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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5-16)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친교의 ‘깊은 관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동시에 우리를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는 우리들의 서로의 관계를 ‘거룩한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곧 영의 열매를 ‘우리들 안에서’ 맺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갈라 5,22-23,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그러니 사랑하면서 죽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곧 ‘스스로 접어버리지 않는 한’,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이 영원한 까닭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우리가 사랑할 때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바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부족을 메꾸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6ㄱ)
유다 이스카리옷 자리를 꼭 메꿔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하는가?
빈자리로 남겨두면 안 되는가?
이런 생각을 저는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요즘 제 주변에서, 곧 수도원이나 재속 프란치스코회나 이사회 등에서 자리가 비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입니다.
불가피한 이유로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그가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만두게 된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고 이 경우 우리는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데,
오늘 마티아 사도의 선출처럼 합의가 아니라 기도로 선출하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뽑으시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아서, 또는 서로 맘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인간들이니 그럴 수 있고, 맞지 않는 자체를 그리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맞추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맞추지 않으려는 것이 더 문제이겠지요.
왜 맞추지 못할까?
왜 맞추지 않을까?
너에게 맞추기 싫기 때문이겠지요.
나에게 맞추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맞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특히 하느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맞추는 것은 싫습니다.
내게 맞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고 강요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그것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하느님 사랑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고, 역시 초대교회 사도들 공동체처럼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혼자서는 누구나 부족합니다.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부족을 들추는 공동체이거나, 부족을 메꾸는 공동체이거나이고,
잘못을 비판하는 공동체이거나, 혼자서는 잘못하는 것을 같이 함으로써 잘 해내는 공동체이거나입니다.
부족을 탓하지 않고 보완하고, 서로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는.
그런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이루는 초대교회 사도 공동체이고,
오늘 우리가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 서로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디아도쿠스 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제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사도 1,24-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뽑으실 때도 목숨을 거신다>
역사상,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성직자의 부조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내는 게 옳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데리고 다니실 때 세상 사람들이 가리옷 유다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당신 사도로 존중해 주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에 대한 가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 얘기는 잘 안 하지만, 저는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뽑아 놓았으면 임기 동안에는 그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성직자를 뽑아주시든, 우리가 정치인을 뽑던, 하느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던 그 선택에 관한 무게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그렇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뽑는 분이 아니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한 그는 아내가 남겨 놓고 간 하나뿐인 열 살을 갓 넘은 그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만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그의 여생을 유명한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떻게 재산을 처분할 것인가를 유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는 그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들여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경매에 부치라는 지시가 그 유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지방의 한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볼품없는 그림이 부쳐졌습니다.
그 그림은 인기가 없어 아무도 응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때 피츠제럴드의 유언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경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내 모든 소장품을 갖도록 해 주시오.
이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뽑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뽑기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뽑으실 때는 전 재산을 거십니다.
목숨을 거십니다.
사제들은 당신의 목숨인 성체성사를 주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뽑은 이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가리옷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면 어때야 할까요?
미국의 생물학자 레인(Glen Rein)은 어떤 식의 기도가 암세포의 성장을 가장 억제하는지 실험해보았습니다.
우선 다섯 개의 세균 배양 접시(petri dish)에 각기 똑같은 수의 암세포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심리치료사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기도해보도록 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어떤 기도가 효과가 있었을까요?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39% 떨어졌다.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2번처럼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저도 봉사자들을 뽑아놓고는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뽑는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창조했으면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다고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것이 뽑아준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세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창조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 불능이라도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마치 자녀를 낳는 것과 같게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뽑으실 때 목숨을 거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공석이 된 사도 한 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필기시험이나 심층 면접, 자기소개서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생뚱맞게도 제비뽑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제비뽑기’, 요즘 들어 잘 사용하지 않기에 약간 생소한 단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추첨’입니다.
미리 정해 놓은 글자나 기호를 종이에 적어 놓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하여 승부, 차례 또는 경품 탈 사람 등을 가리는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스릴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사도를 뽑는 중요한 일을 두고 제비뽑기란 방법을 택한 것이 꽤 의아해보입니다.
사도의 발탁이란 이 중대한 일을 위해 저 같았으면 먼저 후보자들에 대한 엄밀한 사전 조사를 할 것입니다.
철저한 후보 검증작업을 거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조용히 물밑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비뽑기를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추천을 통한 인선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투표를 통한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를 뽑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중요한 인물을 뽑는데 제비뽑기는 너무나 안 어울리는 방법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더군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후 사도들의 생각은 이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물’이 한층 빠졌습니다.
사도란 직책이 세속의 직책과는 철저하게 다른 봉사직이요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요, 철저하게도 하느님의 사람, 참 신앙인이 수행해야할 역할이 사도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 사건, 총무였던 유다의 배신과 죽음 앞에 사도들은 기가 완전히 한 풀 꺾였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함을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주 겸손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예수님 중심적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능력,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사도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층 겸손해지고, 한층 주님께 대한 신뢰심이 커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변화가 유다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사도단 결원의 보충이라는 이 중대한 결정을 저희가 내리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뽑지 않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뽑아주십시오.”
그런 기도 끝에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사도단 결원 보충을 위한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사에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의도대로가 아니라 주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사도 직무, 신앙인들의 임무>
1)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베드로 사도는 ‘사도 직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1,21-22)
‘우리와 동행한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의 자격’을 뜻하고,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사도의 직무’를 뜻합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사도가 되려면 ‘동행’, 즉 ‘함께 함’이 중요하다고 그것만 강조한 것으로 보기가 쉬운데,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중요합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하더라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후보자 가운데 하나였던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이라는 사람도 분명히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적어도 마티아보다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도로 뽑히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을 믿었고 사랑했지만, 중간에 그 믿음과 사랑을 버렸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2)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제비뽑기’ 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상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가 교황 선출 때에 사용하는 ‘투표’ 라는 방식을 본다면, 이상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투표’ 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투표’ 라는 방식을 사용해도, 투표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비뽑기에도 성령의 인도가 작용한다고 믿는 것이 옳습니다.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일이라고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티아 가운데 한 사람을 사도로 뽑기 전에 공동체가 함께 ‘기도’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 기도는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일은 주님께서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교황 선출 투표 때에도 ‘기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3)
열두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은 그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활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체험들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모든 신앙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3-16)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믿음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즉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혼자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여정(旅程), 사랑의 사도(使徒) - 기도와 섬김>
“당신은 주예수의 사랑에 담겨 그 자리 그 영광을 넘겨받으니
베드로 말씀따라 제비 뽑혀서 성령의 은덕으로 이루셨도다.”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아침 찬미가도 아름답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다산, 어른의 하루;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인생 문장”에 따른 말씀이 참 유익합니다.
5월의 주제는 천륜지락(天倫之樂), “인연을 즐거워하라”라는 뜻인데, 우리로 하면 하루하루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즐거이 순응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대로 성령에 따른 사랑의 삶이겠습니다.
분명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티아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의 삶이 사랑에 따른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즐거운 삶이었겠습니다.
이어 5월14일 오늘에 주는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은 당당함이 되어야지 방종함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산>
“어른은 스스로를 바르게 함으로써 만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
<맹자>
역시 기막히게 좋은 말씀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는 오늘의 현실에 어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어른이야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야말로 어른 중의 어른입니다.
날마다 만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금과옥조의 교훈이 됩니다.
어느 카톨릭 분파 지도자에게 주신 짧막한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치는 의무이다(Unity is a duty).”
“분파가 되지 마라(Don’t become a sect).”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교육기관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지식은 포용적이 되어야 함(Knowledge must be inclusive)”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이태리 남부 해발 4170피트 산정상에 자리잡은 900년 전통의 수도승들을 만난 자리에서 수도승의 두 중요한 요소, “기도와 섬김(prayer and service)”과 연관하여, 수도승들에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선물(a gift to God)’이 되고, ‘하느님의 선물이 될 것을(to be a gift of God)” 촉구했습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람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매일 강론도 기도와 섬김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은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요약되며 평생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배웠을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사도만 제외하고 모든 사도가 기도와 사랑의 절정인 사랑의 순교로 생을 마감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마티아가 배반자 유다 자리에 사도로 선출되는 극적인 장면늘 보여줍니다.
선출 과정중에서 베드로 수제자의 리더십이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결같이 항구히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정주했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이며, 사필귀정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이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마티아가 제비뽑기로 뽑혔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부활의 증인, 얼마나 영예로운 칭호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가 주어집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 종합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평생 배워도 부족한 예수님의 우리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되 제 좋을 대로의 내 중심의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이타적 아가페 사랑을 살라는 것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판단하지 않고 용서하는 사랑, 나누고 섬기는 사랑,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이런 아가페 사랑입니다.
부단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도가 있어 이런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부족한 우리 사랑인지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절정이 바로 사랑의 순교이겠고, 이미 살아서 사랑의 순교자되어 사는 이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우리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영예롭고 자랑스런 우리의 품위인지요!
주님께 뽑힌 자로 주님의 친구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맺는 삶이 바로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라 연장되는 나날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지막 남은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 하나 뿐이겠습니다.
시간되시면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대헌장 1코린토 13장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남을,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부단한 사랑의 실천과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도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사랑의 사도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다시 한 번 평생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성가대 회식이 있어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오면서 놓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제님의 차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성당 집무실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에 없으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탁자 위에 안경을 놓았는데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싱크대에도 가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분의 안경을 쓰고 산보를 다녀온 후에 다시 찾아보니 안경이 소파 위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소파 위에 있는 안경을 차에서 찾으면, 회식 장소에서 찾으면, 집무실에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깜빡깜빡하는 것은 신호등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전을 되찾으면 여인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되찾으면 목자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니 예수님 말씀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읽었던 ‘어느 환자의 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이 통설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세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할 뿐)의 신경세포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신경세포 증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꾸준한 학습으로 뇌를 자극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우위를 가질수록 신경세포 증식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인 관계에서 우위를 가지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세포 증식력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 전혀 없는 삶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해마의 신경세포가 활발해집니다.
자기 뇌 건강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신경 쓰고 굽실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나’가 아닌, 고유한 ‘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존재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나를, 계속 성장하는 나를, 지금을 기쁘게 사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또 과대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요한 15,9)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또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나,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줄여나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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