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KT&G복지재단 문학상' 대상 수상작
화살나무를 읽다 / 김진열
약에 쓰려고 잘라갑니다 용서를…
허리가 잘려나간 화살나무가
삐뚤삐뚤한 글씨를 매달고 화단에 망연히 서 있던 날
모은 돈의 반을 시집에 송금했다
아침이면 건물 사이
박봉처럼 잠깐 비치는 햇빛으로
알뜰하게 키운 화살이었다
화살나무는 화단을 지나는 전기선을
시위처럼 어깨에 걸치는 노동을 해왔다
불식간에 몸이 반 토막이 나고
뜬구름을 잡는 시어머니의 투자는 바닥을 쳤다
어깨가 잘려나가자 전기선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시위를 끊고 날아간 화살은
정말 화살이 되었을까
누군가의 병을 명중시켰을까
화살을 잃어버린 화살나무가
활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 있다
다보탑이 누워 있다 / 김상환
탑골공원 앞
동그랗게 누워있는 십 원짜리 동전 한 닢
폐지 줍는 사람도 노숙자도 밟고 간다
버스 요금, 라면 한 봉지도
십 원하던 시절엔
저 퇴물 동전도 기세등등했었다
제1호만 알고
제2호는 기억조차 하지 않는 인심
검버섯으로 얼룩진 원각사지 십층석탑
발부리에 누워있는 국보 제20호 다보탑을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내려다본다
땟국 찌든 다보탑
곱게 닦아 주머니에 넣는다
그 작고 가벼운 추억의 무게가
내 발걸음 밀고 간다
나는 지금 무엇이며
얼마짜리인가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문신 / 조정인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
심부는 거칠게 패였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모과의 위치 / 조정인
그 윗가지 그 옆가지 그 아래가지에 문득문득 새처럼 날아 앉은
푸른 모과들
깃 치는 소리 낮게, 더 낮게 내려앉은 모과의 동쪽은 지금
스스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위치
사물이 지닌 기쁨의 흘수선을 파드득 치고 날아오르는 조무래기 천사
발뒤꿈치를 좇다가 놓치고 들어온 이후
잎사귀 사이 모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과 쪽으로 얼굴을 돌려
모과만을 보여주었다 풀밭에 내려앉은 까치가 호젓한 하느님에서
훌쩍, 까치 쪽으로 건너뛴 이후처럼
선반 위의 퉁명한 모과는 어느 날 불쑥 한 덩어리 의혹을 내밀며
갈색 반점으로 뒤덮인 살덩이 쪽으로 옮겨 앉는다
지층의 그늘을 표면으로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과는 지금
갈애를 품은 심장의 위치 또 어느 날의 모과는 요절한 시인의 초상처럼
외로 기울어 너머의 시간을 다 이해한다는 식인데
한 고요가 한 고요에게 건너오는 이 수평적 평온은 어디서 오나
온몸으로 서쪽인 모과와 함께 어떤 어슴푸레한 꿈속을 천천히 건너가는
매우 가볍고 황홀한 춤의 저물녘
빛이 싹트는 방향 멀리, 눈 쌓인 나목 그 윗가지 그 옆가지 아래 가지에
모과의 동쪽이 벌써 와 있다
모과의 건축학 / 홍계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 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