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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면서
古史不欲觀(고사부욕관)-지나간 역사는 보고 싶지가 않아
觀之每迸淚(관지매병루)-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네
君子必困厄(군자필곤액)-군자(君子)들은 반드시 곤액을 당하고
小人多得志(소인다득지)-소인(小人)들은 득세한 자들이 많으니.
垂成敗忽萌(수성패홀맹)-성공했다 싶으면 어느새 패망이 싹트고
欲安危已至(욕안위이지)-안정 될 듯 하면 이미 위태함이 따르네.
從來三代下(종래삼대하)-삼국대시대 이후로는 오늘날까지
不見一日治(부견일일치)-하루도 제대로 다스려진 적 없다오.
生民亦何罪(생민역하죄)-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冥漠蒼天意(명막창천의)-저 푸른 하늘의 뜻 알 수가 없네.
旣往尙如此(기왕상여차)-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而況當時事(이황당시사)-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김육(金堉)
신문기사 주워 모은 김종필 전 총리의 인생 이삭 바구니 !
아래 내용은 김종필 전 총리의 신문에 난 기사들을 눈에 보인대로 모은 것이다.
언론이 권력의 영향을 받거나 글 쓰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국민이 정치에 대한 찬성과 비판은 TV나 신문등 언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현실이다.
SNS의 글들도 언론의 정보를 바탕에 두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전후(戰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안은 한반도 민족을 좌파와
우파로 갈라놓았다.
*1946년 이승만은 통일정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읍발언(井邑發言)”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3.8선을 넘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위해 평양 남북연석회담에 참석했으나 김일성의 거부로 실패한다.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第一共和國)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범하여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이 체결되었고 3.8선은 휴전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5년 9월 흥사단을 포함한 범야권이 결집해 자유당을 건제하는 민주당이 탄생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조병옥 중심의 구파계열과→김영삼
장면, 박순천 중심의 신파계열→김대중 으로 구분되었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의 3선개헌 부정선거로 영구 집권하려는자유당에게 국민이 항거하여 4·19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 자유당은
해산되었다.
*1960년 8월 19일 허정(許政) 과도정부의 주도하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최초의
내각책임제 정부가 출범하여 국무총리에 장면(張勉)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으로
구성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국가재건보다 민주당 구파와 신파간의 권력투쟁으로 세월을
보내었고 국민경제는 점점 더 어려웠다.
당시 대한민국 GDP는 60~70달러였다.
대한민국의 온 산하(山河)는 배고픈 국민들이 풀뿌리를 캐고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땔나무의 채취로 온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농업은 경지정리(耕地整理)와 종자개발이 안되었고 비료공장이 없어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한 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이 일어났다.
필자는 5.16사건을 “5.16혁명(革命)”이라고 주장한다.
“혁명(革命)”의 사전적(辭典的)의미는
천명(天命)이 바뀐다는 뜻으로,
기존 헌법(憲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基礎), 사회(社會)의 제도(制度),
경제(經濟)의 조직(組織) 따위를 근본적(根本的)으로 고치는 일이다.
“5.16혁명”은 먹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결한 혁명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역이기전(酈食其傳)”에서 말하기를
王者以民爲天(왕자이민위천)-임금 노릇을 하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백성은 밥(食)을 하늘로 삼는다고 하였다.
衣食足而後知榮辱(의식족이후지영욕)-입고 먹는 것이 풍부한 후에 영광과 욕됨을 알고
衣食足而後知禮義(의식족이후지예의)-입고 먹는 것이 풍족한 후에야 예의(禮儀)를 안다 고 하였다.
지금 먹는 것이 남아도는 세대(世代)가 들으면 이상한 말이겠지만,
밥을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안 먹으면 생명을 유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도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고 했다.
“먹을 게 있어야 평상시의 마음이 유지된다”는 이 진리는 부정할 수 없다.
5.16혁명이 일어날 때는 이상(理想)이나 미래(未來) 행복(幸福)의 꿈은 없고
당장 아침에 배고픈 것 해결이 문제였다.
지금 65세 이하 되는 사람들은 실감 못한다.
의식주(衣食住)가 해결안 되면 그어떤 IT산업도 4차 5차산업도 불가능하다.
오늘날 반려동물이 사람의 자리를 차지 한것도 먹는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5.16혁명은 오늘날 선진 대한민국의 초석(礎石)을 이룬 천지개벽이다.
국민보다 권력을 향한 파쟁(派爭)정치의 패르다임(paradigm)을 바꾸어 놓았다.
국가체제가 자유민주공화국이라도 국민이 헐벗고 굶주리면 의미가 없다.
독재를 해서라도 국민이 경제적 안보적 행복을 누리면 그것이 국민을 위한 국가다.
오늘날 국민소득 3만불의 경제성장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는
5.16혁명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바탕에서 이루어 졌다.
국민소득 100달러도 안되던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앞으로 대한민국국민은 가정마다 자동차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를 가진 국민이
될 것이라고 필자의 귀로 직접 들었다.
그때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고 꿈같은 소리라고 콧방귀를 쳤다.
국가지도자는 이정도의 비전(Vision)은 있어야 한다.
세종(世宗)과 정조(正祖)가 국가 장래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조선조 500년과 대한민국 100년사를 통하여 세계경제 12위의 경제와 안보국력의
강국이 된 적은 없었다.
말끝마다 “유신독재”라 칭하는 5.16군사혁명 정권이 GDP3만달러 토대를 만든 것이다.
박정희 이후로 어느 정권도 대한민국을 혁명적으로 업그레이드(upgrade)한 정권은 없다.
우리시대의 중국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주장하면서
“쥐를 잡는 데는 흰 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상관없다”
어떤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되다.
어떤 방법이든 국민을 잘 먹이고 풍족하고 행복하게 하면 그것이 잘하는 정치라고
하였다.
우리는 역사에서 정조(正祖)를 위대한 군주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조도 유학자(儒學者)였다. 유학적 이상사회의 기본은 경제적 평등이라 보았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처럼 다 같이 생산하고, 다 같이 나누자는 식은 아니다.
최소한 한 가정이 정상적인 생활을 스스로 유지할 자율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정조(正祖)가 수원 화성을 만들 때 범람하던 개천을 막아서 큰 저수지를 만들고,
그 아래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수원 백성에게 나누어 줬다.
백성의 중산층화를 지향했던 것이었다.
중산층이 된 백성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어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봤다.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정권까지는 중산층이 있었는데 그 후로 차츰차츰 중산층이
없어졌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이 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역사는 긍정과 부정이 혼합된 기록이다.
긍정도 역사고 부정도 역사이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후세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현판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될 때 일본정부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은 매국노 남정철(南廷哲)이 쓴 글씨라 한다.
“대한문(大漢門)”을 볼 때마다 매국노(賣國奴)를 생각한다.
덕수궁은 강제합병의 원한을 보여주는 궁궐이다.
이것이 역사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이다.
경(經)자는 갑골문자(甲骨文字) 해석으로 실타래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글자다
곧 국사(國事)는 복잡한 실타래를 지혜롭게 풀어간다는 의미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단군 조선(朝鮮)부터 고려(高麗)까지 다룬 조선 전기의 역사서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중국 북송(北宋)의 역사서다.
역사서에 “鑑-거울감자”를 사용한 것은 지나간 역사를 거울삼는다는 뜻이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역사서다.
김종필 전 총리는 5.16 혁명의 한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5.16 혁명을 기획(企劃)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김종필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한 시대를 걸어간 인물의 발자취를 이삭바구니에 담아 본 것이다.
그도 사람이기에 파란난장한 이생을 다한 것이다.
Life passes and history remains !
인생은 지나가고 역사만 남는다 !
는 말이 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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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문기사 모음이다
▲1962.06.22 동아일보
한일간의 청구권 문제와 경제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1963. 2.25 조선일보 기사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민정(民政) 참여를 위한 민주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한일회담과
창당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최고회의 고위 장성들은 사실무근(事實無根)의 각종
의혹사건을 유포하며 혁명주체세력을 분열시키는 등 정국불안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김종필(JP) 신당 창당준비위원장은 속죄양(贖罪羊)을 자임(自任)하고 민주공화당
창당대회를 하루 앞둔 1963. 2.25.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으로
외유(外遊)길에 오른다.
▲2010.04.18. 조선일보
2004년 정계은퇴를 하면서 했던 말, 정치는 허업(虛業)이야!"
▲2011.05.15. 조선일보
김종필을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실질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鄭道傳)과
중국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을 도운 장량(張良)에 비유하다
▲2011.05.15. 조선일보
장량은 추격대가 찾을 수 없는 장가계(張家界)로 도망가서야 80세 무렵까지 살 수 있었고,
정도전은 56세에 이방원 칼을 맞고 죽었다.
JP는85세인데도 청력과 기억력을 유지하면서 5.16 일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으니
장량과 정도전보다 좋은 팔자 같다.
▲2013.03.20.동아일보
1970년대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JP’ 영문 이니셜 호칭이 처음 등장했다
▲2013.11.08. 조선일보
9選 JP 내달 5년만의 국회外出
▲2013.12.10. 동아일보
JP, 5년만에 국회 찾아 “박정희 떠올리면 눈물이…”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0일 국회를 방문했다. 자신의 아호를 딴 기념사업회인
'운정회(雲庭會)'창립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13.12.11. 조선일보
박정희 대통령, 경제성장 봤으면 엉엉 울었을 것
▲2013.12.13. 조선일보
킹 메이커 JP의 기념관
JP의 아호를 딴 ‘운정회(雲庭會)’가 10일 출범했다.
▲2014.09.25. 조선일보
부인 병상 지키는 88세 김종필
간병김종필(88) 전 국무총리가 최근 병원에 입원한 부인 박영옥(85) 여사 간병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5.01.10. 조선일보
구순(九旬)잔치 서둘러 끝내고 돌아간 JP의 아내 사랑
작년 9월 입원한 박영옥씨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빵 사가야지"
"입원해 있는 아내가 빵을 좋아해. 빵을 사서 돌아가야지."
▲2015.01.24. 조선일보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구순(九旬)을 맞아 만화 일대기 '불꽃'을 펴낸다.
"대통령 할 생각 한번도 안했다"
국민은 호랑이야, 맹수라고… 열번 잘해도 한번 못하면 물지"
▲2015.01.26. 조선일보
정치인 김종필이 올해 90세를 맞았는데 자찬(自撰) 묘비명이 신문에 소개되었다.
'年九十而知八十九非(연구십이지팔십구비).'
"나이 90이 되어 생각해보니 지난 89세까지가 모두 헛된 인생이었구나"이다.
▲2015.01.30. 조선일보
JP가 회고록을 써야 하는 이유
JP는 국민의 공감을 얻고 역사에 그렇게 기록되려면 무엇보다 회고록을 써야 한다.
그것도 사건들의 비화(秘話)나 털어놓는 정치사적 회고록이 아니라
당시 자신의 행동 뒤에 있던 생각까지 담아내는 사상사적 회고록을 써야 한다.
▲2015.02.21. 중앙일보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 별세
김 전 총리와는 소문난 잉꼬 부부였다.
2008년말 김 전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박씨는 남편 병간호에 전념했다.
▲2015.02.22. 조선일보
먼저간 부인이게 내가 곧 따라 갈 테니
▲2015.02.22. 조선일보
“거기 (부여 장지에) 나하고 (부인하고) 같이 나란히 눕게 돼 있다.
먼저 저 사람은 가고, (나도) 곧 (따라) 갈 거다.
일찍 가는 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2015.02.22. 조선일보
64년前 결혼반지, 아내 목에 걸어주며 보낸 JP
▲2015.02.22. 중앙일보
김종필 부인이 숨을 거두는 순간에 입맞춤
▲2015.02.23. 조선일보
마지막까지 손잡고 있어… 입맞춤하자 부인 숨 거둬
마누라는 호랑이이자 선생님… 보답도 못했는데" 눈물 쏟은 JP
같이 한자리에 눕고 싶어 국립묘지 선택 안해, 나도 곧 갈거예요 외로워서…"노정객(老政客)은 아내의 영정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2015.02.23. 조선일보
남편은 결혼 금반지로 목걸이를 만들어 숨진 아내 목에 걸어줬다.
빈소에서 흐느꼈다.
"이렇다 할 보답도 못했는데 나를 남겨놓고 세상을 뜨다니."
박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되새기며 남편의 길을 따른다"고 했다.
▲2015.02.26. 조선일보
아내 마지막 길에 종일 침묵한 JP
▲2015.02.26. 조선일보
김종필 전 총리, 장례식 하루 뒤에도 식사 거른 채 부인 영정만 바라봐
▲2015.02.27. 조선일보
與野 잊게 한 JP
▲2015.03.02. 중앙일보
"나폴레옹 혁명·사랑 배우려 했지" …
5·16으로 세상 뒤집어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고 그 진실 합작했다
▲2015.11.30. 앙일보
병마와 싸운 7년, 골프채 다시 잡은 JP
2008년 12월, 여든세 살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순천향병원에 급히 연락해 입원했다. 정치 인생의 장면마다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가 발병 요소가 됐겠지만 그 며칠 전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 부여 사람들과 골프를 한 뒤 술자리가 주원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고향 사람들이 건네는 술을 많이 받아 마셨고, 며칠 뒤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2016.03.10 조선일보
김종필 전 총리 웃으면서 대답없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은 한 시대의 기록지
▲2016.03.10. 조선일보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10일 ‘김종필 증언록’ 출판 기념회에서
“이제 지난날의 악연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전부 용서하려 한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드린 일이 있다면 모두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2016.3.4 중앙일보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증언록
▲2016.11.15. 동아일보
JP “5000만이 달려들어도 하야 안할 것…
고집쟁이 박근혜 대통령, 내말도 전혀 안들어”
▲2016.11.15. 조선일보
JP, 김종필 전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촌 형부다.
작년에 작고한 부인 박영옥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신적으로 존경하던 형 상희씨의
첫딸이다. 상희씨는 해방 후 정치 혼란 속에서 비명에 갔다.
박 전 대통령은 그런 조카를 JP에게 소개했다.
박정희와 JP의 관계는 혈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인생의 애증(愛憎)이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2018.06.23. 조선일보
나이 90에 이룬 것 없음에 한숨 짓는다"…
부인 세상 떠난 뒤 묘비명 써놨던 JP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의 전문.
「思無邪(생각이 바르므로 사악(邪惡)함이 없음)」를
인생(人生)의 도리(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먹을 게 있어야 평상시의 마음이 유지된다)」을
치국(治國)의 근본(根本)으로 삼아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具現)하기
위하여 헌신진력(獻身盡力) 하였거늘 만년(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나이 90이 되어 생각해보니 지난 89세까지가 모두 헛된 인생이었구나)」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웃으면서 대답하지 않는다)」하던 자(者)-
내조(內助)의 덕(德)을 베풀어준 영세반려(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명(銘) 雲庭 自僎(운정 자선)
書(서) 靑菴 高(청암 고)
▲2018.06.23 조선일보
김종필(金鍾泌·92) 전 국무총리가 23일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마지막 3金 떠나다…'영원한 2인자' 김종필 별세
▲2018.06.24. 조선일보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작고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 “거물 정치인이라 하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며 “(김 전 총리는) 실패한 인생이었다”고 했다.
▲2018.06.25. 중앙일보
“내 입이 밥을 초청 안 해” JP 마지막 유머
▲2018.06.25. 중앙일보
애주가로 알려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사랑한 술은
스카치위스키인 발렌타인 17년산이었다.
그는 23일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018.06.25. 중앙일보
기자가 영면 사흘 전 JP 자택 찾아
미리 쓴 부음기사 들려주자 눈물
▲2019.04.13. 조선일보
JP의 '50년 정치 사랑방', 신당동 자택 팔렸다
김 전 총리의 아들 김진(58) 운정장학회 이사장은 지난 11일 페이스북에 "평생을 부모님과 함께했던 청구동(현 신당동) 집을 오늘 완전히 인도했다"며 "마지막으로 집에 절하고 철문을 닫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라고 썼다. JP의 신당동 자택은 대지 면적 645㎡(195평), 연면적 627㎡(190평)의 지하 1층, 지상 2층 양옥 주택이다. JP 측근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12일 본지 통화에서 "남매가 경제적인 이유로 신당동 자택을 매각한 것으로 안다"며
"JP가 (재산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하고 거의 빈손으로 떠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