 십 수 년 전 베네치아에 갔을 때도 바닷물이 불어나 광장까지 물이 찰랑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더 궁금한 것은 이처럼 노상 수해를 입어면서도 주민들은 왜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