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2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碇泊중의 어두운 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 민음사
기항지 2
多色(다색)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構圖(구도)
밧줄을 푸는 늙은 뱃군의 실루에트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철새의 전부를 남북(南北)으로 당기는
마음의 마찰음(音) 끊기고
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아직 젊군
다색의 새벽 하늘.
- 시집 [三南에 내리는 눈] 민음사
3.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4.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옆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5. 풍장(風葬)·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6. 풍장 3
희미한 길 하나
골목에 들어가 길 잃었다가
환한 한길로 열리듯
아픈 이 하나
턱 속에 사라졌다가 바람 불 때
확하고 뇌 속으로 타오르듯이
세상이 세워지다 말고
헐리다 말고
외롭다 말고 , 세상이
우리 모여 떠들던 광교의 술집과
잠 못 들다 홀로 몸 붙이고 잠든 방 사이
어디선가 타오른다
인왕산일까 남산쯤 혹은 낙산 그 너머일까
낙산 밑에 밀주 팔던 그 술집일까
안방에 담요 뒤집어 쓰고 화끈 달던
술항아리일까
혹은 우리들보다 더 뜨거운 우리의 골목일까
그런 골목, 우리 코트 버리고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
불타는 마루를 빠져나와 마당을 빠져나와
대문턱에 걸려 넘어져 엎어진 채로
세상이 마르고, 세상을 태우고, 세상에 물뿌리는 소리를 듣는다
7.전봉준
1
손금 접어 두고 눈오는 남루
한천에 법도 없고 겁도 없는 논
땅 위에 깔리는 허연 눈가루
마음에 짓밟는 형제의 손.
2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동렬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8.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의 눈.
9.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하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 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 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 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 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