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으로 하루하루가 공포인 요즘.
단편원고 마감이 25일이었고, 그 힘든 것을 간신히 해치우고 나니
문득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구쳤어요.
지난 번 1917 보러 영화관에 갔더니 사람이 너무 없어 공포감이 느껴지더라구요.
다른 때는 사람이 없으면 참 좋아했는데.
하여...
안전하게 편안하게 느긋하게 방콕1열 관객이 되어 하루 한 편 좋은 영화를 보기로 했지요.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지만, 뭐 어쩌겠어요. 시국이 시국인만큼.
2008년 제가 사는 부평에서 발간하는 지역신문에 일 년동안(정확히 10개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부평스케치'
신문사 측에서는 계속 쓰기를 바랐지만, 10회를 하고나서 그만 두겠다고 했지요.
잘 몰랐는데 이곳 부평 토박이들이 내 글을 눈여겨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지요.
어렸을 적 기억 하나 만으로 써내려가는 글인데....너무 부담스러웠거든요.
그 중의 하나. 8번째 쓴 글을 보면
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나 봐요. ㅋㅋㅋ
영화는 제 삶의 활력소입니다. 저를 키워주는 영양소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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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가 들려주는 부평스케치8
삶의 샛별이 되어준 금성극장
안선모
롯데시네마,CJ CGV, 메가박스, MMC⋯⋯. 요즘 대형영화관들의 이름이다. 이름도 그럴싸하지만 시설 또한 최고다. 여름방학 동안 모처럼 만에 영화관을 찾으니 내 모습이 꼭 촌사람이 서울 와서 길 못 찾아서 헤매는 꼴이다. 매표소 찾는 것도 일이고, 들어가야 할 상영관(1관에서 9관까지 있는 곳도 있다)을 찾는 것도 나를 당황하게 한다.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영화에 대한 추억, 그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어두운 하늘을 비춰주는 샛별을 바라보는 일과 똑같다. 금성극장- 그곳은 삶에 찌는 이들에게 샛별이 되어준 곳이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그 시절,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마을 아낙들은 철도 길을 따라 금성극장으로 향했다.
“분명 영화 보다 졸려서 잘 텐데⋯⋯. 오빠들과 집에 있어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고집이 똘똘 뭉친 얼굴을 반짝 들고, 초롱초롱 눈빛으로 어머니 치맛자락을 꼭 잡았다.
‘엄마, 난 절대 안 잘 거예요.’ 하는 눈빛으로.
어머니는 비록 극장 가는 길이 멀긴 해도 나를 데리고 가는 게 별로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돈을 안 내도 되는 나이였다.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깜깜한 길을 걷다보면 발밑에서 자글자글 자갈돌이 발바닥을 간질인다.
두 줄 길게 나 있는 철도를 따라 한참 걸어 금성극장에 닿았다.(그때 부평에는 부평극장과 금성극장이 있었는데 금성극장에 갔던 기억만 난다. 아마도 금성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로가 아낙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기도(극장 들어가는 곳을 지키는 사람)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난, 얼른 엄마 치마 뒤로 가 숨었다. 혹시 돈 내라고 하면 어떡하지? 우리 엄마는 내 거 내줄 돈이 없을 텐데. 그런데 기도 아저씨는 돈 내라는 소리는 안 하고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른들도 무서워서 오줌 지리는 귀신영환데 저 꼬맹이가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기도 아저씨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나를 들여보내준다. ‘분명 저 꼬맹이는 영화를 보다가 소리 지르고 뛰쳐나올 거야. 아냐, 기절할 지도 몰라.’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난 어른들보다 더 씩씩하게 영화를 끝까지 보았다. 사실 영화는 너무너무 무서웠다. 어른들은 눈을 가리고, 머리를 숙이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깜깜한 밤길, 돌아오는 길 내내 눈을 말똥말똥거리며 나는 영화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나쁜 일을 하면 귀신이 찾아와 해꼬지를 하는구나. 난 절대로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영화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어머니와 동네 아줌마들은 지난 밤 영화 보았던 일을 깔깔거리며 얘기한다. 그러면 어느새 그녀들의 어깨위에 내려앉았던 피곤이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영화는 모든 수고로움을 견디게 해 주는 삶의 활력소였다. 깜깜한 길을 비춰주는 샛별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언제 극장에 가려나 날마다 기다렸지만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정도였을까? 그만큼 먹고 사는 게 벅찼던 시대였다.
지금은 인터넷에 들어가 따각~ 클릭 한 번에 쉽게 표를 살 수 있고, 가까운 곳에 영화관이 즐비하여 보고 싶은 영화를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다. 쏟아져 나오는 영화의 종류는 또 왜 그렇게도 많은지. 삶의 활력소가 되었던 금성극장 자리에는 입맛을 돋구어주는 음식점들로 가득하다.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면야 그 무엇이 들어선들 어떠하리.
첫댓글 ㅎㅎㅎ.
어릴때 일찌감치 삶의 활력소를 준비해두었네^^
집에 턴테이블이 있어 이미자 노래에 빠져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불렀지요^^
그때 보았던 영화- 도금봉이라는 우리나라 원로여배우가 나오고 무덤에서 귀신이 나오고...찾아보니 1967년 개봉한 월하의 공동묘지...ㅋ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극장 가시는 아버지 따라 천호극장에서 너무나 에로틱하면서도 기묘한 영화를 봤었어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영화의 한 장면 (냉장고에서 쥐를 꺼내는 장면) 이 잊혀지질 않아 수없이 검색해서 찾았더니,
시대를 앞서간 감독 김기영의 '충녀' 라는 작품이었어요. 여배우는 윤여정이었고요. ㅎㅎ
어렸을 때 본 영화인데 생생히 기억하셨네요. 시대를 앞서가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