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조선(朝鮮)의 문자(文字)에 관(關)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에는 한문(漢文), 이문(吏文), 언문(諺文)이라는 세 가지 방식(方式)이 공존(共存)하였다고 말합니다.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이두(吏讀) 곧 이문(吏文)의 사례(事例)를 들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라는 책(冊)이 있습니다.
그럼,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는 무엇인가요?
일반적(一般的)인 자료(資料)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을 해석(解釋)한 책(冊)이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고사경(高士褧)과 김지(金祗)가 이두(吏讀)로 자구(字句)를 직해(直解)하고, 이것을 정도전(鄭道傳)과 당성(唐誠) 등(等)이 윤색(潤色)하여, 동(同) 4년(1395년)에 주자(鑄字)로 간행(刊行), 세종(世宗) 28년(1446년)에 평안(平安) 감영(監營)에서 중간(重刊)하였다.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다음으로, <대명률(大明律)>은 무엇인가요?
명(明) 나라 홍무(洪武) 연간(年間) 곧 1368년~1389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유유겸(劉惟謙)이 황제(皇帝)의 명(命)을 받들어 편찬(編纂)한 율서(律書)이다.
[출처=네이버 용어사전]
‘이두’(吏讀)에 관(關)해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두(吏讀)는 i) 넓은 의미(意味)로는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전체(全體)를 가리키며 향찰(鄕札)·구결(口訣) 및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고유명사(固有名詞) 표기(表記) 등(等)을 총칭(總稱)하여 향찰식(鄕札式) 이두(吏讀) 또는 구결식(口訣式) 이두(吏讀) 등(等)의 말로 쓰이기도 하나, ii) 좁은 의미(意味)로는 한자(漢字)를 한국어(韓國語)의 문장(文章) 구성법(構成法)에 따라 고치고 이에 토를 붙인 것에 한정(限定)하는 것이 보통(普通)이다.
이서(吏書), 이토(吏吐), 이투(吏套), 이도(吏道), 이도(吏刀), 이찰(吏札), 이문(吏文) 등(等)의 이칭(異稱)이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마지막으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 일부(一部)를 인용(引用)합니다.
권6(卷六), 호율(戶律), 남녀혼인조(男女婚姻條)
<한문(漢文)>
“凡男女定婚之初 若有殘疾 老幼·庶出·過房·乞養者 務要兩家明白通知 各從所願 寫立婚書 依禮嫂嫁 若許嫁女已報婚書及私約”
<이문(吏文)>
“凡男女定婚之初良中 萬一殘疾·老弱及妾妻子息·收養子息等乙 兩邊戈只 仔細相知疾爲良只 各從所願以 婚書相送 依例結族爲乎矣 女家亦 婚書乙 曾只通報爲旀 私丁音定約爲遣”
위의 <이문(吏文)>에서 이두(吏讀) 표기(表記)와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良中 → 아·아에·아의 [∼에, 처격(處格)을 나타내는 말]
等乙 → 들을 [‘들’은 복수(複數) 접미사(接尾辭), ‘을’은 목적격(目的格)]
戈只 → 이, 익기 [‘이’ 또는 ‘n’의 뜻으로 주격(主格)을 나타내는 말]
爲良只 → 얏기 [‘하여’와 같은 뜻]
以 → 으로 [조격(造格)의 뜻]
爲乎矣 → 오되(하되)
亦 → 여, 이 [여기서는 주격(主格)을 나타내는 말로 쓰임]
曾只 → 일지기 [현대어(現代語)와 같음]
爲旀 → 며(하며)
私丁音 → 사사로이, 아뎌 [현대어(現代語)와 같음]
爲遣 → 고(하고)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바로 위의 자료(資料)에서는, <대명률(大明律)>의 일부(一部) 조문(條文)의 한문(漢文)을 이두(吏讀) 곧 이문(吏文)으로 바꾼 사례(事例)를 보여줍니다.
또한 조선(朝鮮) 왕조(王朝)의 초기(初期)에도 ‘이두’(吏讀)가 사용(使用)되었음을 분명(分明)히 보여주는 사례(事例)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한문(漢文)이든 이문(吏文)이든, 한자(漢字)를 전혀 모르면 도저(到底)히 이해(理解)할 수 없는 조문(條文)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위에 인용(引用)된 <이문(吏文)>을 살펴보면, 비록 한자(漢字)를 빌려 쓰긴 하였지만, 우리말의 어순(語順)과 비슷하도록 필요(必要)한 곳에 조사(助詞) 등(等)을 표기(表記)하였으므로, 한문(漢文)보다는 그 조문(條文)을 이해(理解)하기 쉽습니다.
한편,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언자’(諺字)가 창제(創製)된 이후(以後)에는 이를 어떻게 표기(表記)할 수 있었을까요?
<대명률(大明律)>의 언해본(諺解本) 곧 언문(諺文)으로 작성(作成)된 책(冊)이 있었을까요?
참고(參考)로 언급(言及)하면 <훈민정음언해(訓民正音諺解)>, <소학언해(小學諺解)>,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두시언해(杜詩諺解)>,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등(等)의 언해본(諺解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기(早期)에 ‘한문’(漢文)과 불완전(不完全)한 ‘이문’(吏文)이 ‘언문’(諺文)으로 완전(完全)히 대체(代替)되었을까요?
불행(不幸)하게도,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理由)는 무엇일까요?
일반적(一般的)으로, 조선(朝鮮)의 지식인(知識人)들이 언문(諺文)을 배척(排斥)하였고, 게다가 언문(諺文)은 공적(公的)인 문서(文書)보다는 사적(私的)인 문서(文書)에 주(主)로 이용(利用)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문(漢文)이 조선(朝鮮)을 대표(代表)하는 공식적(公式的)인 표기(表記) 방식(方式)이라면 조선인(朝鮮人)들이 한문(漢文)을 그대로 읽고 이해(理解)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障碍)가 없었을 터인데, 무슨 이유(理由)로 ‘이문’(吏文)이나 ‘언문’(諺文)이 별도(別途)로 필요(必要)하였을까요?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한문(漢文), 이문(吏文), 언문(諺文)이라는 세 가지의 표기(表記) 방식(方式)이 오랫동안 공존(共存)하였던 이유(理由)가 무엇일까요?
<대륙사관(大陸史觀)>에서 그 근거(根據)를 찾는다면,
조선(朝鮮)의 중앙(中央) 황제국(皇帝國) 곧 중국(中國)에서는 한문(漢文)만을 사용(使用)하였고, 조선(朝鮮)의 지방(地方) 제후국(諸侯國) 곧 동국(東國)에서는 이문(吏文)이나 언문(諺文)을 이용(利用)하였을까요?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이 조선(朝鮮)의 중국(中國)에서 만들어진 한문(漢文) 책(冊)이라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는 조선(朝鮮)의 지방(地方) 제후국(諸侯國)을 위(爲)하여 이문(吏文)으로 쓰여진 것일까요?
조선(朝鮮)의 제후국(諸侯國) 백성(百姓)들은 모두 우리말과 비슷한 언어(言語)를 사용(使用)하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