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37호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에 미혹되지 말라 (히10:38~39)
열왕기하 2장에 스승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자마자 열두 겨리나 되는 소를 놓고는 엘리야를 좇았습니다. 그런 엘리사를 엘리야는 자꾸 밀쳐냈습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하튼 엘리야는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요단에서 엘리사에게 계속 ‘가라, 가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 맹세까지 하며 필사적으로 따라붙었습니다.
하도 끈질기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네가 뜻한 바 목적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제야 속내를 밝힙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2:9).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 뒤에 ‘그러나’가 나옵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왕하2:10). 이 말인즉슨 어렵기는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정도의 목적의식, 그 뜨거운 열정이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감동시켜 충분히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승천하고, 이를 본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리저리 갈라졌습니다. 이 장면은 엘리사가 목적한 바대로 엘리야의 후계자는 되었음을, 또한 갑절의 능력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기적이 7번 기록된 것에 비해 엘리사의 기적은 갑절인 14번 기록된 것을 봐도 엘리사의 목적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를 좇은 사람은 엘리사뿐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 외에도 50명의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엘리사와 다른 것은 그들에게는 확고한 목적의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50명의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그만두라’, ‘스승의 뜻은 네가 떠나는 것이다. 스승의 뜻을 따르라.’고 설득하고, 만류하고, 회유하고, 미혹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았기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산에 오르다 보면 7부 능선쯤에서 도시락 펴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다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등산 시작할 때 마음, 목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랬겠지요. 이 정도 왔으면 다 온 거라고. 굳이 힘들게 정상까지 갈 거 뭐 있냐고. 그런 그들은 절대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을 상실한 자에게 성공과 밝은 미래는 당연히 없습니다.
노아는 100년이 넘도록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큰 배를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사람들이 지나며 손가락질하고, 조롱하고…. 그래도 좀 친하다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무슨 물이 쏟아지겠냐? 인생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홍수 바로 직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습니다(마24:38).
그들은 마치 외눈박이 원숭이처럼 비정상적인 존재였지만,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옳다며 흥에 겨워 즐겼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노아가 되레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만일 노아가 고군분투하다 외로움에 지쳐 ‘외눈박이가 옳은 것 같다. 나도 저들과 함께하리라.’ 하며 자기 눈을 쳐서 외눈으로 그들의 동류가 되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때가 되매 40주야 비가 내렸고, 외눈박이 인생들은 비에 다 쓸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을 흐리게 하고, 잃게 만드는 자는 나와 먼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와 아주 가까운, 내가 아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럽니다. 사랑이란 말로, 위로라는 말로 다가와 목적의식을 슬그머니 도둑질합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남편이 한나에게 말합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삼상1:8). ‘아들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있잖아.’라고 말한 겁니다. 굉장한 위로이고, 고마운 말입니다. 이 말에 한나는 기도를 멈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사무엘은 세상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한나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여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친구에게 보리떡을 구하는 자나 누가복음 18장에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마9), 반드시 전쟁에 이겨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던 입다(삿11), 친구를 중풍병에서 낫게 하겠다는 네 친구(막2:1~5), 이들 모두 흔들리지 않는 목적이 있었기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목적을 상실한다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나침반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그 너른 바다에서 나침반 없이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이 긴 여정에서 천국이라는 목적을 상실하면 인생은 헤매고,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2:25~26)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타협은 없습니다.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시기하던 바벨론 신하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를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단6:7).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법이 시행된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항상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단6:10).
다니엘은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단 30일이니까 하나님께 이해를 구할 수 있었고, 문 닫고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0.0001%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고소되었고, 며칠씩 굶은 사자굴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친히 찾아가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그를 구하셨고, 그를 더욱 높이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도 다니엘처럼 신앙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3:16). ‘신앙에 타협이나 협상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이들처럼 확고한 목적을 가지라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
여러분, 목적이 바로 서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구분되고, 목적을 향한 열정이 일어나며, 어떤 어려움이 와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의 삶이 매일 그 나물에 그 밥인 까닭은, 당신의 신앙이 여전히 미지근한 것은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말에, 세상 풍조에, 난관 앞에서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26:3). 촛불은 흔들릴 수 있지만, 그 심지는 견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밝히고, 길 찾아 천국까지 갈 수 있습니다.
2024년,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적한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이루려면 귀는 막고 오로지 눈만 뜨고 달리십시오. 타협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오직 푯대만을 향하여 진군하십시오. 사슴을 쫓는 자가 토끼에 관심을 둬서야 하겠습니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할렐루야!
과녁이 있어야 화살을 쏠 수 있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불굴의 정신을 가지라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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