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立4.19民主墓地에 가다
-3학4반 朴東薰추모- -임 강 호-
지난 10월29일이다. 일산에서 아침 일찍 지하철3호선을 탔다.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 수유역 6번 출구로 나오니, 1119번 마을버스가 기다린다. 15여분쯤 달리니 벌써 4.19묘역에 도착한다. 집합시간은 11시. ‘民主聖域’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4.19탑 앞에 이미 尹雄燮 군이 와 있다. 조금 있다가 鄭基鈺도 도착. 잠시 후 정문 쪽에서 田永云이 내려왔다. 위에 이미 姜顯中과 辛成梧, 方民煥, 柳喜馨, 朴魯信군이 도착해 있다고 전한다. 하얀 弔花바구니가 두 개가 보였다. 전영운이 강남 집에서 택시로 운반해 왔단다. 정성이 크다. 우리는 함께 4.19성역을 걸었다. 기념탑에 이르러 제단위에 조화를 올려놓고 방민환의 인도로 묵념. 기념탑 왼쪽 묘역으로 발길을 옮기니 거기 박동훈의 묘가 있다. 그 앞에서 또 하나의 조화바구니를 놓고 다시 묵념. 묘비 뒷면에는 ‘1941년 12월2일에 나서 1960년 4월19일 경무대 앞 시위 중 총상으로 같은 날 국립의료원에서 숨졌다’고 새겨져 있다. 아버지 박원익, 어머니 김수정이라는 성함과 함께.
“자유를 불러올 정의의 폭풍이여,
눈부신 젊은 힘의 해일이여.
하나,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아무리 빛나기로니
그것으로 부모들의 슬픔을 달래지 못하듯,
내 무슨 말로써 그들을 찬양하랴.
죽음은 죽음
명목(暝目)하라.
진실로 의로운 혼령이여.“
묘역 입구 석벽에 새겨진 朴木月 시인의 추모시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라는 싯구를 되뇌며 계단을 올라 유영봉안소(遺影奉安所)로 갔다. 중앙에서 좌측으로 조금 비켜선 자리에 朴東薰의 영정이 진열되어 있었다. 58년 전, 스무 살 꽃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4.19의 비극이 없었다면, 그도 우리들처럼 아내와 손자 손녀들과 이승의 크고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상념에 빠졌다.
유영봉안소를 내려오다 보니 나란히 줄지어 선 묘 가운데 여중생의 것도 있었다.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라는 유서.
이 글을 남긴 학생은 안타깝게도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이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이만 그치겠습니다.’라는 황급한 끝맺음이 슬픔을 더했다. 朴木月의 추모시에 동화된 나는 마치 그 소녀의 아버지나 된 듯 가슴이 저렸다.
우리가 묘역을 일주하고 나오니 이미 점심시간. ‘4.19民主墓域’이라고 새겨진 돌탑 앞쪽에 식당 ‘소나무 집’에 들어갔다. 나주곰탕과 평양냉면이 꽤 유명한 듯 큰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막걸리와 맥주, 소주가 곁들여진 점심-고기 반 국물 반인 나주 특곰탕-도 먹었다. 이날 거한 주류와 특곰탕은 신성오 대사가 제공했다. 선약이 있다며 미리 떠난 방민환과 유희형을 제하고 남은 친구들은 근처의 예쁜 카페 ‘아티앙스’에 들어가 긴 시간 박동훈과 화동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얘기하고, 또 엉망인 현 정국에 대한 규탄과 저주를 토하며 커피시간을 끌었다. 조화를 준비한 전영운 교수와 거한 점심과 커피를 제공한 신성오 대사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데, 영원한 우리 4반의 반장, 박동훈은 스무 살 풋풋한 얼굴 그대로 거기에 있었네. MEMENTO MORI !
(위 글은 재작년에 올렸던 글입니다.)
첫댓글 . . . 옛날 화동 언덕시절 박동훈의 밝았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