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금
박우담
길을 걸었습니다
안개 내리깔리는 길
바짓단에 달라붙는 도꼬마리도 귀뚜라미도 만났습니다
새들이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푸른색에서 검정색으로
검정색에서 흰색으로 변하는 새들의 언어
새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때립니다
새가 나를 나무랍니다
푸드득 새가 날자 씨앗이 낱말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위치를 알 수 없는 꽃잎처럼
안개 속에 길을 헤매면서 나는 받아적습니다
새는 무지한 나를 아직도 나무라고 있습니다
무채색 언어가 내 귓바퀴를 때리자
울리는 공명들
순간 씨앗이 퍼져나갑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문장 속에 나는 갇혀있습니다
불현듯 공포가 머리칼을 세웁니다
복선들이 바짓단을 끌어당기는 길
흰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검정색으로
간혹
무지갯빛으로 다가오는 언어들
길을 걸었습니다 높낮이가 다른
도꼬마리처럼 안개가 내 가슴에 넘쳤습니다
새의 언어에 불안이 자라났으므로
길의 길 속으로 자꾸 빠져들었습니다
나는 이른 계절에 찾아온 귀뚜라미처럼
행간의 실오라기조차 놓쳐버렸습니다
어쩌면
내가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고
길이 나를 놓쳐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안개에 젖은 꽃잎처럼
문득 지나친 문장처럼
내 손바닥에 찍혀있는 새의 발자국
⸻계간 《문학청춘》 2020년 봄호
-----------
박우담 / 1957년 진주 출생. 2004년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시집 『구름트렁크』『시간의 노숙자』『설탕의 아이들』.
카페 게시글
심우기가 만난 시
손금/박우담
심우기
추천 0
조회 14
20.04.06 09:03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시집 제목이 참 좋아요 박우담 시인은 시집제목을 참 잘봅아요 시도 물론 생각하게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