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군 여행] 소론의 적자 해은구택...........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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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봉화군 여행] 소론의 적자 해은구택...........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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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여행기에서 법전면 법전리는 버저이 진주강씨(晉州姜氏)집성촌으로 유명하다고 유랑자가 소개를 하였다.
이 진주 강씨 종택에서 전면 직선거리로 40여m쯤 떨어진 곳에 해은 구택이 자리 잡고 있어 내친김에 유랑자가
들러 보았다. 널따란 뜰 같은 평지에 자리 잡은 구택은 전형적인 조선의 주택으로 사랑채를 오른쪽에 두고 중
문채를 왼쪽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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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열려있어 유랑자는 조심스럽게 중문채를 지나 안으로 얼굴을 내밀어 본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0
호로 지정된 구택으로 봉화 해은구택(海隱舊宅)은 조선후기의 저명한 소론계(少論界) 성리학자 해은 강필효(姜
必孝)(1764~1852) 선생이 살던 옛집이다. 본시 이 집은 해은 선생의 조부인 강곽이 1750년에 건축했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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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충청관찰사 법천 강윤(姜潤)이 지은 대족제곽신제상량문(代族弟 新第上樑文)에 잘
나타나 있다. 집 터로 보아 처음 지을 때의 집 규모는 지금보다는 훨씬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집의 구조는 ㄱ자형
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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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사랑채는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곧 복구 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앞에 있던 마구간이 딸린 행랑채는 6.25때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대문이 달려 있는 것으로보아 역시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정침은 정면 6간 측면 6간반 규모의 “口“자형 건물로 복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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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국(메리골드) 꽃말: 냉혹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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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국(메리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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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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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중문칸 우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좌측 2간은 전면에 퇴칸을 둔 2통간 사랑방을, 우측에는 마루방을 두
었으며 사랑방 뒤에는 작은사랑을 두었다. 안채는 2통칸의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우측에는 건너
방과 상방을 두었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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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사랑채는 근래 보수가 되어 나름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의 좌측과
우측, 후방을 두른 돌담이 한옥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돌담은 역시 근래에 보수한 것으로 깔끔하게 단장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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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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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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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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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에 따르면 강필효 선생이 태어날 때 생모가 기이한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효성이 지극
했으며 자질이 범상치 않았다. 효경과 소학을 읽고 나서는 어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정도의 뜻을 지녔다. 특
히 맹자에 나오는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구절을 읽고는 크게 감동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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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는 십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러나 장성해서 과거시험을 보러 시험장에 갔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나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과거시험은 실력을 겨루는 곳이 아니라 이익과 욕망을 다투는 곳이라
고 눈에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 에만
전념했고, 집안에서도 그러한 뜻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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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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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 강필효 선생은 18~19세기를 살다간 전형적인 영남의 학자로서 일생을 학문연구에 매진하며 방대한 분량
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퇴계학맥을 이은 영남의 본고장에서 이례적으로 소론의 색목을 가지면서도 영남 남
인들과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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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법전 강씨’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꼽히는데, ‘법전 강씨’는 병자호란 후 강흡, 강각 형제가 태백산 아래 법
전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문한과 벼슬이 끊이지 않는 명문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생겨난 별칭이었다. 형인 강
흡의 계열이 노론으로, 아우인 강각의 계열은 소론으로 각기 색목이 나뉘어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활동 지역
과 혼맥 등을 바탕으로 영남의 학풍, 분위기와 긴밀히 밀착하여 영남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여타 동당(同
黨)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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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잔화 꽃말 - '이별의 슬픔'( 비탄, 실망,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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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잔화 꽃말 - '이별의 슬픔'( 비탄, 실망,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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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은 강각의 후손으로 전통주자주의를 강하게 고수하며 대명의리론을 견지하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주서
천(朱書薦)에 올랐으며 그가 남긴 대부분의 저술들 또한 경전과 성리서에 관계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후학 지도와 학문 연구에 매진하면서 해은문집, 경설도, 사유록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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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해은은 명재 윤증, 소속 윤광소에 이어 소론의 적통이 되었고, 또 이를 제자인 과재 성근묵에게 넘겨주
었다. 학문적 성격만을 놓고 본다면 순정주자학풍이라 이를 만하다. 해은구택은 척곡리 1185번지에 소재한 법
계서실(法溪書室)(문화재자료 352호)과 함께 해은 선생의 대표적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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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9toB/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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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법전면 양촌길 29
(지번)법전면 척곡리 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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