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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곤 | 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올해 발표된 핀란드의 ‘기초교육 2045: 삶을 위하여’ 보고서를 살폈다. 부제는 ‘핀란드 종합학교 비전’이다. 미래 교육 비전을 세가지 중심축으로 제시해둔 게 눈에 띄었다. 개인 차원에서 ‘의미 있는 삶’,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삶’, 그리고 ‘지구 위에서의 삶’이 그것이다. 개인→공동체→지구 영역이 동심원을 중심에 두고 밖으로 확산해가는 개념이다.
그 중심에 핀란드어 ‘시비스튀스’(sivistys)가 자리한다. 낯선 용어여서 이리저리 살폈다. 가장 보편적인 뜻은 ‘계몽’이라 번역된다. 이 개념은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설정한다. 시비스튀스를 몸에 갖춘 시민은 타인, 폭넓은 사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공동체와 환경, 인류 전체의 보존과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을 길러내자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개념이 시비스튀스에 상응하지 않을까 싶다.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 ‘교육기본법’ 제2조에는 나라의 교육 목적이 아름답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시비스튀스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한마디로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스며들어야’ 한다. 반복 훈련을 받았거나 고등교육 이수를 했다고 해서 절로 생겨나는 자질이 아니다. 우리의 옛 선인들이 중요시했던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와 엇비슷하다. 글을 통해 다듬어진 인격이 남에게도 따뜻한 울림을 주는 향기, 많은 독서 끝에 생겨난 것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깊이. 한마디로 말과 행동에서 배어나는 품격을 이르는 표현이다.
추측건대 핀란드에서도 다음 세대에게 시비스튀스를 갖추게 하기 어려운 형편일 것이다. 쉬웠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 비전 문서에서 그렇게 반복 강조하지는 않았겠지. 홍익인간 길러내기가 한국에서도 절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사정이리라. 인류가 늘 안고 있는 교육 과업은 ‘가르치기 힘든 것을 가르쳐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 안에 내재해 있다. 핵심은 그 난제를 정면으로 부딪치느냐 피해 가느냐에 달렸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떠했나? ‘홍익인간? 그런 건 법조문에나 있는 거지’ 하면서 교육이념 실현을 무시하거나 회피해왔다.
대안학교에서 겪었던 일이다.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 3주체에게 ‘각종 회의 참여’는 건너뛸 수 없는 일상이다. 어떤 때 그것은 ‘게으르고 싶은 날 피하고 싶은 샤워’ 같은 의식이다. 회의를 몹시 싫어하는 학생조차 절차에 따른 합의를 충분히 하지 않고 학교생활 규칙의 일부를 바꾸면 거세게 반발한다. 회의 참여는 싫지만 나 빼고 이야기해서 결정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학교 조직 생활을 통해 몸에 밴다. 이 정도면 대견하지 싶다. 게으르고 싶은 날임에도 회의 참여는 꾸역꾸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좋은 성품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다. 엉기고, 뭉치고, 반발하며, 설득하고, 기다리다가 이해하는 지루한 ‘밀당’ 과정을 거치며 결정체로 굳어진다. 한송이 국화가 피어나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다른 이들과 협력할 줄 아는 괴짜의 탄생. 그것은 오롯이 대안학교에서만 그래야 할까? 애초에 학교는 그런 아이들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단언컨대 경쟁과 입시 중심으로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홍익인간’을 키우기 어렵다. 자신을 돌아보고, 동료와 협업하는 정신 자세를 어찌 경쟁으로 단련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 목적과 실제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동조시키는 것이 교육개혁의 핵심이다. 입시 경쟁을 옹호하는 제도의 옹벽을 밀어내야 새로운 개혁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현재의 체계를 밀어낸 이후의 계획서를 들고 오라고 한다. 잘못됐다. 새로운 교육은 옛것이 물러난 빈자리에서 참여자들의 창의성과 협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미래의 교육 목적을 시비스튀스 갖추기라 부르든, 홍익인간 형성이라 부르든 상관없다. 가르치기 어렵지만 반드시 갖춰야 할 인품이 바로 그 토양 위에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교육의 역설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