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용흥궁-고려궁지-초지진-분오리돈대- 온수리성당-보문사-오상리고인돌- 강화산성 동문- 남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입구
교회종
1914년 영국에서 강화성당에 기증한 종은 1944년 일제에 징발당하고, 현재의 종은 범종의 형태로 1989년 교우들의 봉헌으로 제작하였다.
본 성당은 고요한 초대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권 도편수가 주도하였다.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 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물양식은 한국정통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제대
한옥사제관
성당과 함께 지어진 사제관이 198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당시 재건축하였다. 지금은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알마 영국수녀 기념비
성당축성 100주년 기념비는 배모양의 기단석위에 비석을 세웠다.
보리수나무
1900년 영국선교사 트롤로프 신부님이 인도에서 10년생 보리수나무 묘묙을 가져와 심었다고 전한다.
용흥궁은 조선 후기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보위에 오르고 4년 만에 기와집으로 짓고 궁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잠저구기비와 비각
김상용 순절비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다.
강화고려궁지는 고려시대의 궁궐과 조선시대의 외규장각이 있었던 장소다.
나무 뒤로 유수부 동헌건물과 왼쪽에는 2003년에 복원된 외유장각이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을 사수하는 12개의 진·보 중에 외세의 첫 번째 침입장소로 신미양요에 이어 1875년 일본 군함 우요호와도 처음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성벽과 소나무에서 포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초지돈대의 소나무 수령은 약 400년 정되로 추정된다.
초지진에서 내려다 본 강화해협
분오리돈대
분오리돈대는 1679년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원래 계획은 방형 구조였는데 자연 지형을 이용해 쌓다 보니 초승달 모양이 되었다.
돈대가 대부분 방형이거나 원형인데 반해서 분오리돈대는 초승달 모양이라 독특한 외형을 갖고 있다.
분오리돈대에서 바라본 동막해수욕장
강화 온수리 성공회 종루
온수리 성당의 출입구는 누각식 외삼문으로 종류를 겸하고 있다. 이 종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종탑)로 1906년 안드레아 성당의 건축과 함께 축성되었으며, 종탑은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우리나라에서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시작한 1900년 전후에 건축한 건물이다.
1906년에 지어진 이 성당 건물은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 양식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이 성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 외형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 한 반면 내부 공간은 서유럽의 교회 건축양식으로 구성하여 동서 조합을 이룬 것이 특징이다. 강화군 온수리 성공회 성당의 본채인 예배당 건물과 2층 종탑은 2003년 10월 27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일주문은 문 밖의 사바세계와 문 안의 부처님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며, 일주문을 들어서면 일심(一心)의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성불하라는 큰 뜻이 있다. '낙가산 보문사' 현판 글씨는 여초 김응현의 작품이다.
윤장대
윤장대란 정전을 넣고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수 있도록 만든 책장의 일종이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律)과 논(論), 여러 고승들의 장소(章蔬)도 함께 넣어 둔다.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졌으며, 제작당시 국내 최대의 범종이 봉안되었다. 이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正秀)스님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t이나 된다. 범종의 형태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성덕여왕 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범종각'이란 현판 글씨는 강화가 고향인 서예가 박세림의 작품이다.
보문사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가 웅장하다.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좌우 협시로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상이 모려져 있고 중단에 신중탱화가 하단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또한 상단 되편으로 총 3,000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법당의 장엄함을 더 한다. 삼존불 위로는 아름다운 닷집이 조성되어 있다.
삼성각(三聖閣)은 1960년에 지어졌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위치는 경내보다 높게 축대를 이중으로 쌓아 자리하고 있으며 돌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으며 계단 옆에는 석등 2기가 조성되어 있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보문사 석실은 신라 선덕여왕 4년에 회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년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 사원이다. 입구에는 3개의 아치형 홍예문을 만들었다.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를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셨다.
보문사 맷돌은 곡식을 가는데 쓰이는 도구로 위 아래 두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맷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 승려들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이 향나무는 기묘한 형태를 지니며, 나이가 700년으로 추정되어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와불전
보문사의 와불 부처님은 누워 계신 모습과 손의 모양, 불의(佛衣)의 주름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상호(相好) 또한 평안하게 보인다. 운양으로 장식된 열반대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조각으로 구름의 모양이 수려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나한이란 아라한의 약칭으로 공양 받아 마땅한 자(應供), 공양으로 복을 심은 밭(福田), 진리에 상응하는 자(應眞), 나고 죽는 윤회에서 벗어난 자(不生), 더 이상 배울것이 없는 자(無學) 등으로 불린다. 나한은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계위로, 이들은 더 이상 생사윤회의 흐름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며 매우 덕이 높은 성자로 추앙받았다. 즉 아라한은 부처님 제자가 도달하는 최고의 깨달은의 경지를 의미한다. 보문사의 오백나한 상은 오백분의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는 419개에 달하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 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썹바위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 모셨는데, 눈썹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는 형태다. 관음좌상의 모습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 들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으며,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으며,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오상리 고인돌군에서는 모두 1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하면 모두 북방식 고인돌이라 한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다양한 편이다.
내가 오상리 고인돌
강화산성(남문)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로도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으로 내선, 중선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에 돌도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년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남문은 숙종 37년에 서문과 함께 당시 강화 유수 민진원이 세우고 안파루라 하였다.
강화산성 (동문)
강화산성은 내성은 동서남북으로 난 대문 4개, 비밀통로인 암문이 4개 물이 흐르는 수문 2개,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남잔대와 북장대가 있다. 동문의 이름은 망한루로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