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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面)
정현우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사이에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심사평] ‘면’은 평면 측면 얼굴 경계선 바닥 방향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면이란 단어를 활용하여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인간이든 건물이든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면들의 만남과 어긋남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 작품은 들려주고 있다. 이 시에 담긴 지혜는 통속적 잠언을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서 오래 되새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정호승·남진우)
■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쌈 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이 살짝 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추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 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가 곤란 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 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 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 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시를 쓸 때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들이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쌈’은 쌈을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 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나’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쌈’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황현산/ 김혜순)
■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키워드 /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 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1967년 대전 출생
▲충남대 기계설계공학 전공
[심사평] 당선작인 ‘키워드’는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는 세월호를 비롯해 죽음의 사건들을 환기하면서 그것을 상징화된 제의로 감싸 안는다. 다른 시에서도 어딘가 깨지고 불구화되고 불모화된 존재들이 그려내는 고통과 폐허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정호승/나희덕)
■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방의 전개 윤종욱
밤새 발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1982년 경북 예천 출생
▲강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서울예대 문창과 재학
■ 2015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당선작
비커의 샤머니즘 /김민률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1978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돌-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김기택·권혁웅·이원)
■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탕제원 / 박은석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업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 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1971년 광주 출생
▲웅진 홈스쿨 교사
■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걸어가는 나무 /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1964년 경기도 용인 출생
▲제1회 민중문학상 신인상 시 부문 수상
▲제6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수상
■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래된 신발 /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1965년 제주출생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9년 제주신인문학상 수상
■ 광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레몬 /김완수
레몬은 나무 위에서 해탈한 부처야
그러잖고서야 혼자 세상 쓴맛 다 삼켜 내다가
정신 못 차리는 세상에 맛 좀 봐라 하고
복장(腹臟)을 상큼한 신트림으로 불쑥 터뜨릴 리 없지
어쩌면 레몬은 말야
대승(大乘)의 목탁을 두드리며 히말라야를 넘던 고승이
중생의 편식을 제도(濟度)하다가
단 것 단것 하는 투정에 질려
세상으로 향한 목탁의 문고리는 감추고
노란 고치 속에 안거한 건지 몰라
들어 봐,
레몬 향기가 득도의 목탁 소리 같잖아
레몬은 반골을 꿈꿔 온 게 분명해
너도 나도 단맛에 절여지는 세상인데
저만 혼자 시어 보겠다고
삐딱하게 들어앉아 좌선할 리 없지
가만 보면 레몬은 말야
황달 든 부처가 톡 쏘는 것 같아도
내가 단것을 상큼하다고 우길 땐
바로 문 열고 나와 눈 질끈 감기는 감화를 주거든
파계처럼 단맛과 몸 섞은 레몬수를 보더라도
그 둔갑을 변절이라 부르면 안돼
레몬의 마음은 말야
저를 쥐어짜면서 단맛을 교화하는 것이거든
레몬은 독하게 적멸하는 부처야
푸르데데한 색에서 단맛을 쫙 빼면
모두 레몬이 될 수 있어
구연산도 제 가슴에 맺힌 눈물의 사리(舍利)일지 몰라
레몬이 지금 내게 신맛의 포교를 해
내 거짓 눈물이 쏙 빠지도록
▲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1998년 전북대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 졸업
▲2014년 계간 '시조시학' 여름호 신인 작품상
■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신발 /박진이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소나기 지나갈 때
문신
바람이
물살처럼
풀잎 사이로
돌돌돌
여울을 만들고 나면
먼 곳에서
소나기 온다
콩밭 매고 돌아오는
엄마보다
빨리 온다
빨랫줄을 향해
풀뱀처럼 사사삭 온다
마루 밑 누렁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먼 곳을 보는 사이
소나기 지나간다
풀잎 끝에
또록또록 빗방울 맺혔다
낮잠에서 막 깬 내 동생
어리둥절해 있는 눈망울에도
그렁그렁하다
바람도
조마조마하게
딱 멈췄다
[동시 당선 소감] 문신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 아름다운 운율로 추억했으면
소년 시절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덧 지나가버린 까닭이겠지요. 그 무렵에는 동화든 동시든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뒷산과 앞개울과 그리고 가끔은 거인처럼 무섭게 몰려오던 바닷바람이 이야기였고 노래였습니다. 그것들이 다들 어디로 가버렸는지 제게 남은 거라곤 턱밑에 난 조그만 흉터뿐입니다. 개울가 언덕 돌탑 모서리에 찍혀 울면서 집까지 걸어가던 풍경 하나가 내게도 그 무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엄마가 오래 안아주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동시를 읽고 또 쓰는 이유가 그 시절을 다시 살아가고 싶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 눈을 떠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도 그 시절을 살아갑니다.
열 살이 되는 윤이가 제 동시를 읽어줍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줍니다. 동생들은 아직 글을 모릅니다. 세영이 주영이도 조만간 아빠가 쓴 동시를 읽어보겠지요. 저를 꼭 안아주었던 엄마의 품처럼, 아이들에게도 아빠의 살내음을 남겨주고 싶습니다. 멀리서 파도처럼 몰려와 하얗게 부서지던 그 바닷바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더듬거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신 심사위원님 덕분에 조그마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무뚝뚝한 글자들이 아니라 뒹굴기 좋은 언덕이 되고 자잘하게 부서지며 반짝거리는 물비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언덕에서 그 개울가에서 가벼운 발자국을 남길 아이들이 있겠지요. 그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는 옹기종기한 발자국들을 생각하며 동시를 쓰겠습니다.
▲1973년 여수 출생
▲전주대 국문학과·전북대 대학원 어문교육학과 졸업
▲2004년 세계일보·전북일보 시 당선
[동시 심사평] 이준관·시인·아동문학가. -한순간의 풍경 촘촘히 묘사… 수채화같은 회화성 돋보여
예년에 비해 소재도 다양해지고 전반적으로 수준도 높아져서 반가웠다. 우선 아동시와 비슷한 유치한 작품이 줄어들고 세련된 시적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 늘었다. 응모자들이 동시도 시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결과라고 본다. 동심을 바탕으로 시의 표현 기법을 가미하여 동시의 격을 높인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 적은 점이 아쉬웠다.
최종적으로 이병일, 백승현, 강복영, 박은실, 문신의 작품이 남았다. 이병일의 ‘해바라기 치과’는 동화적인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발상이 평범하고 새롭지 못했다. 백승현의 ‘소나무’는 아빠에 대한 아이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해 냈으나 설정이 작위적이었다. 강복영의 ‘봄이 보낸 편지’는 동심적 발상으로 봄을 상큼하게 그려냈지만 참신성이 약했다. 박은실의 ‘그림책을 팝니다’는 그림책 장수의 신명나는 외침과 그림책을 보려고 몰려든 아이들의 모습을 동심이 가득한 풍경으로 정겹게 그려낸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너무 평범한 묘사로만 끝나서 아쉬웠다.
문신의 ‘소나기 지나갈 때’는 청신한 감각과 신선한 비유가 빛났다. 기존 동시의 경향과 달리 시적인 여운과 회화성 짙은 작품이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소나기가 지나가는 한순간의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촘촘히 묘사하여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바람이 돌돌돌 여울을 만들고 소나기가 풀뱀처럼 사사삭 온다는 비유는 싱그럽고 신선했다. 풀빛과 물빛이 은은히 배어 있는 수채화 같은 서정성 짙은 작품으로서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도 수준작이라서 역량에 신뢰가 갔다.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최우철
동그라미 사랑
사탕은 동글
달걀도 동글
꽃도 달도 동글동글
꼬리 말고 잠든 우리집 멍멍이도 동글
날 볼 때면 커지는 엄마 눈도 동글
빵빵한 아빠 배도 동글
뽀글뽀글 할머니 파마 머리도 동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전부
동글동글
‘사랑’ 이라고 발음하자
입안에 혀가 어느새 동글
동그라미 사랑
데굴데굴 굴러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 간다
“엄마도, 사랑해”
“아빠도, 사랑한다 우리 아들”
“할머니도, 어이구 내 강아지 사랑해”
눈덩이처럼 커진 사랑
데굴데굴 다시 나에게 굴러온다
당선소감 / 시는 아프고 외롭지만, 동시는 설레고 행복합니다
젊음이 불안했습니다. 연애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예쁜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했고, 나중에 우리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동시를 쓰기 시작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작품을 쓰지도 못했고 많은 작품을 읽지도 못했는데 덜컥 당선되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터질 듯 기뻤지만 곧 부끄럽고 두려워졌습니다. 아직은 작가라는 이름을 얻기에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를 앓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아프고 외롭습니다. 저에게도 시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시를 쓰고 읽을 때만큼은 스물아홉, 젊음을 불안해하는 어른이 아닌 아홉 살 진짜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설레고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안고 시작하는 길입니다. 지금처럼 재미있게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시를 쓰겠습니다.
늘 넘치게 부어주시는 주님께 가장 먼지 이 기쁨과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네가 무슨 동시냐며 놀리면서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준 안양예고 친구들, 옆에 있는 것만으로 나를 어린아이로 만드는 동시를 닮은 나의 그녀 민지에게도 고맙고 사랑한단 말 전합니다.
늘 쉬지 않고 기도해주시는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 자신보다 저를 더 아끼고 사랑해주는 부모님에게도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최우철 1986년 11월 서울 출생ㆍ세종대 역사학과 졸업
[2015 신춘문예] 동시 심사평 / 말라버린 마음 속 천진성 다시 샘솟게 하는 작품
심사를 하면서 주목할 만한 신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동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신인다운 패기, 발상의 대담함, 표현에 대한 남다른 열정, 최초로 만나는 리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움’에 대한 기대에 대부분의 작품들은 미치지 못했다.
작품의 주된 독자층이 어린이라고는 하지만, 동시 또한 시이고 느낌의 예술이다. 우리말의 맛과 멋을 자연스럽게 다룰 줄 아는 천의무봉의 솜씨가 있어야 하고, 생략의 문법으로 큰 여백과 긴 울림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수한 가슴으로부터 천진스런 말들이 흘러넘쳐서 어린 독자의 가슴에 공명의 파도를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응모작들에선 관념적인 어른의 냄새가 났고 작위성이 눈에 띄었으며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시대착오적인 교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최은묵의 ‘거미집’ 외 2편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작품 처리가 돋보였다. 그러나 너무 밋밋해서 무엇이 기억에 남을지 의문이었다. 임선우의 ‘술래잡기’ 외 2편은 세련된 묘사력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아직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작품세계가 없어서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이 흠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최우철의 ‘동그라미 사랑’은 섬세한 마음의 무늬와 결이 돋보인 작품이다. 라임을 재미있게 펼쳐나가는 운문시적 재능과 소리글자인 우리말을 맛깔스럽게 요리하는 솜씨로 보아 만만치 않은 문학적 내공이 느껴진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있지만, 아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다가 가슴 속 천진성의 샘이 말라버린 것처럼 여겨질 때, 초심으로 돌아가서 ‘동그라미 사랑’을 다시 읽어보고, 너그럽고 따스하고 천진한 본래 마음자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사위원 이상교(아동문학가)ㆍ최승호(시인)
서른 전 등단 꿈이 이뤄져, 연애편지에서 영감 얻었죠
[2015 신춘문예] 동시 당선자 인터뷰 / 최우철
“서른 전 등단 꿈 이뤄 기뻐… 연애편지에서 영감 얻은 시”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당선작 ‘동그라미 사랑’의 최우철씨
“서른 전에 등단하는 게 꿈이었는데, 이루다니….”
후하게 쳐도 스무 살로 보이는 앳된 청년의 눈에서 빛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추위를 뚫고 온 터라 발간 볼은 더 붉게 상기됐다.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당선자 최우철(28)씨다. 당선작 ‘동그라미 사랑’으로 그는 비로소 시인이 됐다. 동그란 사랑이 가족들에게 굴러가 눈덩이처럼 커져서 다시 나에게 온다는 내용이다.
가족의 사랑을 노래했지만, 영감은 손으로 연애편지를 쓰다 얻었다. “여자친구한테 쓴 편지에 ‘동그라미가 비탈에서 아무 노력 없이도 끌려서 내려가듯이 너를 향한 사랑과 끌림도 그렇다’는 대목이 있었어요. 적고 보니 사실 모든 사랑이 그럴 텐데, 이걸로 동시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사랑의 속성과 ‘사랑’을 말할 때 혀의 모양을 연결 지은 시다. “동글” 같은 단어로 운율을 살렸다. 당선작의 “‘사랑’ 이라고 발음하자 입안에 혀가 어느새 동글”이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구절이다.
시를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고교 때부터 했다. 최씨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입시에 투자하는 청소년기를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경기 안양예고에 진학했다. 대학도 문학특기자로 입학, 졸업했다.
고교 때부터 습작처럼 시를 쓰기 시작하다 동시로 바꾼 건 올해 들어서다. “할머니도 제가 쓴 동시를 좋아하시는 걸 보고, 동시야 말로 쉬우면서도 모든 연령의 공감을 얻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썼던 시 50~60편을 동시로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해 새로운 시들을 써나갔다. ‘동그라미 사랑’은 올해 쓴 시를 다듬고 다듬은 것이다.
당선 전까지 최씨는 주위에 자신을 “카페 창업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만, 시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밥벌이할 일이 있는 게 시를 더 오래 쓰는 길이겠다 싶어서 카페를 차리려고 하고 있어요.”
물론 ‘돈 되는 글’도 써봤다. 대중가요 작사다. 하지만 으레 주문에 맞춰 써내야 하는 작사는 ‘공장형 작업’처럼 느껴졌다.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된 최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아동 애니메이션 일을 하는 여자친구와 함께 동시 그림집을 내는 거다.
“동시를 쓸 때만큼은 어린아이가 돼야 해요. 그 몰입이 참 설렙니다. 그 느낌을 잊지 않고 따뜻함을 주는 동시를 쓰고 싶어요.”
-김지은기자
[2015 每日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윤애라
카메라 자물쇠
카메라 살짝 누를 때마다
찰칵 찰칵
문 잠그는 소리가 납니다
네모난 화면 안에 꼼짝 없이 갇히는 풍경
봄을 묻힌 개나리
노오란 손톱도
가을을 내려놓는
노오란 은행나무도
겨울을 또 이기고 온
진달래 붉은 두 뺨도
찰칵 찰칵
그 안에 소복하게 갇히고 맙니다
엄마를 못 알아보시는
할아버지 흐린 눈동자와
그걸 바라보시는
엄마의 글썽대는 눈동자까지
찰칵 찰칵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잠가버리고 맙니다
내 지문을 기억하는 카메라 자물쇠
◇당선소감…벼랑에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이미 어른이 되었는데 그래도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보다 큰 축복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비처럼 마음 놓고 날아보라고 벼랑에서 허공으로 제 등을 밀어주셨군요. 아이들을 향한 시선을 붙들고 살아가라는 이 행복한 숙제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지금부터 제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낡은 동심을 조심스레 꺼내어 햇볕도 쬐고 바람에도 말리며 살아가겠습니다. 아직 설익은 제 작품을 영광된 자리까지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신 남편 박준현 님과 두 아들, 나의 글쓰기를 허투루 보지 않고 바로 세워 주신 권숙월 선생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라 하시던 노중석 선생님, 항상 문우(文友)로 껴안아 주시는 다움 문학회 식구들, 백수 아카데미 시조반 식구들, 저를 큰언니로 부르는 세 동생과 그의 남편들, 고맙습니다.
내 시의 마음 밭을 함께 가꾸던 제자들아, 사랑한다. 너희의 맑은 눈빛과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거야. 이제는 몸을 입고 오실 수 없는 먼 집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밤마다 보내주시는 별빛을 감았다 풀며 생전의 그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걷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름을 호명할 수 있게 섭리하신 나의 하나님! 달란트를 그냥 묻어 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애라
▷1963년 부산 출생
▷2004년 자유문학 시 부문 신인상 ▷2012년 전국편지쓰기대회 금상 ▷2013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차상
▷현 한우리 독서토론논술 지도교사
◇ 심사평…참신한 발상과 삶에 밀착된 동심
동시는 동심과 시심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동심에 너무 무게가 실리면 문학적 향훈이 옅고 말놀이 같은 일상의 모습에 머무르기 쉽고, 반면 시심에 너무 기울어지면 이해와 공감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동시는 동심과 시심이 균형을 이루고, 이것이 화학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응모작품을 심사하면서 느낀 점은 위에 적시된 것과는 유리된 지나친 비약 및 공상, 어른의 눈높이에서 본 심상, 형상화되지 못한 산문적 표현 등과 같은 작품이 아직도 다수를 차지하였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정우기’ 씨의 「할머니 집에 모인 신발」 외, ‘김연자’ 씨의 「돌림노래」 외, ‘윤애라’ 씨의 「카메라 자물쇠」 외였다.
‘정우기’ 씨의 「할머니 집에 모인 신발」은 할머니 집에 옹기종기 모인 신발을 동심의 눈으로 포착하여 신발 주인의 삶을 정겨우면서도 건강하게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신인다운 새로움이 결여되고, 유사한 기존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해 먼저 제외되었다.
‘김연자’ 씨의 「돌림 노래」는 눈 내린 날의 정경을 동화적 상상으로 형상화한 가작이었다. 판타지와 시심이 결합된 산뜻하고 서정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돌림노래처럼 눈을 굴리고’ 등 몇몇 표현은 매우 신선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의 밤은 그렇게 열꽃이 피고’와 같은 모호한 표현과 전체적인 심상이 동심에 밀착되지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윤애라’ 씨의 「카메라 자물쇠」는 우선 발상이 참신하고, 눈높이가 동심에 맞추어져 있다. ‘찰칵 찰칵’과 같은 의성어를 반복적으로 활용하여 청각적 이미지를 살린 것도 좋았다. 그리고 가벼운 스케치에 머무르기 쉬운 소재를 일상적 동심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의 현장까지 시선을 확장한 시도가 돋보였다. 둘째 연의 사물에 대한 사진 찍기가 셋째 연에서 ‘할아버지 흐린 눈동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엄마의 글썽이는 눈동자까지/ 찰칵 찰칵’과 같은 표현이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슴 저린 회한의 모습과 서로 대비되어 결코 가볍지 않은 이미지를 구현한 것은 유의미한 시적 울림이었다.
그리고 함께 보내온 수 편의 작품이 모두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데 신뢰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하청호(아동문학가)
[2015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남정률
겨울 할머니 방
겨울이 되면
시골 할머니 방에는 의좋게 같이 산다.
쌀 포대, 콩 자루, 고구마 자루, 호박덩이
콩나물시루가 옹기종기 의좋게 산다.
메주는 오래 매달리기 자랑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콩나물시루 콩나물을 사랑하신다.
콩나물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샤워를 시키신다.
호박덩이들도 탈이 없는지 가끔
엉덩이를 들여다보시며 쓰다듬어 주신다.
황토방 뜨끈히 달군 추운 날이면
마루 밑에 옹옹거리던 강아지도
방으로 들어오고
방문 밖의 시래기들도
방으로 들어오고 싶어 바스락거린다.
할머니께서 호박고구마 하나 잡수시면
콩나물시루의 콩나물들이
보자기를 들치고 내다보고
벽 위 사진의 할아버지께서도
말없이 내려다보신다.
겨울의 시골 할머니 방은
고구마 같은 구수한 황토냄새 맡으며
옹기종기 의좋게 산다.
할머니 품안에서 모두가 따뜻하다.
[당선소감-남정률]동시 쓰는 것, 나를 다스리는 일
TV에서 올해 들어 가장 추운 한파 소식을 전하는 날. 경상일보에서 신춘문예 동시 당선의 따뜻한 소식을 전해 왔다. 이순(耳順)이 지나면 남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대히 들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눈 시린 일이 많고, 귀에 거슬리는게 많다. 수양(修養)되지 않은 의식(意識) 탓이리라. 수신(修身) 되지 않은 의식(意識)은 자칫 남을 찌르는 가시가 되기 쉽다. 의식(意識) 속의 가시를 잘라내고 부드러워지기에 애써야 하겠다.
동심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하다. 티 없이 맑은 동심을 살피노라면 내 마음도 조금은 부드럽게 순해지리라 생각한다. 동시를 쓰는 일은 나를 다스리는 일이며, 마음을 젊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연륜은 세상의 때가 끼게 마련이다. 때가 낀 눈으로는 순결한 동심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연륜의 때를 닦아가며 어린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에 힘써야 하겠다.
경상일보에서 상을 주시는 것은 어린 꿈나무들을 위해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당부요, 격려라 생각한다. 예쁘지도 않은 작품을 곱게 보아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작품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경상일보에 감사드린다. 글 쓰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글마당을 빌려 주신 <시마을>·<시하늘>·<농암사랑>과 가르침 주신 여러 문우님들께 절 올린다. 내 건강 때문에 늘 마음 졸이는 아내에게 고마움 전하며 기쁨 같이 나누고 싶다.
[약력-남정률]
-1949년 출생-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서울 마포고등학교 근무·퇴직
-제257회 아동문예 문학상 동시 부문 당선-제20회 소년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 동시 부문
[심사평-이준관]안정된 기법·동심적 발상 훈훈
응모작들은 전반적으로 동심적인 발상과 안정된 시적 기법을 바탕으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곱고 착한 동심의 세계와 따스한 사랑의 세계를 동심적 표현으로 담아내거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적 형상화로 그려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의 삶과 밀착한 생생한 동심을 담은 작품이 드물었고 낡고 오래된 정서의 작품이 많아서 아쉬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겨울 할머니 방’은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방의 정경을 섬세한 묘사와 참신한 시적 표현으로 따뜻하게 그려냈다. 할머니 방의 모습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선명하게 묘사하고 형상화 낸 시적 역량이 미더웠다. 발상이 새롭지는 않지만, 안정된 기법과 동심적 발상으로 할머니 방의 훈훈한 정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점이 돋보였다.
[약력-이준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대한민국 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동시집 <크레파스화> <씀바귀꽃> <우리나라 아이들이 좋아서>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역임
[2015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오창화
군밤
혼자 구워 먹으려고
화로에 묻은
알밤
펑
펑 펑
펑 펑 펑
다 들켰다
[당선소감]나의 글이 아이들 마음 속에서 읽히기를
눈송이마다 발이 달려 제자리를 향해 날아 내린다. 바람은 나무의 머리채를 잡고 어딘가 막 달려가자고 한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며 들로 산으로 개울로 운동장으로 나가 놀던 날들이 눈송이처럼 날린다.
동시 쓰는 일이 아이들의 마음을 갖는 것이지만 이미 커 버린 내가 쓰기는 쉽지 않았다. 얼마 동안인가 아이들과 같이 놀며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은 아이들의 꽁지를 따라다녔다.
서로 닮는다는 말처럼 아이들을 닮아간다. 아이들처럼 웃고 아이들처럼 울고. 아이들아 고맙다.
나의 글이 아이들 마음속에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흰 여백으로 남았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이다.
시를 쓰도록 채근하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시의 길을 다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경북 영양 生 △영양여고 졸업
[심사평]아이와 어른의 감성 넘나드는 솜씨 감탄
처음 먹어 보는 열매 같은 동시를 입에 쏘옥 넣어 주는 새로운 시인을 기다리며 응모작을 읽었다. 총 835편의 응모작 중 예심을 거친 100여 편의 동시를 읽으며 당선작을 가려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끝까지 남은 작품은 `삽'과 `도마' 그리고 오향(본명:오창화)의 `군밤'이었다. 세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좋은 작품이었으나 오랜 시작의 흔적이 엿보이고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는 `군밤'을 당선작으로 올리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오향의 작품들 편편 속에는 시인의 따스한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7행의 짧고 귀여운 동시이지만 아이와 어른의 감성을 넘나들며 폭넓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쓰고자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재미와 유의미라는 두 가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 또한 `군밤'은 독자가 공감각으로 동시와 만나게 하는 작품이다.
심사 : 박두순, 이화주 아동문학가
첫댓글 어떻게 정리해까 하고 있었는데, 박시인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