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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 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 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지켜지지 못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결심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유혹의 정의>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개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개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 두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옛날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거듭 던지고 계십니다.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정성껏 파스카 성제에 참여하고 몰입할 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인류 구원 사업의 전체적인 여정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풀톤 쉰 대주교님(1895~1979)의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묵주기도가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성체성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미사와 기도의 핵심 정신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될 때,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고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1)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된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사도들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킨 일이었고, 교회에 심각한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최후의 만찬 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19-20)
이 말씀에서 ‘일’은 제자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지는 등 예수님 수난 때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들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당신의 수난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이 사도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신 일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물으신 것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 때문에 가장 크게 상처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베드로 사도 자신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남깁니다.
고해성사는 죄의 용서와 죄의 상처 치유를 겸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치유의 성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알려 주신 일이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신 일이고, 그를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신 일, 즉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이 취소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고해성사로 표현하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보속’을 주는 단계에 해당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크게 통회했습니다(루카 22,62).
고백과 용서는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만 나타나셨을 때(루카 24,34; 1코린 15,5)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너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느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보속을 주신 말씀입니다.
그 보속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실행해야 할 보속입니다.
3)
예수님의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씀을 보면, 처음 두 번은 사랑이라는 말에 ‘아가페’를 사용하셨고, 세 번째는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다 ‘필리아’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성경에서만 사용된 단어이고, 주로 이타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필리아’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던 단어이고, 사랑을 말할 때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와 ‘필리아’가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되어서 사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이 ‘아가페’에서 ‘필리아’로 바뀐 것과 베드로 사도가 ‘필리아’로만 대답한 것 자체에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실 때 ‘필리아’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0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라는 말씀의 ‘사랑’에 ‘필리아’를 사용하셨고, 또 요한복음 16장 27절,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라는 말씀에도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중간에 단어를 바꾸셨지만 뜻이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어를 바꾸신 것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랑 실천’을 보속으로 주셨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비록 겁에 질려서 잠깐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보속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과 고백에 대한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슬퍼한 것은 자신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삶의 좌우명>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시편 103.1)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진 지 10년째이지만 그 순례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4년 그해 7.11일에 저는 25주년 서품은경축을 지냈고, 이어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고, 10년 흐른 내일은 제 후임 빠코미오 원장수사의 25주년 은경축 미사가 내일 오전 11시 수도원에서 있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마침 지난밤 잘 아는 열심한 자매가 보내준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여행 기념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부부가 사이좋게 하나되어 활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 부부 참 멋집니다. 멋진 아드님-며느리 두신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아들 부부 위해 기도드립니다.”
축하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제목이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삶을 하루로 압축하면,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점검할 것을 권했습니다.
일일일생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저녁 6시에 해가 진다 생각할 때, 여기에 각자 삶을 압축해보면 어느 시점인지 들어날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역시 각자 삶의 시점이 들어날 것입니다.
물흐르듯 흐르는 세월입니다.
참 많이도 나눴던 예화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30분 정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현재의 시점 확인이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기서 나온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절실히 와닿는 제 좌우명입니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받은 “나이들면 인생은 비슷해진다”라는 흥미있는 내용이 자신을 한없이 겸허하게 만든 느낌입니다.
더불어 어제 “공동체는 사랑으로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이란 깨달음성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뤄지는 평준화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높아져 이런 일, 저런 일 모두가 비슷해집니다.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미치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미치기도 하여, 이렇게 저렇게 빼고, 더하다 보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게 되고 모두가 닮아가며 죽음 앞에서는 거의 평등합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겸손하고, 서로 사랑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이런저런 평준화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요한복음도 제1독서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이에 걸맞는 오늘 말씀의 배치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와 사도행전에서 로마로 압송될 바오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점차 가까워지는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이 베드로의 남은 생애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은 삶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아 하루하루 힘껏 주님을 사랑하며 사목자로서 양떼 사랑이 매진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이나 연거푸 같은 문답의 반복을 통해 베드로 마음 깊이 당신 사랑을 각인시킵니다.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추억이 있어 참 깊이 아프게 마음에 새겨졌을 문답입니다.
이에 곧장 주님은 결정적 중요한 당부를 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양들을, 형제자매들을 돌보라는, 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목자는 물론이요 신자들 모두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야 할 말씀입니다.
바로 형제자매들 사랑이 주님 사랑이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늘 되뇌며 살아야 할 공통적 좌우명입니다.
이에 필히 따라야 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요한 21,19)
이제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바오로의 좌우명은 아마도 다음 말씀이지 싶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2테살 4,7)
어느 자매가 남편 선종시 들었다는 마지막 유언 세 말마디를 남은 생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내심 주님께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 중 다음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이,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에 담긴 영원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을,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끝으로 동방 4대 교부 중 한분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의 마지막 거룩하고 신비로운 죽음의 실화를 소개합니다.
결코 우연한 죽음은 없고 자비로운 주님의 섭리하에 이뤄지는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3개월 동안의 아주 혹독한 여행 끝에 순교자 경당, 바실리스쿠스에 도착합니다.
요한이 도착하기 전 순교자 경당의 주보 성인인 바실리쿠스가 나타나 요한에게 말합니다.
"형제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일 우리는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은 순교자 경당의 사제 루키아누스를 불러 당부합니다.
"요한이 올 것이니, 그를 위해 장소를 준비하시오."
순교자 경당에 도착한 요한은 하얀 의복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입던 옷을 조용히 벗고 신발만 빼고 모두 바꿔입습니다.
다음 요한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성체를 모시고, 평소 사용하던 형태로 마지막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아멘이라고 말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 요한, 그의 비천한 시신은 바실리쿠스 경당으로 옮겨 바실리쿠스 무덤 옆에 안장됩니다.'
아마도 요한의 좌우명은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아, 살아서보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성인, 요한 크리스토무스요 사후 1600년쯤 지나 이렇게 동아시아 한국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 강론에 인용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지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식사 습관도 소개합니다.
'그는 우아한 삶과는 달리 지나치게 검소했고, 그런 것에 돈을 쓰는 행위를 하느님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요한은 혼자 먹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술의 열기가 그의 머리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씨에 그는 약간의 장미수를 마셨습니다.
때로 요한은 먹는 일을 잊어버리고 저녁까지 식사를 미루기도 했습니다.
교회 문제에 휘말리거나, 성경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영적 주제에 관한 묵상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나 아주 적게 먹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14권; 강선남 역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 279-282쪽)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좌우명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며,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 역시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
오늘 복음은 사랑 고백에 관한 요한복음의 아주 유명한 부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차례 물음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미사 초입의 입당송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라고 문을 열고 있네요.
복음에 나올 베드로의 사랑 고백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임을 일깨우며 미사를 시작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에 제1독서를 먼저 훑어봅니다.
카이사리아의 신임 총독 페스투스의 눈에 비친 사도 바오로 관련 이야기로 그의 말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사도 25,19)
제3자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문제가 딱 그 정도입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그의 보고에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온기도 물기도 배제된 견해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아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면 페스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르게 이 사안을 보고 또 서술했겠지요.
복음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독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밤새 헛그물질로 지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음식으로 아침을 막 들고 나서의 대화이니 이미 애정과 충만한 만족감, 감사가 넘치는 중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세 번의 물음이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의 과오를 기워갚도록 하신 배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이 베드로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리 하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추궁이나 보속의 부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단순하고 담백한 질문에 비해 베드로의 대답은 좀 복잡합니다.
그냥, "예, 사랑합니다 주님!" 하면 좋겠는데 자꾸 앞뒤로 부연 내용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지 않느냐며 길어지는 대답은 즉각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자칫 말대꾸 같이 느껴질 위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보다 "알다"라는 동사에 더 강세가 부여되어 힘도 좀 빠집니다.
또 "사랑하느냐"(love)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좋아한다"(like)로만 응답을 합니다.
두번째도 똑같이 응답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강도를 낮추어 "좋아하니"(like)로 물으시어 베드로의 자신없는 사랑고백의 눈높이에 맞추어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왜 그렇게 자신 없어 했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죄 중에 있을 때,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때, 죄의식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원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눈을 피해 공간적으로 숨지는 못하지만, 변명과 딴청과 실없는 말로 숨어버린 경험이 있다면, 즉답을 피해 빙빙 말을 돌려본 적이 있다면, 지금 베드로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짜안~ 하고요.
하지만 사랑 여부를 묻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온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고 연대가 있지요.
이미 유형 무형으로 맺어진 끈끈한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3자나 관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이라면 상대의 사랑스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의 몇 초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답답하고 긴장되는 초조한 순간인지를 잘 알 겁니다.
사랑을 묻는 이의 진심에는 기대가 묻어 있고,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구걸에 가까운 바람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시는 이 순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사랑을 기대하고 청하고 더 나아가 구걸하기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순간입니다.
구약의 역사 내내 당신과의 사랑에서 등을 돌린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하다가, 사랑이라는 본성 상 제풀에 꺾여 다시 그들을 품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당신 아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믿고 아꼈지만 당신을 부인했던 수석 제자에게 다시 겸손히 사랑을 물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사롭고 감미로운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세 번 "사랑"을 물으시고, 세 번 어징쩡한 "응답"을 들으시고, 세 번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당신 양들을 위한 사랑으로 옮아가야 함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양들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은 멈춤 없이 고이지 않게 흘러야 하고 번져나가야 하니까요.
"나를 따라라."
(요한 21,19)
이처럼 완전의 숫자 3만큼의 횟수로 세 차례씩 질문과 응답과 당부가 오고간 뒤 비로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베드로에게 부여될 "직무"에서 베드로 "개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맡기는 내 양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 당부 명령에는 사명과 책임이 깔리기 마련이라,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 인격과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옅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야 "따름"을 언급하신 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서 그랬을 겁니다.
질문과 응답과 당부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본질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시선은 "양"에서 "베드로"의 인격으로 옮아갑니다.
주님과 그는 "나"와 "너", 즉 "I"와 "You"의 관계로 마주하며, 진정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직 현장, 사목 현장, 봉사 현장에서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정신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당부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양들의 안위가 우선이어도 주님 앞에 머무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양들과 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단계로 그쳐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성과와 양들의 칭송이 쏟아져도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의 단계일 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전부 바쳐드리는 자기 증여와 앞서 가신 그분의 운명을 나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과 나를 비워낸 자리에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담겠다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안에 담고 물들어 갑니다.
결국 그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사랑 질문과, 부족한 응답과, 주님의 당부를 거쳐 따름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일치의 여정이지요.
우리 꼴을 다 아시고도 사랑을 구걸하시고 따름이라는 곁자리를 내주시는 주님께 빙 돌리지 말고 주저없이 사랑을 외쳐 고백하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아가페적인 사랑이 못되고 "당신이 참 좋아요"라는 우정의 고백이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요즘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긴장 때문에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유명한 맛 집을 한 번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제가 주로 가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대박집, 금성가든, 제주도, 곱창이야기, 병천순대, 나주곰탕’을 자주 갔습니다.
자주 가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되면 특별한 서비스를 주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성지도 많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복음을 선포한 곳이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고,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10번 이상은 다녀왔습니다.
저는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하였습니다.
매년 공동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제가 함께 했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 할 때입니다.
매년, 신문사 주최로 성지순례가 있었고, 저는 함께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성지가 있지만 저는 그 중에도 ‘갈릴래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배 모양의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행복선언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여라. 나도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3번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3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확신에 차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년에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번 넘게 ‘그리스도의 식탁’을 찾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까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등….
맞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건축에 온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우디는 하루의 건축 일을 마치면 오후 5~6시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전차와 부딪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 73세.
그런데 형색이 초라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꽤 긴 시간을 사고 장소에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지나가던 택시 기사 한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입원 처리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후 3일이 지나고서야 그의 인부들이 병원에서 그를 찾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라서 수술하고 3일이 지난 뒤에 하늘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너무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행색이 형편없다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외면한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 물음을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답변에 곧바로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이웃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또 단죄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들은 화려하고 멋진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역시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 없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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