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5) 낯선 해방구의 모습

[축성여석]

빨치산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해방구’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의 영토 속에 버젓이 인공기(人共旗)를 걸어놓고 공산주의 이념과 제도를 실행했던 곳이다. 국군 8사단이 회문산 일대를 공격해 빨치산을 몰아내던 무렵에, 이런 해방구의 모습이 아군의 눈에 그대로 들어오곤 했다.

아주 이상한 곳이었다. 외부의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짐작도 못했던 주민들은, 어느 날 빨치산이 물러가고, 그 뒤를 쫓아 들어온 국군을 만나면 아주 낯선 반응을 보이곤 했다.

사람을 통해, 아니면 그저 바람을 통해 날아드는 소식(消息)이라는 것은 견문(見聞)이라는 과정을 거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내가 아닌 남이 있는 곳, 외부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내가 ‘세계(世界)’에 정확히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1951년 2월 전남 장성에서 군 작전을 도와주던 민간인 노무자에게 국군 병사가

담뱃불을 붙여주고 있다. 빨치산은 선전과 조작을 통해 자신들이 점령한 ‘해방구’의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이 곧 없어진다’는 엉뚱한 믿음을 안겨주려고 했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린 사진이다.

해방구는 그 점에서 소식과 정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었다. 잘못된 정보가 가득 넘쳐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1년여 전에 벌어졌던 6·25전쟁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몰랐고, 자신을 지배하던 빨치산이 어떤 형편에 놓인 존재인가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쌍치면 가마골이라는 곳은 정강 대령이 이끄는 8사단 10연대가 점령했다. 정강 대령은 당시 ‘백 야전전투사령부’에서 제법 이름이 높았다. 작전이 펼쳐질 무렵에 그는 치질이 도졌으나, 병을 핑계로 전투 일선에서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조(王朝)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네 명이 메는 가마인 사인교(四人轎)에 올라타고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이 5·16을 일으키자,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다 옥고 를 치르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치질 때문에 가마를 타고 지휘했던 그의 명성은 내게도 직접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감투(敢鬪) 정신 덕에, 지형적으로 공략이 어렵던 쌍치면 가마골을 끝내 수복했을 때의 상황이다.

당시 10연대 작전주임이었던 이범준(예비역 육군 중장·교통부 장관 역임) 대위는 “쌍치로 들어가기 위해 순창~정읍 도로를 따라갔는데, 순창으로부터 15㎞ 정도 떨어진 지점부터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마골 입구에서 50여 명 정도로 보이는 빨치산이 저항하다가 곧 도망쳤다고 했다.

그가 들어선 가마골의 정경은 이랬다.

“말로만 듣던 해방구였다. 마을에는 인공기가 높이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고, 한지 제조 공장과 인쇄소, 인민학교까지 그대로 있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책에는 ‘부산이 곧 함락된다’는 등 허황한 내용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온 주민들은 우리가 국군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어떻게 왔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의 기억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순창에서 1948년 숙군 작업 때 검거됐다가 옥살이를 하던 중 전쟁을 만나 도망쳤던 육사 2기생 최모의 부인을 만났다. 최모와 이 대위는 원주 8연대에서 군수주임과 선임하사로 인연을 맺었던 사이였다. 최모는 이 대위가 육사시험을 치도록 배려했고, 동기생이자 당시 육사 시험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특별히 부탁해 그가 시험에 합격하도록 도와줬다.

순창에서 최모의 부인을 만난 이 대위는 그가 전쟁 중 점령지에서 인민군 장교로 있다가 다시 북상해 소식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이제는 포기하고 개가하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최모의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럴 수는 없지 않으냐”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이 대위는 이 사실을 최모의 육사 동기생인 정강 연대장에게 연락했고, 정 연대장은 “처지가 안됐다”며 쌀 한 가마니를 보냈다. 이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여인은 정강 연대장이 공격해 들어갈 쌍치면 가마골 일대의 사정을 아주 세세하게 알려줘, 작전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사회는 사람을 늘 다그친다. 사람의 생각을 한곳으로 몰아가고, 그를 따르지 않으면 잔혹하게 다룬다. 공산주의가 특히 그랬다.

해방구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됐다. 정보와 소식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부산이 곧 함락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빨치산이라는 존재가 곧 소멸의 운명을 맞이할 존재라는 것도 짐작조차 못했다.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정황조차 제대로 귀와 눈에 담지 못하는 세상. 그것이 해방구의 진면목(眞面目)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정리(情理)는 제아무리 거센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끊을 수 없는 법이다.

정강 대령과 이범준 대위, 숙군 작업에 걸려 옥중 생활을 하다가 북한군이 된 최모라는 인물,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인간적인 고리는 그 점을 잘 설명해 준다.

최모의 아내에게 정강 대령이 건네 준 쌀 한 가마니, 어려운 처지에서 큰 선물을 받아 든 그 여인이, 다시 이 대위에게 알려준 쌍치 가마골의 정황, 그리고 진격한 8사단 정강 연대의 성공적인 작전 완수 등은 사람 사이의 인연과 정리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을 말해주는 일화다.

어쨌든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공격은 순조롭게 펼쳐졌다. 우리는 사람의 입과 귀를 막고, 사고와 감정마저 한곳으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 빨치산의 ‘해방구’를 하나씩 접수해 갔다. 선전과 조작이 판을 쳤던 그곳에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