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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55,10-11
복 음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학생이 미국에 유학 갔습니다.
큰 꿈을 품고서 유학하러 왔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너무 힘들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타고 가던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 학생을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마침 저 멀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Would you mind…. helping me?”(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살려주시겠어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 말을 듣고서 과연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도움을 줬을까요?
말을 들었으면 도움을 주기 위해 왔겠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는 관심을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같이 빠진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Help me!!!!”(살려주세요!!!)
그제야 지나가는 사람은 이 목소리에 반응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위급할 때는 정중한 말보다 간단하고 간절함이 표현되는 말이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님 앞에 최대의 예의를 갖추고 기도해야 할까요?
때로는 간절한 마음은 정중함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그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하느님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그들은 ‘야훼’, ‘아도나이’ 등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근엄하게 통치하는 임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짐으로 하느님과의 통교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며 형식적인 ‘빈말’을 되풀이했던 기도의 모습에서,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기도할 때 ~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 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7절)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 내려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때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면 더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용서는 그래서 잘못한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이제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벗님 여러분은 기도를 많이 하시지요?
여러분에게 있어 기도란 무엇인가요? 뭐라고 정의하고 싶으세요?
기도에 대해 수많은 정의와 방법들이 존재하는데,
저는 '기도란 하느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여깁니다.
대화가 오갈 수도 있고, 침묵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을 수도 있고,
마음과 정감을 나누며 일치 안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 중 가장 공평하면서,
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라도 만들어 낼 수 없고
필요에 따라 늘이거나 줄일 수 없는 창조주만의 선물이지요.
또 시간은 종자 씨앗과 같아서 누구는 재물을 위해, 누구는 학문을 위해,
누구는 자아실현을 위해, 누구는 가족을 위해 사용합니다.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곳에 쏟아붓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대개는 투자한 만큼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만큼 인간 삶에 방향성과 내용을 결정하는 '시간'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주인이신 하느님과 쓰고 싶어, 그분 앞으로 들고 와서
그분과 함께 엮어가는 여정이 저에게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감지하고,
마음을 돌려 그분을 향하는 순간 이미 기도는 시작됩니다.
실은 먼저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찾을 일이 생긴 것이지만,
벅찬 세상사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사느라 미처 갈망의 핵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꾸 남의 다리를 긁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먼저 손 내밀어 건드리신 것이지요.
이미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아시기에 당신과의 만남으로 초대하시는 겁니다.
"넌 내가 준 그 선물 보따리를 나와 함께 풀러 가야 할 사람이구나!" 하면서요.
"아버지께서는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우리가 하느님 앞에 다가오는 순간, 이미 그분은 우리가 온 까닭을 알고 계십니다.
밥이 필요한지, 능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은 게 있는지,
아니면 그저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지...
마치 자신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오는 아기에게 지금 젖이 필요한지,
기저귀를 갈고 싶은지, 뭐가 무서운지, 그저 안기고 싶은지 한눈에 아는 엄마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기도 할 때에 ...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그러므로 기도할 때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아니, 그분께는 필요치 않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말이 필요한 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우리의 욕구, 슬픔, 좌절, 청원 들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바라야 하는 내용이
충만히 들어 있어 가장 완전한 기도라 하지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 우리가 살아갈 양식과 관계성과 죄악에서의 보호.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탐욕이고 이기주의일 겁니다.
'하느님 앞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본질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요.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하느님 말씀의 힘이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이루어진 모든 것에게 "보시니 좋다"고 말씀하셨지요.
이미 자연과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뭔가 한참 모자라는 것 같아 자꾸만 하느님께 더 청하고 더 조르고 싶어 하는 우리도
실은 있는 그대로 하느님 말씀의 결과물이기에 그분 뜻이 완수된, 완수되고 있는 존재입니다.
완수되어 가는 과정이라면 누구보다 완수에 관심을 기울이실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드시 완수하고야 만다." 이 말씀 안에 깃든 하느님 의지가 느껴지십니까?
이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의 강력한 바람이고 신념입니다.
그 의지가 곧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시간 안에 함께 현존하며 그분과 현재를 공유하고,
오로지 그분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오늘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골자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말씀이 완수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를 잘 하십니까?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주로 어떤 기도를 하시나요?
어떤 장로님은 정말 기도를 멋지게 하시더군요.
하시는 기도를 듣고만 있어도 '아멘'이 저절로 나옵디다.
어떤 자매님은 묵주기도를 하루에 백단을 바치더군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절을 삼천 배 올렸다고 하더군요. 저는 가끔 33배를 하는데도 힘들던 데...
예수님은 오늘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시네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기도는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네요. 오히려 마음을 담아 단순하게 기도하라네요.
쓸데없는 것 주절주절 청하지 마라네요.
하느님이 이미 필요한 것 다 알고 계신다고요.
그냥 하느님께 찬미와 칭송을 드리고 소박하게 이 험난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착한 자녀로 살아갈 은혜만 청하라네요.
그 나머지는 사실 다 우리의 욕심이지요.
오늘 단순하게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를
각자 벗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정성껏 세 번만 바쳐 보실래요~~^^
기도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하느님을 바꾸려고 기도하지 말고 자신이 바뀌려고 기도해야 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바라고 청할 때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주님의 기도는 건성일 때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묵상하지 않고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변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변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클립으로 만든
‘무게만 25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사는 아주머니’ 사연이 나옵니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누군가가 흘려보내는 전자파 때문에
온 집안 집기들을 비닐로 싸놓고 자신은 클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 치마를 입을 때 정전기가 날 때 클립을 꽂아두었더니
정전기가 줄어든 것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집 안에 전자파는 다른 집보다 적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왜 이런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것일까요?
전문가는 아주머니가 집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한 번 만나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한 남자가
스토커처럼 아주머니를 괴롭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집 안에서 안 좋은 전자기파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만약 힘들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혼자 방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도 혼자 방치되었던 기억이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동영상을 보니 아주머니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십자고상도 나오고 성모상도 나옵니다.
성당에서 미사보를 쓰고 찍은 사진도 보이고 피아노 치는 모습,
그리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까요?
어쩌면 분명 주님의 기도만 제대로 바쳤어도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덜 무서워해도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 생각하여 자기 죽음에 대해 걱정할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며
육체의 생존보다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며,
클립으로 된 무거운 갑옷이 아닌 영적인 힘을 청하게 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며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며,
다시는 아버지를 두고 내 생존 문제로 두려워하지 않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결국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자아의 압제에서 해방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만 의미를 되새기며 바쳐도 하루하루 분명히 달라집니다.
추측건대 이분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주로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는 관심을 둘 에너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 굳게 믿고 싶어서 부모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부모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는 자기 욕구에만 집중하여 부모의 뜻에 귀를 막습니다.
그렇게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이가 이제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욱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생의 육아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질투 폭발, 동생 스트레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질투 폭발입니다.
엄마는 딸을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만,
딸은 모두의 관심이 동생에게 간 것만 같아서 서럽습니다. 그래서 생떼를 부립니다.
이때 오은영 박사의 꿀조언은 ‘동생 육아에 누나도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인형을 사줘서 조금씩 동생을 안고 다독이는 연습을 하게 하고
조금씩 엄마가 보여주는 쉬운 일부터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나는 그렇게 동생의 육아에 동참하며 자신도 가족의 한 일원임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친딸이 아니면 동생을 잘못 건드려 다치게 될까 봐 동생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육아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한 형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 굳세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다 알려주시고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라고 되풀이하십니다.
이웃은 나의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느님 육아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는 평화 때문에 이제 나의 욕구로 생떼를 부리기보다는
감사하여 주님의 뜻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청하며 진정 그리스도처럼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향하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으로 기도할 때야만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확신이 더 커지고,
그러면 오직 주님의 기도 말 안에 자녀가 청해야 할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들을 주님께 청하면
그 주님의 뜻이 나의 것이 되어 그분의 본성대로 변화합니다.
기도를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 뜻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만 청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 자녀인지 아닌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믿음은 내가 이웃을 사랑할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 갇혀 외로운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 절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