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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된 소식
[마가복음 1장 1-8절]
혹시 이 노래 아십니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와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촌장’이라는 팀이 부른
<가시나무>입니다.
이 노래가 2000년에 조성모라는 가수를 통해
리메이크 되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죠.
이 노래를 지은 하덕규 교수가
이렇게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죄를 짓고
원하는 것만 쫓아가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혹시 이런 마음이 있진 않습니까?
마음과 관련하여 법륜 스님이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개그맨 이경규씨가 물었습니다.
“요즘 저는 제가 왜 태어났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요?”
그러자 법륜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었어요.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났으니 이유가 있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보다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계속
‘왜’라는 수식어에 집착하면
빈 공간을 발견합니다.“
그가 말한 ‘빈 공간’은 무얼 의미할까요?
법륜 스님도 마음의
빈공간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도를 닦아서 그 공간을
채울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저 지금 삶에서 행복을 찾아가십시오.’
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적으로 볼 때
이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입니다.
2023년 조계종 실세인 자승 스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인간이 죽음을 선택한 일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며
빈공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힘으로
빈공간을 메울 수 없습니다.
전능한 존재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시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주셔야 합니다.
이건 어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며 선물입니다.
이걸 성경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 황제의 탄생이나
전쟁의 승리를 선포할 때 쓰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유앙겔리온(복음)은 무엇일까요?
그전에 먼저 마가복음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마가 요한으로 사료됩니다.
마가는 핍박 속에 있던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해
네로가 왕권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악한 마음을 품고 화재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았고,
초대교회는 위기에 놓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마가 요한은
복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1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가 말하는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을
같은 혈통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는
고백을 했을 때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마가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님은 그저
특별한 사람 정도가 아니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니 잘 읽어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시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르케’입니다.
70인 역에 보면 창세기 1장 1절을
‘아르케’로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일입니다.
아니 인생이 180도 바뀌는
전인적인 변화입니다.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생명길로
가는 것입니다.
날아가던 새가 그물을 향해 돌진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죄와 사망의 그물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던 자를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기 사망의 그물이 있어! 어서 피해!”
라고 외쳐주셨지 않습니까?
이 부분을 묵상하는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모르는 사람이 죽어간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사랑입니다.
마가가 이 한 구절을 쓸 때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졌을까요?
우리는 어떴습니까?
진짜 복음을 믿고 계십니까?
머리로만 알고 있진 않습니까?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복음에 대한
뜨거움이 사그라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와 비슷한 교회가 등장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이 교회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리십니다.
요한계시록 3: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상했습니다.
분명히 교회라는 명패가 붙어 있고,
성경책도 끼고 다니는데
전혀 뜨겁지 않은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진짜 믿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즐기고, 놀고, 먹으면서
주일만 교회에 와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게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예전엔 뜨거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복음의 열정이
식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점점 빛을 잃어갔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한국 교회가 왜 부흥의 동력을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었기 때문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시선은
세상으로 향합니다.
교인이 줄어들자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만 동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숫자가 늘어날 수는 있지만
교회의 병이 회복되진 않을 거에요.
저는 우리 교회가 내면적 성장이
먼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믿어지는 은혜가 먼저 있어야 해요.
프로그램이 훌륭하고,
교회가 외적으로 세련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야 하죠.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의 복음으로만
충분한 인생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한 인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1:2-5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가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였던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알려줍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론 지파의 후손으로
뼈대 있는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이었고,
어머니의 신앙도 무척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가 많았던 부모님에게
요한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나실인이 되어
평생 주의 일을 하다
형장의 이슬이 되어 순교합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가장 클라이막스(전성기)는
바로 오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선민의식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개처럼 무시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모태신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회개는 먼 이야기와 같았죠.
오히려 이방인과 같은 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며 정죄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요단강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인기스타였던 세례요한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호화로운 집에서
노예를 부리며 살지 않았어요.
그가 살던 곳은 광야였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어요.
간혹 몇 가지 간증 때문에
유명해 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죠.
그렇게 유명해지고 난 뒤에
그들의 삶에 예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간증해서 받은 돈과 명성으로
자기를 위해 쓴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남들에게 대접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 모든 걸 내려놓고 광야로 향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다며
진수성찬을 대접받을 수 있었음에도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어요.
왜 이렇게까지 살았던 걸까요?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세례요한이 사역하던 때는
자신을 ‘구원자’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에게 속박되어
고난을 겪고 있었던 이들은
거짓된 선지자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자칭 구원자들은 명성을 쌓아서
안락한 삶을 영위하려 했습니다.
반면 세례요한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소명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거면 충분한데 자꾸 자기 이름으로
뭔가를 해보려 하지 않았어요.
때론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당해야 했습니다.
제사장 아들이 광야에서
미친 사람처럼 산다며 욕을 먹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cf)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학벌도 좋았고,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언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완전히 바뀐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어요.
함께 읽어볼까요?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마음의 빈공간을 둔채 살아가요.
그러니 삶이 힘든 겁니다.
매일 주어지는 일상 속에서
기쁨을 잃어가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벌써 12월 말입니다.
이제 2024년도 지나고
2025년이 코앞에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정말 빠르게 흘러가지 않았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했죠.
10대 때는 10km 속도로 가고,
20대는 20km, 30대는 30km...
어릴 땐 이게 이해가 안 갔어요.
지금 저희 아들이 그래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하고 싶은 게 많데요.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니까 어떤가요?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할 일이 많죠.
가정에서, 직장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아빠와 엄마로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주름만 깊어가는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 각자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가면 됩니다.
혹시 이 자리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분 계십니까?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 우리 인생을 맡기길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세례 요한이 강조한 것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 함께 본문 8절을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앞에 나아와
회개하며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외칩니다.
“나는 물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를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영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인간은 곧 있으면 끊어지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끊어진 길을 연결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제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린 땐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고 싶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신가요?
자료를 찾아보니까 받고 싶은 선물 1위가
‘현금’이었습니다.
현금도 좋죠.
그런데 이보다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죠.
그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선물었습니다.
로마의 속박 속에서
고된 인생을 사는 유대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의 메시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자주 인용되는 외국의 연극 이야기가 있습니다.
랄프라는 이름의 정신지체아의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 서도 각색되어
'덕구'라는 아이의 이야기로
공연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정신지체아인 랄프는
연극에 꼭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연극팀은 랄프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허락했지만
어떻게 연극에 출연시킬지 깊은 고민에 빠집니.
마땅한 배역을 생각하지 못하던 어느 날
누군가 그에게 여관 주인 역을 제안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집 문을 두드릴 때,
"방 없어요!"라는 한마디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한마디 대사로만 끝나면
너무 서운해서 두 번 정도 대사를 할 수 있도록
내용을 약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사를 훈련시켰습니다.
그런데 실제 연극을 올리고 한창 연극이 진행될 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문을 두드리자
랄프가 힘차게 "방 없어요!"라고
연습한 대로 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제 아내가 임신 중인데
어떻게 안 될까요?"라고 하자,
그는 두 번째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동안 망설이며 눈문을 글썽였죠.
그리고 갑자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바...방...방 있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순전한 마음의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의 마음은 구세주요,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묘사한
가시나무와 같은 마음처럼
번거롭고 복잡한 마음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빈 방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 증거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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